[거연심우소요]
靑丘 선문의 祖庭 향상일로의 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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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1 년 1 월 [통권 제93호] / / 작성일21-01-15 09:55 / 조회7,056회 / 댓글0건본문
[居然尋牛逍遙 4] 양양 진전사
道義傳來密旨趣
槿域江山種心花
강원도 동해안 양양 낙산사에서 설악산을 향하여 내륙으로 들어가면 광대한 설악산 지역의 한 자락인 강현면 둔전리屯田里로 가게 된다. 넓은 들판을 지나 골짜기 안에 있는 둔전저수지를 향하여 들어가다 보면 길 옆에 진전사지陳田寺址가 있다.
진전사지는 말 그대로 옛날 번창했던 진전사가 있었다가 폐사된 자리이지만, 현재는 도의선사(道義禪師 ?-? 도당 유학: 784-821)의 부도탑浮屠塔이 있는 구역에 적광보전寂光寶殿 하나를 새로 지어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는 스님이 가난한 절을 지키고 있다. 1975년에 있은 학술조사에 의하면, 진전사의 금당金堂은 현재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는 구역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더 위로 올라가 도의선사 부도탑이 있는 구역에서는 ‘진전’陳田이라는 글씨가 있는 기와가 출토되는 바람에 이 일대 전체가 진전사 사역寺域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도탑이 있는 구역에 덩그러니 서 있는 적광보전의 넓은 앞마당에 놓여 있는 큰 주춧돌들과 축대를 보면 그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사진 1).
사진1. 진전사 적광보전.
진전사 삼층석탑은 높이 5미터로 화강석으로 만든 것인데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세워져 있다. 통일신라 9세기 때의 석탑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형태에서도 손상된 것이 거의 없이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탑신의 4면에는 부처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고, 2단의 기단에는 사면에 비천상飛天像과 불교의 호법신인 팔부신중八部神衆, 즉 천天, 용龍, 야차夜叉, 건달바乾闥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睺羅迦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국보인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으로서 세련된 모양과 조각, 그리고 균형미가 뛰어나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사진 2). 이 구역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금당지로 추정되는 곳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지가 확인되면서 통일신라 후기 선종의 영향을 받은 가람배치 형식인 ‘1탑 1금당’식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 도의선사 부도탑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石造 부도탑으로 인정되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사진 3).
당우들이 들어선 사찰과는 달리 폐사지를 걷다보면 주위의 옛 풍광이 그대로 있는 것 같아 시간이란 인간이 말들어낸 개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공적空寂의 공간에서 나라는 존재도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서 먼지보다도 작은 미물微物에 지나지 않으며, 궁극에는 공한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사진2. 진전사 삼층석탑.
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인 821년, 헌덕왕(憲德王 13)때에 도의선사가 당나라에서 선종 역사상 ‘마조선’馬祖禪이라는 이름으로 큰 획을 그은 대적선사大寂禪師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제자인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에게서 불법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이 절에 주석하면서 경전보다 참선을 위주로 수행하는 남종선南宗禪을 한반도에 최초로 전래한 곳이다. 그리하여 현재 남종선을 선종의 중심 맥으로 하고 있는 한국 조계종曹溪宗으로서는 한국 선종의 시원始原이 되는 절이기 때문에 진전사를 조계종의 종찰宗刹로 정하여 소중히 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조계종은 이곳을 한국불교의 제일 큰집으로 정하여 대대적으로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부도탑이 위치한 구역일대에 대한 강원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탑지 1개소, 건물지 9개소, 축대시설 등이 확인되었고, 사찰 구역의 중심부에서도 또 다른 탑지와 법당지가 발견되었으며, 남쪽 축대 우측에서 돌출된 누각이 있었던 곳과 남쪽 계단의 북쪽에서 중문이 있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각종 문양의 기들이 대거 출토되었고, 청자, 분청, 백자 등도 다수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진전사가 창건될 당시에는 선종이 아직 수용되기가 쉽지 않아 도의선사도 설악에 은거하며 불법을 펼친 정도였으니 절의 규모는 작았을 것이고, 그 이후 선종이 신라 왕실과 지방호족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사세가 조금씩 확장되다가 고려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커졌다고 보인다. 이렇게 하여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세조世祖대에 이르기까지 진전사에는 많은 당우들이 대규모로 축조되고 선종사찰의 중심으로 왕성하게 그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一然禪師, 1206-1289) 선사도 이곳에서 대웅 장로大雄長老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고 한다(사진 4).
「삼국사기」를 보면, 도의선사가 신라로 귀국하여 활동한 사실에 관한 내용은 없다. 그 무렵 신라에서는 가뭄과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고 자손들까지 팔아먹는 일이 발생했고, 웅천 도독 김헌창金憲昌이 자기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왕이 되지 못했다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 죽고, 또 그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여주 고달산高達山에서 도적떼들과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 죽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왕실에서는 당나라로 국비유학생 12명을 보냈다. 역사에서 이 시기는 선덕왕이후 신라 멸망까지 150여 년간 20여 명의 왕이 왕위쟁탈전을 벌였다고 기록된 시기이다. 이런 권력투쟁의 혼란 속에 장보고(張保皐 787-846)도 왕위쟁탈전에 끼어들어 군대를 동원하여 839년에 김우징金祐徵을 신무왕神武王으로 옹립하고 벼슬을 차지하였다가 문성왕文聖王때 다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846년에 신무왕 옹립의 반란 동지였던 염장閻長에게 목에 칼을 맞고 죽었다.
사진3. 도의 선사 부도탑.
이 무렵 당나라에서는 도교를 신봉한 무종(武宗 814-846)이 845년(會昌 5)에 불교를 없애버리려고 한 도사道士 조귀진趙歸眞의 사주를 받아 회창법난會昌法難을 일으켰다. 당시 불교 승려 90% 정도를 모두 환속시켜 버리고 장안의 사찰을 제외한 전국의 불교 사찰을 모두 불태워 없앴다. 살아남은 승려들은 심산유곡으로 피하였고, 신라의 도당유학승渡唐遊學僧들은 외국의 승려라서 환속 대상에 제외되었지만 장안에 출입이 금지되어 대부분 신라로 귀국하는 일이 벌어졌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고 내세우던 도사가 이런 광란의 짓을 저질렀는가 하면, 무종은 도사들에게 불로장생不老長生의 단약丹藥이라는 것을 받아먹다가 중독되어 왕이 된 후 6년 만에 황천길을 떠났다. 인간들이 한 짓을 보면 실로 가관이다. 역사에 기록된 종교전쟁이나 마녀재판 등을 보면, 동서양 할 것 없이 인간은 계속 이런 짓을 반복했다. ‘이성의 시대’를 통과했다고 하는 지금이라고 인간이 과연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통일신라시대에 중국에서의 이러한 정치와 불교의 변동에 따라 도당유학승들이 귀국하게 되면서 중국 선종이 신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선승들이 귀국하였을 때에는 왕실과 진골세력들의 지원 하에 전성기를 이루었던 교종이 다소 힘을 잃어가기는 했지만, 왕도인 경주지역에서는 교종세력이 강하여 선승들과 선종을 강력히 배격하여 중앙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변방에 거점을 마련하고 왕실과 관계를 서서히 만들어 나갔다.
사실 선종만 놓고 보면, 신라에서는 북종선北宗禪이 먼저 들어 왔다. 북종선은 다양하기는 하지만 ‘관심’觀心이라는 깨달음의 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수행법과 염불을 중시하고 ‘관심석’觀心釋이라는 경전 해석법을 견지하였다. 비문 등의 기록에 의하면, 법랑法朗화상이 당나라 4조 도신(道信 580-651)화상에게서 법을 받아 온 것으로 되어 있고, 신행(愼行 704-779)화상은 북종선이 왕성할 때 당나라로 건너 가 신수(神秀 ?-706) 이후 장안과 낙양의 법주이고 세 황제의 국사로 선종의 중심이었던 대조선사大照禪師 보적(普寂 651-739)화상의 문인인 지공(志空 ?-?)화상에게 공부를 하고 759년 귀국하여 단속사斷俗寺에서 법랑선사의 맥을 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의 제자 준범遵範선사도 북종선을 이어 갔다. 이들은 원성왕의 손자인 김헌정金獻貞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으며, 신라 왕실과 상층 지배세력들도 그들을 적극 후원하고 따랐다.
중국에서는 성당盛唐시기(713-770)에 북종선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중원지역을 통일하고 있었는데 그 영향이 신라에도 미쳤다. 이처럼 교종과 북종선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도의선사가 귀국하여 남종선을 말하자 ‘마귀의 말’[魔言]이라고 공격을 받는 지경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산조開山祖라고 말해지는 그도 변방에 은거하게 되었고,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서 그에게서 법을 전수받은 염거(廉居 ?-844)선사도 조용히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제자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선사에 와서 비로소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寶林寺에서 가지산문을 개창하기에 이른다.
사진4. 진전사지 오르는 계단.
한국 불교사를 보면, 이러한 선승들이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걸쳐 형성한 산문을 흔히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한다. 그 형성 시기와 활동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한 형편이지만, 대체로 9개의 산문은, ① 당나라 서당지장에게서 법을 전수 받은 도의선사가 귀국하여 진전사에서 개산하고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서 개창한 가지산문, ② 도의선사와 같이 서당지장에게서 법을 받은 증각홍척(證覺洪陟 ?-?)선사가 826년(흥덕왕 원년) 무렵 귀국하여 지리산 남원 지실사(知實寺. 뒤에 實相寺로 개명)에서 개창한 실상산문實相山門, ③ 도의선사와 같이 서당지장에게서 법을 전수 받은 적인혜철(寂忍慧哲 785-861 도당 유학: 814-839)선사가 839년 귀국하여 무주 쌍봉사에 머물다가 842년 동리산桐裏山 곡성 태안사泰安寺에서 개창한 동리산문桐裏山門, ④ 마조도일의 제자 마곡보철(麻谷寶徹 ?-?)선사에게 법을 전수 받아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로 명성을 날린 낭혜무염(朗慧無染 800-888 도당 유학: 821경-845)선사가 845년 보령 성주사에서 개창한 성주산문聖住山門, ⑤ 마조도일의 제자인 염관제안(鹽官齊安 ?-842)선사와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의 제자인 약산유엄(藥山惟儼 745-828)선사에게서 법을 공부하고 847년 귀국하여 강릉 굴산사崛山寺에서 개창한 굴산문崛山門, ⑥ 마조도일의 제자인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에게서 법을 전수 받아 847년에 귀국하여 전남 쌍봉사雙峰寺에서 선풍禪風을 일으킨 도윤(道允, 798-868 도당 유학: 825-847)선사의 제자인 징효대사 절중(折中, 826-900)선사가 영월 사자산 흥녕사興寧寺에서 개창한 사자산문獅子山門, ⑦ 이엄(利嚴, 870-936 도당 유학: 896-911)선사가 당나라 동산양개洞山良价의 제자인 운거도응(雲居道膺 835?-902)에게서 법을 전수 받고 911년에 귀국하여 해주 수미산 광조사廣照寺에서 개창한 수미산문須彌山門, ⑧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 824-882)이 창건한 문경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서 그의 제자 양부楊孚 선사의 제자인 정진대사靜眞大師 긍양(兢讓 878-956)선사가 당나라에서 석두희천에게 남종선의 법을 전수 받고 924년에 귀국하여 개창한 희양산문曦陽山門, ⑨ 원감현욱(圓鑑玄昱 787-868 도당 유학: 824-837) 선사의 제자인 구가야 왕족의 후예 진경심희(眞鏡審希 854-923)선사가 효공왕 때 창원 봉림사에서 개창한 봉림산문鳳林山門을 말한다.
이는 모두 선종이지만 선사들의 개성과 그 제자들의 가풍에 따라 가르침과 정치적 행적에서는 차이가 있었고, 당시 밀착하거나 관계한 신라 왕실의 세력 그리고 신라말기의 혼란한 정치상황과 고려 왕실과의 관계에 따라 성쇠盛衰와 성격에서 차이가 있었다. 도의, 혜철, 현욱, 도윤, 무염, 이엄 이외에 앙산혜적(仰山慧寂 814-890)의 제자인 순지(順之 ?-? 도당 유학: 858년경)화상과 소산광인(疎山匡人 837-909)의 제자인 경보화상 등은 당시 중국에서 모두 마조선사의 제자들에 의해 ‘마조선’ 또는 ‘홍주종’洪州宗이 불교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공부하고 왔기 때문에 당연히 신라에도 마조선의 종풍을 펼쳐나갔다. 당시 일본에서도 도당구법승이나 직접 일본으로 건너간 당 나라 선사들이 이런 선풍을 펼쳐 나갔다. 이 시절에는 조사祖師들이 곧 부처로 간주되었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경전의 반열에 올려놓아 이를 간행하고 유포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나는 여기서 도대체 마조선이 무엇이기에 당시 신라, 일본 등 동아시아국가들에까지 그 바람이 이렇게 강하게 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중국에서는 경전의 번역을 통하여 고차원적인 불교철학이 전파되어 중국불교의 기반을 구축했고, 기라성 같은 뛰어난 승려들이 앞 다투어 연구하여 교학을 체계화하고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교학이 성당시대 이후 정치적 불안 상황과 맞물리면서 왕실과 귀족, 지식층 중심의 불교에 대한 비판이 생겨나고, 부처 되는 길이 어려운 경전 공부와 수행을 통하여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이해하지 않아도 마음을 직관하는 수행과 염불만 해도 부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에 변방의 호족들이나 절도사들이 적극 호응하였다. 그들은 중앙에 대항하는 세력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사상을 받아들였고 이는 이해하기도 쉬운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그러는 와중에 무종에 와서 전대미문의 폐불사태까지 발생하자 교학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승려들과 사찰이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고, 경전이 없어도 득도가 가능하다는 선종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이는 사대부 유학자들까지 결국에는 불교와 유교가 본질에서는 차이가 거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당나라의 상황을 좀 더 들여다보면, 선종이 5조 홍인의 제자인 조계혜능(曹溪慧能 638-713), 옥천신수(玉泉神秀 ?-706), 금릉법지(金陵法持 635-702)등에 이르러 각각 남종, 북종, 우두종牛頭宗으로 분화되어 서로 병존하게 되었는데, 혜능의 제자인 강경파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8)가 등장하여 북종선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여 이를 무력화시키고 그 와중에 우두종도 힘을 상실해가면서 결국 혜능을 선맥의 정점으로 하는 남종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혜능의 제자에는 하택신회 이외에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과 청원행사(靑原行思 ?-740)도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세상에서 별 주목도 받지 못했지만, 남악회양에게서 일세를 풍미하게 되는 마조도일과 석두희천이 나오면서 천하는 남종으로 통일되었다. 마조도일은, 도라는 것은 별것이 아니고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라고 일갈하고, ‘마음이 바로 부처다’[卽心卽佛]고 하며 누구나 부처의 경지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기에 부처가 되려고 출가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앉은 자리가 바로 깨달은 자리라는 주장을 거침없이 했다. 이렇다 보니, 어려운 경전 이해에 골몰하는 사람들에게 울타리를 깨부수는 해방감을 주었고, 경전을 읽지도 못하는 일자무식꾼들도 6조 혜능도 일자무식꾼이었다고 하며 환호를 하기에 이르렀다. 경전이고 지식이고 다 필요 없다. 일상 생활에서 철저히 살면 그것이 부처되는 길이다. 출가는 무슨 출가냐 앉은 자리에서 깨달으면 되는 것이지. 염화시중의 미소로 깨닫는 것이지 문자를 이해하고 경전을 터득한다고 일생을 보낼 필요가 없다. 이는 선교일치가 아니라 일상 생활과 선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었다. 홍수로 둑이 터지고 산에서 바위들이 왕창 굴러 내려와 뒤엉킨 가시밭을 한꺼번에 다 뭉개버린 것이었다. 속이 시원하고 통쾌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선이었다. 그리하여 마조선사와 석두선사에게로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
이 마조도일에게서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 서당지장, 장경회휘(章敬懷暉 754-815), 염관제안, 불광여만(佛光如滿 8-9세기), 마곡보철, 남전보원 등과 같은 기라성 같은 선장(禪匠 Zen master)들이 쏟아져 나왔고, 백장회해에서 황벽희운(黃蘗希雲 9세기 전반)과 위상영우(潙山靈祐 771-853) 같은 선사들이 나왔으며, 남전보원에게서 ‘무’無자 화두로 유명한 조주종심(趙州從諶 778-897)이 나왔다. 앙산혜적은 바로 위산영우의 제자이고,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은 바로 황벽희운의 제자이다. 가희 선가 역사상 백화제방百花齊放이고 만화방창萬化方暢을 장식한 시대였다.
선종이 이러다 보니 사회에 대한 선의 영향은 계속 확대되어 갔고 사대부 관료들이나 문인들과도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문인들과 관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종에 귀의하기도 했고, 유종원(柳宗元 773-819)과 유우석(劉禹錫 772-842)은 혜능의 비문을 같이 썼고, 말년에 용문석굴이 있는 용문의 향산사香山寺에 들어간 백거이(白居易 772-846)도 불광여만에게 배웠고, 제상 배휴(裴休 797-870)는 황벽희운에게 귀의했다. ‘시불’詩佛 왕유(王維 701?-761)도 선사들에게 배웠다. 당나라 시대에 중국불교에서 선사들의 등장과 그들이 만들어낸 ‘선’禪에 대하여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다. 중국의 선은 인도의 선과는 다른 것이고, 인도불교가 한어로 경전이 번역되면서 ‘중국불교’로 발전하던 것이 중국의 오랜 도가道家적 기층문화와 결합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러한 당나라 불교계의 변동으로 신라에 선종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화두話頭를 들고 참선을 하는 ‘간화선’看話禪 또는 ‘공안선’公案禪이라고 하는 것은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 주희(朱熹 1130-1200) 등 성리학의 맹장들이 활약한 남송南宋시대 와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신라에 들어온 남종선에서 그 수행법이 어떠했는지가 궁금하다. 수행자들간의 대화나 행동을 통하여 선수행이 있은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수행법이 구구했는지 아니면 일정한 형식이 있었는지 더 규명해볼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수행법이 결국 개인의 마음 수련과 공空의 깨달음에 그치는 것이라면 종교로서의 역할에서는 반만 하고 만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떨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이룬다’는 과제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물음이 남기 때문이다.
최치원이 왕명을 받아 지은, 「진감선사비명眞鑑禪師碑銘」과 「지증대사적조탑비명智證大師寂照塔碑銘」을 보면, 이와 관련하여 그는 선종을 심학心學이라고 하고 최상승最上乘의 도로 덕德을 세우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비우게 하여 궁극에는 신라라는 나라가 이롭게 되는 것이라고 본 것 같다. 불교가 개인 차원에 머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는 권력과 결합하여 흥망성쇠를 거듭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종교와 권력이 밀착하였을 때 생겨났던 엄청난 비극과 폐단을 경험한 끝에 오늘날 신정국가神政國家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는 정교분리政敎分離를 헌법원리로 정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동서양의 많은 종교인들이 자기 종교의 교세敎勢 확장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정치권력과 밀착하고 권력은 그들의 정치적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그러한 것이 인간의 마음 비움에 기여할 것 같지도 않고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더 더욱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근래 우리나라에서는 성철스님이 나타나 정치권력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도 현실 권력과는 아예 인연을 끊고 수행자로 일로매진하며 인간에게 보여준 모습이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 그 엄연한 사실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선불교가 개인의 평온에 머무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진전사에서 그 달고 맑은 ‘공’空 ‘기’氣를 마시고서도 폐사지를 거닐 듯 아직 이런 질문이나 하고 서성대고 있으니 이 또한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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