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와 사상]
불교의 시대적 과제 주체적 해결에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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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1 년 3 월 [통권 제95호] / / 작성일21-03-05 09:15 / 조회5,543회 / 댓글0건본문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3 | 기요자와 만시
위로부터의 정치적 격변을 겪은 근대 일본은 자폐적인 증세를 겪게 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기에는 드디어 근대국가의 정신적 구심점인 천황제의 수립과 함께 국수 및 국가주의의 발흥, 대외전쟁의 개시, 식민지 건설 등으로 불온한 삶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산업사회로의 재편은 농촌을 피폐화시키고 탐욕적인 도시들을 번성하게 만들었다. 서구 계몽시대의 사상이 물밀듯이 들어왔으며, 일본사회도 예외 없이 자본주의와 그 부수적인 문제들에 그대로 노출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계는 전혀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기요자와 만시(淸澤滿之, 1863-1903, 사진 1)는 그 시대를 온몸으로 겪은 불교인이다. 그리고 그 불안한 민중의 심리를 누구보다도 깊이 꿰뚫었다. 시대의 질곡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자신이 의지한 정토신앙을 발판으로 영혼의 폐쇄적 질환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자신을 극한의 실험대 위에 올려놓았다. 비록 짧았지만 굵은 영혼의 궤적을 그렸으며, 덕분에 한 세기가 지난 지금 근대 불교인 가운데 가장 뜨거운 연구의 대상으로 부상했다. 근대적 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의 강열한 정신성은 언제든 소환될 것으로 본다.
사진 1. 기요자와 만시, 기요자와 만시 기념관 제공.
그는 동본원사를 본산으로 하는 정토진종 오오타니파大谷派의 승려로 도쿄대에서 서양철학과 종교철학을 배웠으며, 당시 불교철학화를 시도한 이노우에 엔료의 철학회 창설에도 관여했다. 후에 동양대학이 된 철학관에서 심리학과 철학사를 가르쳤다. 교토부 진조尋常중학교 교장과 도쿄 진종대학(현재 교토시 오오타니 대학)의 학감으로 일하기도 했다. 1890년부터 엄격한 금욕생활에 들어가 모든 향락과 일상의 취미로부터 결별했다. 구도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자 한 것이다.
투철한 자기 수련 속에서 1892년 『종교철학 해골骸骨』을 간행하고, 다음 해 시카고 만국종교대회에 영문판을 내놓았다. 최소한의 금욕, 철저한 지계 생활은 4년 뒤 폐결핵을 초래했다. 1896년 교토부 시라카와촌白川村으로 옮겨 종문개혁운동을 시작했다. 『교계시언敎界時言』을 발행, 자종의 근대적 교육제도의 확립을 제언하고 교단개혁을 외치는 가운데 지도자들과의 대립으로 제명되기도 했다. 1898년부터는 도쿄에서 사숙인 고코도浩浩洞를 열었다. 월간잡지 『정신계精神界』도 발행했다. 이곳에서 향후 진종학을 수립하고 종문의 대학을 이끌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킨 기요자와는 1903년 폐결핵의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그의 후예들이 교단 곳곳에서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사실 그는 교단 내에서는 거물이었지만 불교학계로부터는 거의 조명을 받지 못했다. 스즈키 다이세츠나 시바 료타로 등 몇몇이 그를 높이 평가했지만 사상적인 측면은 거의 사장되어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전집이 재간행되고, 불교학자 야마모토 노부유키(『‘정신주의’는 누구의 사상인가』), 곤도 슌타로(『천황제 국가와 ‘정신주의’』), 후지타 마사카츠(『기요자와 만시가 걸은 길』) 등에 의해 그의 사상이 조명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철학자 이마무라 히토시(『기요자와 만시의 사상』, 『기요자와 만시와 철학』)에 의해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기요자와의 철학성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떤 사상성이 현대인들에게 조응하는 것일까.
사진 2. 기요자와 만시 전집, 이와나미서점.
기요자와의 사상은 『종교철학 해골』을 통해 근대적 종교학을 개척하고자 했던 시기와 『정신계』에 정신주의를 제창하여 절대무한의 세계를 수립한 시기다. 전자는 『타력문철학 해골』과 『연기존재론』으로 전개되는데 서양의 철학적 존재론과 불교적 존재론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 기본적인 언어 구조는 유한과 무한의 대립과 융합에 기초하고 있다. 철학은 무한을 탐구하는 것이고, 종교는 무한에 대한 신념이다. 따라서 철학이 그 작업을 완료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종교의 작업이 시작된다고 한다. 기요자와는 이처럼 『종교철학 해골』의 대전제를 의식과 신체를 총동원하여 증명하고자 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국가와 자본주의는 구조적인 타율과 복종을 강요했다. 기계적인 문명에 삶의 주도권을 빼앗긴 민중들은 심리적인 탈출구를 찾고 있었지만 미망에 불과했다. 기요자와는 다시 종교에 길을 물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길과는 다른, 서구문명에 대응 가능한, 그러면서도 이성과 철학을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식으로 구사하면서 숨통을 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묻는다. 종교란 무엇인가. 그때까지의 정의를 나열했지만, 그는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 자신의 정의를 자유롭게 내려 보자고 한다. “종교는 유한과 무한의 통일이다.”
그는 말한다. 무한이 유한 속에서 현출하고, 유한이 무한 속에서 현출한다. 그리고 최후에는 둘의 구별이 불가능해진다. 유한은 무한에 의해 생성되고, 무한은 유한에 의해 생성된다. 그것만이 아니라 유한은 무한이고 무한은 유한이다. 통일이 생긴다. 절대성과 상대성을 통일시킨다. 나아가 의존과 독립, 일과 다, 전체와 부분, 완전과 불완전을 유기적 구성으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이를 군주와 신하의 상호성인 주반호구主伴互具의 관계로 설명한다. 군주와 신하의 상호의존 또는 상호성을 말한다. 마침내 자력수행문과 타력구제문의 통일에까지 이른다. 인생의 유한성과 아미타불의 무한성으로 대비되고, 깨달음이나 진여 모두는 무한의 범주에 속한다. 궁극적으로는 “각자의 영혼 혹은 심식이 개발 전진하여 무한에 도달하는 것이 종교의 요지가 된다.”고 한다.
기요자와의 종교철학적 전진은 정신주의에서 꽃을 피운다. 정신주의는 『정신계』의 창간호에서 선언된다. 야마모토 노부유키는 앞의 책에서 기요자와의 글이 그의 문하생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매우 충격적이지만 하나의 학문 공동체 안에서 기요자와가 승인한 것으로 보고 이를 폭넓게 해석하여 그 흐름을 관찰하는 것으로 용인하기도 한다. 정신주의는 기요자와를 정점으로 한 일군의 사상적 동일집단의 산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신주의는 앞의 종교철학적인 무한의 견지를 현실화시켜 부처, 여래를 최종 지점으로 하는 절대무한자에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정신주의의 첫 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완전한 입각지가 없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이것 없이 이 세상에서 생활하고, 무언가를 행한다면 그것은 마치 뜬 구름 위에서 기예를 연기하는 것과 같다. 전복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처세의 완전한 입각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절대무한자에 의한 것 외에는 없다고 한다. 그 절대무한자가 정신의 내부인가 외부인가에 대한 질문은 필요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을 구하는 사람이 그것에 접하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대무한자의 입각지를 얻은 정신이 발달해 가는 과정이 바로 정신주의이다.”라고 한다.
결국 정신주의는 불교적 지혜를 획득해 가는 길로 나간다. 타력문의 절대화를 꾀하는 점에서 기요자와는 신불神佛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불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신불을 믿기 때문에 신불이 존재한다고 한다. 지옥과 극락 또한 마찬가지다. 하여 “정신주의는 자가의 정신 안에서 충족을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외물을 추구하고 타인을 추종하며 이 때문에 번민우고煩悶憂苦할 것은 없다.”고 한다. 마침내 종교는 주관적 사실이라는 지점에 도달한다. 사실 죽음을 매개로 한 정토신앙은 ‘주관적 진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근대적 인간으로서 기요자와는 이를 간파했다.
유물, 유심론과도 관계없이 오직 실천적 영역인 정신주의는 추상적인 형이상학을 논할 것도 없다. 객관적 사실, 사물에 좌우되지 않는 주관을 탐구하여 그 가운데 절대무한자를 발견하고 자족하는 것이다. 마침내 그의 전매특허인 내관주의內觀主義에 이른다. 즉, “일체의 사태를 주관적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들 마음을 무한절대의 지위에 놓고 활동하는 것이다. 일체의 활동으로써 나의 활동을 인정하는 것이다. 일체의 책임을 가지고 자기의 책임으로 보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러 도덕을 지켜도 좋다. 지식을 구해도 좋다. 정치에 관계하는 것도 좋다. 장사를 해도 좋다. 수렵을 해도 좋다. 나라에 일이 있을 때는 총을 메고 전쟁에 나가도 좋다.”라는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이 내관주의는 결국 제자들에 의해 여러 버전으로 확산되어 제국의 전쟁에 협력하는 역설逆說을 낳게 된다.
사진 3. 기요자와 만시가 열반한 아이치현 서방사西方寺.
정신주의의 한계인 셈이다. 기요자와는 공동체의 윤리를 따르는 속제俗諦로부터 독립된 진제眞諦, 즉 불법의 자율적 세계를 확립하여 국가를 넘어선 종교의 자유를 지향했다. 그러나 일본의 선종이 그렇듯 유심론이든 주관주의든 현실적 윤리와의 냉철한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폭력과 차별의 야만적 현실을 방관하게 되고, 자신과 이웃마저 그 지옥 속에 밀어 넣는 역사가 반복된다. 독일과 일본의 근대가 여실히 보여준다.
기요자와는 열반 전 마지막 글인 「나의 신념」에서 자신의 신념은 여래를 믿는 것이며, 그 특질을 세 가지로 든다. 첫째는 고를 해소시켜주는 능력이며, 둘째는 이 믿음이 자신의 지혜의 궁극이고, 셋째는 여래는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능력의 근본 본체라는 것이다. 카시와하라 유센은 『일본불교사 근대』에서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을 설한 종조 신란(親鸞, 1173-1263)의 『탄이초歎異抄』를 통해 타력주의를, 스토아학파의 『에픽테타스의 어록』으로부터는 주관주의를, 『아함경』으로부터는 불완전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실천주의를 체득했다고 본다.
스에키 후미히코는 『메이지 사상가론』에서 그가 근대적 개아의 주체적 과제를 치열하게 해결해간 인물로 보고 있다. 여러 연구자들은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 니시다 기타로의 장場의 철학의 선구였다고 보고 있다. 탈근대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어느 지역보다도 문명의 충돌이 격렬했던 근대의 지평 위에 여전히 놓여 있는 우리에게도 기요자와는 다소 이질적이면서도 새로운 각도로 불교의 활로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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