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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책의 향기]
불교판 ‘식민사관’은 어떻게 정립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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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활  /  2021 년 1 월 [통권 제93호]  /     /  작성일21-01-13 16:03  /   조회7,88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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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조불교李朝佛敎』

 

‘한 남자’가 1904년 연말年末 일본에서 조선으로 왔다. 대한제국(1897-1910) 정부의 초청으로 한성관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전신) 교사로 부임하기 위해서였다. 1898년 동경제국대학 문과에 입학해 1902년 동경제국대학 한문학과를 졸업한 ‘이 남자’는 조선에 온지 “3년 만에 한국어 학습을 거의 마쳤다.”(주1)

 

 1909년 『한어문전韓語文典』(사진1)이라는 한국어사전을 펴낸 ‘이 남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學務局·취조국取調局·조선도서관 촉탁(1910-1911)으로 조선의 풍습과 습관을 조사하고 속담 등을 수집해 『조선의 이야기와 속담朝鮮の物語集附俚諺』(1910), 『조선의 속담집朝鮮の俚諺集』(1914) 등도 출간했다. 다양한 연구를 거듭하던 ‘이 남자’는 1919년 「조선의 교화와 교정朝鮮の敎化と敎政」이라는 논문으로 동경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진1. 다카하시의 <한어문전韓語文典>(1909년 발간). 일본 국회서도관 디지털컬렉션.

 

특히 1921년 출간한 『조선인朝鮮人』(사진2)(주2) 이라는 책에서 ‘이 남자’는 조선인과 풍속 그리고 특징들을 지리적, 지질적, 인종적, 언어적,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문학·예술적, 철학적, 종교적, 풍속·습속적 측면에서 분석해 “조선인의 특징은 사상의 고착固着, 사상의 종속從屬, 형식주의, 당파심黨派心, 문약文弱, 심미관념審美觀念의 결핍, 공사公私의 혼동, 관용[寬雍]과 위엄[鷹揚], 순종順從, 낙천성”(주3)이며 “사상의 고착과 사상의 종속, 즉 사대주의란 아마도 조선인의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큰 특성이라고 하겠다.”(주4)는 결론을 내렸다. 타율성他律性(의타성依他性)과 정체성停滯性이 조선인과 조선역사의 핵심적인 특징이라는 이른바 ‘식민사관’, 지금도 때때로 한국인과 한국을 비판하고 옭아매는데 원용援用되는 이 관점을 정립하는 데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한(?) ‘이 남자’!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1878-1967)가 바로 그다.

 

사진2. 구인모 옮김, <조선인>, 동국대출판부, 2010. 

 

  

경성제국대학 교수(1926-1939), 혜화전문학교 교장(1940), 경학원(명륜학원) 강사(1913-1945), 일본 천리대天理大 교수(1945년 이후) 등 학계에 근무하며 조선인과 조선역사에 대해 주로 부정적 편견을 덧씌웠던 다카하시는 한국학을 연구하거나 이야기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일본인 학자이자, 특히 ‘조선의 불교’와 ‘조선의 유학’이 논의될 때마다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식민사관을 불교에 적용한 『이조불교李朝佛敎』(1929년, 사진3) 등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사진3. <이조불교>,민속원 영인본, 2002. 

 

오대산 영감암靈鑑庵에 있었던 사고史庫를 조사하다 찾은 월정사와 상원사에서 “탈속적脫俗的이고 정경靜境에 있는 느낌을 받은”(주5) 다카하시는 “조선불교에 대한 종래의 관념에 일대 변화를 일으켜,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흥했으며, 어떻게 쇠퇴했는지를 해명하고자 조선불교사 연구에 착수”(주 6)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조선불교의 사상을 지극히 타율적이고, 지독히 정체적停滯的인 사상으로 파악했다. 

 

“조선인은 사상상思想上 특성으로 현저한 고찰성固着性과 비非독립성獨立性을 갖고 있다. 고착성이란 한 번 어떤 사상을 수용하고 자신의 사상으로 터득한 뒤에는 어떠한 새로운 다른 사상을 접해도 결코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옛날의 사상에 붙어 있는 것을 말한다. 비非독립성이란 중국의 사상 이외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사상을 만들어 내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조선의 유학이라고 하지만 실은 주자학이다. … 조선의 불교라 해도 사실은 중국불교의 이식移植이다. 조선불교사는 바로 작은 규모의 중국불교사다. 기타 조선에서 일어난 여러 종교 또한 실은 중국사상의 분장扮裝을 조금 바꾼 것이다.”(주7) 

 

사진4. 이봉춘 지음, <조선시대 불교사연구>, 민족사, 2015. 

 

타율성과 정체성, 즉 비非독립성과 고착성固着性이 조선 사상의 특성이라고 분명하게 못 박고 있다. 약간 거칠게 표현하면 “조선의 불교라 하여도 사실은 중국불교의 이식이다. 조선불교사는 바로 작은 규모의 중국불교사”라는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다카하시는 『이조불교』를 쓴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조선사상의 특성을 조명하는 것 이외, 다카하시의 조선불교 연구엔 다른 목적도 있었다.

 

“우리(일본)의 조선 통치가 물질적 방면과 정신적 방면의 두 면에 걸쳐 노력을 영위하고 실시해야 한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이 정신적 방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연구하는 것은 단순한 학술적 연구 이외의 크나큰 의미를 가진다고 믿는다.”(주8)

 

조선사상의 특성을 비非독립성과 고착성으로 정리·파악해 외세가 조선을 통치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음을 논증하고, 학문적 목적만이 아니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일조一助하고자 조선불교를 연구하는 것임을 숨김없이 밝히고 있다. 다카하시가 일제의 불교정책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하겠다.

사진5. 김용태 지음, <조선후기 불교사연구>, 신구문화사, 2010. 

 

[1] “총독부는 일찍이 조선불교 보존의 계획을 정定하고, 메이지 44년(1911) 6월 사찰령을 반포하여 모든 사찰의 재산권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30본산을 정해 그 주지의 취임은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되고, 모든 사찰을 30본산에 나누어 소속시키며, 또한 출가자의 포교를 인정했다. 이를 시작으로 조선불교는 부활의 운명을 향해 승려는 우리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하며 분발하여 포교와 공부하는 일에 종사했다.”(주9)

 

반포이후 거의 1세기 동안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색된 다양한 이름과 내용으로 한국불교를 옭죄었던 사찰령을 다카하시는 “조선불교 보존 계획의 일환으로 발포發布된 법안”이라고 칭송하고, 사찰령으로 인해 “조선 출가자들은 부활의 운명을 향해 분발하여 포교와 공부하는 일에 종사했다.”고 거침없이 분칠[化粧]하고 있다. 


사진6. 오경후 지음, <조선후기 불교사학사연구>, 문현, 2018

 

문제는 『이조불교』가 적지 않은 ‘학문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毒에 대한 경계를 향기香氣로 늦추듯이 방대한 자료를 활용해 중요한 주제와 문제들을 거론하고 자신의 주장을 논증論證하기에, 『이조불교』에 내포된 편견偏見들을 걸러내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게다가 종교정책의 입장에서 조선시대 불교를 국초부터 성종까지[1기], 연산군부터 고종까지[2기] 등 2기로 나누고, 교법성쇠의 측면에서 조선시대 불교를 국초부터 성종까지[1기], 연산군부터 인조까지[2기], 효종부터 고종까지[3기] 등 3기로 구분해 분석하는 ‘틀’과 ‘연구의 방향성’마저 제시한 점 등은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지금까지 일본인에 의해서도 서양인에 의해서도 시도된 적이 없는”(주10) 방식이었다. 

 

더구나 “과거의 조선인들은 자국의 어떠한 사물에 대해서도 연구하고자 하는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유학사에 있어서는 단편적인 기록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으나 불교사에 이르러서는 써놓은 것이 전혀 없다. 최근에 이르러 학문을 좋아하고 박식한 상현 거사 이능화 씨가 『조선불교통사』(주11)를 저술해 조선학자로서는 파천황의 사업을 이루었다. 그러나 주된 목적은 재료의 수집에 있고, 연구와 비판을 두 번째에 두었다.”(주12) 그래서일까? 『이조불교』처럼 전체적인 안목을 갖고 사료들을 정리·분석하고 체계적으로 조선시대 불교를 조명한 연구서는 다카하시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진7. 권상로 지음, <조선불교약사>, 신문관, 1917. 

 

그런데, ‘연구의 틀’을 만들어 적용했다는 이 점 때문에 1세대 정도의 비교적 짧은 기간 한반도를 식민통치 했지만 일제日帝의 기제機制가 지금도 주변에 맴도는 듯이 보이는 지도 모른다. 사실 일제가 36년 동안 한반도에 이식하고자 한 것은 일본어와 일본문화만이 아니었다. 한반도의 완전한 지배와 영원한 동화同化를 지향했던 일제의 조선식민통치는 일본식으로 변형된 법령과 각종 제도를 통해 이뤄졌다. 일제가 반포한 법령 가운데 조선의 전통사회와 문화에 가장 포괄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1912년 3월 공포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이었다.(주13) 민법, 상법, 민사소송법 등 당시 일본에서 시행되던 법률들이 조선에도 적용됐다. 민사령 시행 전후로 일제日帝는 화폐, 금융, 재정, 등기登記 등의 제도를 체계화했다. 총독부가 반포한 법령에 따라 ‘사유재산 제도’가 확립됐다. ‘사적 개인’과 이를 토대로 한 가족이 형성되고 나아가 공장, 회사, 보험 등의 시장기구와 철도·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등이 본격적으로 개발됐다.(주14) 소위 ‘황국신민’을 육성해 낼 교육제도 역시 일제에 의해 정비됐다. 1세대 동안 일제는 ‘통치의 틀’, ‘사회구조의 틀’, ‘교육의 틀’ 등을 일본식으로 개조해 조선인들에게 적용했다.


사진8. 김영수 지음. <조선불교사고>. 민속원 영인본. 2002. 

 

30년간 지속적으로 정비되고 조직화 된 이런 틀들은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의 기본 시스템으로 작동했다. 대한제국 시기의 관리들이 그대로 총독부의 조선인 관리로 등용되었듯이 총독부의 조선인 관리들은 해방 후에도 대개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행정업무를 보았다.(주15) 

 

 일제가 만들어 놓은 제도와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가 한국사회 전반에 이미 정착되어 있었고, 집행자들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틀이나 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일제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매우 어렵다. 지금도 일제의 그림자가 적지 않게 주변에 어른거리는 착시감錯視感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바둑 게임의 승자든 패자든 결국에는 바둑판과 바둑규칙을 만든 사람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학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카하시 같은 노련한 일본인 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식민통치의 정당성, 조선인과 조선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 그리고 이러한 사고思考와 분석에 젖어들게 만드는 학문적 방법과 틀로 조선인들을 교육시켰다. 다카하시 같은 학자에게서 배운 조선인들이 해방 이후에도 수십 년간 황국신민과 식민사관적 사고방식으로 학문적 활동 등을 했을 것이다.(주16) 그렇기에 지금도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사진9.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쓴 조선시대 불교통사>, 민속원, 2020.

 

[2] “(사찰령이) 사찰재산의 변동, 매각을 일제日帝의 동의가 없으면 할 수 없게 하였는바, 이는 한편으로는 사찰재산 보호를 가져왔다. 이로써 사찰령 시행 이전 지방의 토호 및 개신교에서 자행한 사찰재산 침범에 대한 저지의 역할을 하였다.”

 

[3] “사찰령 등장 이전 불교운영의 혼란, 사찰재산 침탈 등 불교계 자체 내의 여러 모순이 많았지만, 사찰령 체제에 의해 그런 문제가 제거되었던 면도 간과할 수는 없다. … 비록 자생성, 논리성이 미약하고, 일제정책이 관철되었지만 그러한 흐름이 근대 이전의 불교와는 다른 생존과 발전을 담보할 수 있다고 인정한 측면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사찰령’에 대한 이러한 분석과 평가는 조선총독부가 시정 25주년(1935)을 맞아 펴낸 『시정 25년사·데라우치 총독시대』에 담긴 기술記述과 거의 일치한다. 


사진10. 조남호 옮김, <조선의 유학>, 소나무, 1999.

   

[4] “1911년(메이지 44) 6월 제정·실시된 ‘사찰령’과 ‘사찰령 시행규칙’은 실로 조선불교를 빈사 상태에서 소생시켰다. 그 요지를 개괄하면 … 나아가 총독은 병합 당시의 유고諭告에서 신교信敎의 자유와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등을 불문하고 모두 평등하게 이를 취급할 뜻을 선언했기 때문에, 이 사찰령은 곧 구체적으로 재래 불교의 존립과 보호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에 오랫동안 매우 쇠퇴했던 사찰도 새로 주지를 두고 사법寺法을 정해, 재산 보유의 방법이 확립되어 면목을 크게 일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백 년간 억압받아 온 승려는 처음으로 일시동인의 은정恩政을 입고 기뻐하였으며, 굴욕의 처지를 벗어나 다른 종교인들과 균등하게 포교의 임무를 맡아 점점 자신의 직책을 자각하게 되었다.”(주17) 

 

도둑이 힘을 앞세워 “들어오지 말라!”는 어떤 집에 침입해 그 집의 물건을 마음대로 만지고는 “은정을 베풀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 그 집의 재산을 지키고 정리하는 일은 잘하든 못하든 그 집 주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 도둑이 관여할 일이 절대 아니다. 강제로 남의 나라를 점령하곤 마치 재산을 보호해준 것처럼 생색내는 다카하시([1])나 조선총독부의 강변强辯([4])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사찰령 발포發布의 의미를 해석한 어느 한국학자의 주장([2]·[3])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런 점이 바로 다카하시가 노리는 것이고, 일제의 유제遺制가 지금도 주변에서 작동되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 아닐까? 


사진11-1. 누카리야 카이텐의 <조선선교사>, 춘추사, 1930. 

 

다카하시에게는 아쉽게도, 상황과 현실은 다카하시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한국인들도 일제의 책략 등 ‘이런 저런 사정’을 모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불교연구에도 학자들이 연이어 나타나 ‘다카하시의 틀’을 벗고 새롭게 조선시대 불교와 한국불교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동국대 이봉춘 명예교수가 펴낸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서울: 민족사, 2015, 사진4), 동국대 불교학술원 김용태 교수가 출간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서울: 신구문화사, 2010, 사진5), 동국대 불교학술원 오경후 교수가 쓴 『조선후기 불교사학사』(서울: 문현, 2018, 사진6)·『조선후기 불교동향사 연구』(서울: 문현, 2015)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 출간된 책 가운데 퇴경 권상로(權相老, 1879-1965)의 『조선불교약사』(신문관, 1917, 사진7), 상현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신문관, 1918), 권상로의 『조선불교사개설』(1934), 포광 김영수(金暎遂, 1884-1967)의 『조선불교사고朝鮮佛敎史藁』(1939, 사진8) 등도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불교사 연구의 길을 개척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사진11-2.정호경 옮김, <조선선교사>, 보련각, 1978.

 

최근 다카하시의 『이조불교』가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쓴 조선시대 불교통사』(서울:민속원, 2020, 사진9)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됐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조불교』가 한국불교 연구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이 책과 다카하시가 쓴 『조선의 유학』(조남호 옮김, 서울:소나무, 1999, 사진10)을 같이 독해하며 다카하시 등 일제강점기 일본 관변학자들의 사고방식을 분석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더불어, 일본학자 누카리야 카이텐(忽滑谷快天, 1867-1934)의 『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1930, 사진11-1·11-2)와 에다 토시오(江田俊雄, 1898-1957)의 『조선불교사의 연구』(1977)의 시각과 다카하시의 관점을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의 조선불교 연구」(조남호, 『한국사상과 문화』 20, 한국사상문화학회, 2003); 「어용학자 고교형高橋亨의 활동과 한국 유학관」(최영성, 『한국유학사상사』 5, 아세아문화사, 1997); 「고교형高橋亨의 한국 유학관 검토」(윤사순, 『한국학』 12, 1976) 등 다카하시의 한국관韓國觀을 고찰한 논문들도 참고할 만하다.

 

 

주)-

1.高橋亨著, 『李朝佛敎』(影印本), 서울: 민속원, 2002, p.1(緖言). 이 책에서 인용할 경우 ‘『李朝佛敎』, p.1’로 표시. 

2. 이 책은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구인모具仁謨 번역·해제)는 제목으로 2010년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출판됐다.

3.『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 pp.25-88.   

4.『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 p.89.

5.『李朝佛敎』, p.11(緖言).   

6.『李朝佛敎』, p.11(緖言).

7.『李朝佛敎』, p.13(緖言).   
8.『李朝佛敎』, p.23(緖言).

9.『李朝佛敎』, p.19(緖言).   

10.『李朝佛敎』, p.24(緖言).

11.『조선불교통사』(주 11)는 1918년 출간됐다.
12.『李朝佛敎』, p.24(緖言). 『조선불교통사』에 대한 다카하시의 평가가 반드시 정확한 것만은 아니다. 
13. 이영훈 지음, 『한국경제사Ⅱ-근대의 이식과 전통의 탈바꿈』, 서울: 일조각, 2016, p.33.
14. 이영훈 지음, 『한국경제사Ⅰ-한국인의 역사적 전개』, 서울: 일조각, 2016, pp.63-64.
15.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안용식 편, 『한국행정사연구Ⅰ–日帝 武斷統治期下 韓人官僚의 任免狀況』, 서울: 대영문화사, 1993; 안용식 편, 『한국행정사연구Ⅱ–1920년∼1945년 8월까지의 韓人官僚의 任免狀況』, 서울: 대영문화사, 1994; 안용식·강만생, 『일제강점기 조선인 관리』(제1권 기관별), 서울: 연세대학교 공공문제연구소, 2015; 안용식·강만생, 『일제강점기 조선인 관리』(제2권 인명별), 서울: 연세대학교 공공문제연구소, 2015; 안용식·유년근, 『갑오개혁이후 병합전 한국인 관리』(상권), 서울: 연세대학교 공공문제연구소, 2019; 안용식·유년근, 『갑오개혁이후 병합전 한국인 관리』(하권), 서울: 연세대학교 공공문제연구소, 2019.
16. 자세한 내용은 ‘정종헌 지음, 『제국대학의 조센징』, 서울: 휴머니스트, 2019’를 참조하라.
17. 박찬승 등 역주,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상)-시정 25년사❶』, 서울: 민속원, 2018, pp.18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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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활
성철사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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