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과 선문헌]
선사상 전개에 중요 역할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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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1 년 3 월 [통권 제95호] / / 작성일21-03-05 09:02 / 조회10,318회 / 댓글0건본문
중국선 이야기 3 | 발타跋陀·승조僧稠의 정학定學
동한東漢의 초전初傳불교는 아비다르마 계통의 ‘선수학禪數學’과 대승의 ‘반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는 이후 중국불교의 발전에 중대한 방향성을 설정하게 되었다. 중국의 초기불교는 선수학 계통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동진십육국東晋十六國시기에 구마라집鳩摩羅什과 승조僧肇, 도생道生 등을 거치며 본격적인 불성론과 중국반야학이 전개되었으며, 남북조南北朝시기에 이르러서는 중국불교의 교의敎義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남조와 북조의 불교는 분명한 차별이 보인다. 우선, 남조와 북조는 모두 통치이념을 불교로 채택하고 있지만, 권력과의 관계에는 본질적인 차별이 존재한다. 남조는 동진시기에 여산廬山 혜원慧遠으로부터 유명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에서와 같이 출가 사문은 유가의 강상명교綱常名敎와는 달라서 속세의 국왕과 황제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되지만, 철저하게 “왕王의 치도治道를 돕는”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여 완벽한 정교政敎분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는 황제들이 모두 불교에 귀의하는 남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북조는 『위서魏書』 「석로지釋老志」에 “태조는 밝고 뛰어나 불도佛道를 좋아하시니, 곧 지금의 여래如來와 같다.
따라서 사문은 마땅히 예의를 다하여야 한다.”(주1)라고 하여 황제를 부처님의 화신으로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북위北魏가 439년 북방을 통일하고 ‘승관제도僧官制度’를 확립시키면서 불교를 황권 아래 제도적으로 복속시키고 있다. 이러한 북조의 전통은 이후 수조隋朝에도 계승되며, 특히 수대에서는 승관의 전공에 따라 ‘열반중涅槃衆・지론중地論衆・대론중大論衆・강율중講律衆・선문중禪門衆’의 ‘오중五衆’으로 분류하고, 이후 다시 ‘이십오중二十五衆’으로 분류하는데, 이것이 후에 이십여 종파宗派로 나뉘는 출발점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른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폐불廢佛이 모두 북방에서 발생하는데, 이는 불교가 황권에 복속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후의 황권이 대부분 북방 계열인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불교학에서 남조와 북조의 차별은 흔히 “남의북선南義北禪”이라고 하여 남방은 의리義理를, 북방은 선정禪定을 중시하는 풍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남북방의 지역적 기질의 차별도 있지만, 서진西晋시기에 북방을 점령당하면서 현학을 바탕으로 하는 승려들과 지식인들이 대거 남하하면서 불교학을 일으킨 까닭도 있다. 실제로 ‘격의불교’는 본래 북방에서 발생하였지만, 강남에서 더욱 유행하였다. 또한 남방에서는 폭넓게 모든 경론을 운용하여 ‘의리’를 찾지만, 북방에서는 주로 하나의 경전을 채택하여 깊게 연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 역시 북방의 정교관계와도 관련이 있다. 후에 보리달마가 『능가경』을 중심으로 선사상을 펼쳤다는 것도 이러한 북방불교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남북의 사상적 경향에 따라 이른바 ‘습선習禪’은 주로 북방에서 더욱 많이 배출되었다. 『고승전』과 『속고승전』의 여러 승려들과 ‘습선편’에 보이는 많은 습선자들 가운데 남방에서 활동한 이도 있지만 대부분 북방에 속해 있으며, 이들의 전기로부터 대부분 선수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으며, 이를 ‘정학定學’이라고 한다. 그들을 모두 논할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이들이 바로 불타(佛陀: 발타跋陀라고도 함)와 승조僧稠, 승실僧實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유행한 ‘정학’의 대표로서 불타와 승조, 승실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도선道宣의 『속고승전』에 실린 불타의 전기에 따르면, 불타 선사는 중국에 들어와서 북위의 도읍 항안(恒安: 현 山西省 大同)에 이르자 효문제孝文帝는 그를 존경하여, “따로 선림禪林을 짓고, 돌을 뚫어 감실龕室을 만들었으며, 무리를 모아 정념定念하도록 하였다.”(주2)고 하였으며, 이후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길 때 불타 선사도 함께 이주하였다. 도읍을 옮긴 2년 후(太和 20年, 496)에 황제의 명령으로 소실산少室山에 오직 불타 선사만을 위한 선사를 수조修造하였는데, 이 사찰은 소실산의 산림에 있기 때문에 ‘소림사少林寺’라고 불리었다.(주3) 불타 선사는 절이 완공된 이후, “각지의 사문들이, 명성을 듣고 모여든 자가 항상 수백이었다.”(주4)고 한다. 이로부터 보자면, 소림사는 불타 선사를 위해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불타 선사의 선사상과 관련된 설명은 상세하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또한 제자인 도방道房에게 사문 승조僧稠를 제도하여 정업定業을 가르치게 하였다.”(주5)라는 구절로부터 선정을 중시하는 법을 펼쳤음을 알 수 있는데, 승조의 전기에는 도방으로부터 배운 것이 “지관止觀”이라고 한다.(주6) 이 불타를 계승하여 소림사의 2대가 된 이가 바로 승조이다.
『속고승전』의 전기에 따르면, 승조는 출가 전에 세속의 경전을 부지런히 배웠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태학박사太學博士로 등용되었지만, 28세에 승식僧寔법사에게 출가하였고, 이후 불타의 제자인 도방에게서 ‘지관’을 받아 정주定州 가어산嘉魚山에서 열심히 수행하였지만 전혀 얻는 바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떤 승려를 만나 “반드시 계연繫緣하면, 구하여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주7)는 충고를 듣고 선정禪定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후에 항상 『열반경涅槃經』의 「성행품聖行品」에서 설하는 사념처四念處를 의지하여 수행하였다고 한다.(주8) 이후 조주趙州 장홍산漳洪山 도명道明 선사에게서 ‘십육특승법十六特勝法’(주9)을 받아 오래도록 깊이 연구였으며, 음식을 절제하며 수행에 몰두하였다.
<속고승전> (사진 e국보: https://emuseum.nich.go.jp)
이후 승조는 스스로 깨달아 얻은 바가 있어, 소림사로 가 불타를 참알하여 자기가 증득한 바를 말하였더니, 불타 선사는 “내가 총령蔥嶺을 넘어서 동쪽으로 와서 보니, 선학禪學이 가장 수승하였는데, 그대가 바로 그 사람이도다.”(주10)고 인정하며 바로 심요深要를 전수하였다고 한다. 승조는 북위 효명제孝明帝와 효무제孝武帝, 그리고 북제北齊의 문선제文宣帝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그에 따라 도선은 그의 전기에서 “부처의 가르침이 동으로 흘러와, 여기에서 성하였구나!”(주11)라고 평가한다.
또한 승조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승실은 『속고승전』의 전기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출가의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26살에 당시 유명한 도원道原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북위 효문제 태화(太和; 477-499) 말에 스승을 따라 낙양으로 가서 늑나마제勒那摩提 삼장을 만나 선법을 받았다. 승실은 “비록 삼학三學을 통람하였어도, 구차九次에 치우쳐 마음을 새겼다.”(주12)라고 하여 구차제정九次第定을 중심으로 선학을 운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승실도 효문제로부터 극한 존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북주北周에 이르러서는 삼장三藏으로 추대되었다.
이러한 승조와 승실은 북조에서 선학을 일으킨 핵심적인 인물로서, 도선은 이 두 사람에 대하여 “북제北齊의 하북河北에서 승조가 홀로 명망이 높았고, 북주北周의 관중關中에서 승실이 교화하여 명성이 높이 올랐으며”(주13), “그러므로 중원中原의 정원(定苑: 定學)에 강령綱領을 세우고 전개하게 한 것이 이 두 현자이고, 그 족적을 이어 등불을 전하며 교화의 흐름이 쉬지 않게 된 것이다.”(주14)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도선의 평가는 북조의 선학이 바로 승조와 승실을 중심으로 하는 ‘정학’이 주도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이후 보리달마菩提達摩가 북상하여 활동하였지만, 그다지 황권이나 대중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였다. 그러나 도선은 습선편의 총론에서 승조와 달마의 사상을 비교하는 다음과 같은 논술이 있다.
“그 두 종宗을 살펴보면, 바로 대승의 두 궤도이다. 승조는 사념처四念處를 품었으며, 그의 깨끗한 규범은 숭상할 만하다. 달마의 허종虛宗은 현지玄旨가 그윽하고 깊다. 숭상할 만하다는 것은 곧 실정과 상황이 쉽게 드러나는 것이고, 그윽하고 깊다는 것은 곧 이성理性이 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주15)
이로부터 보자면, 도선은 달마의 선을 ‘허종’으로 규정하고 승조의 정학과 비교하는데, 정학이 비교적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불법이지만, 허종은 일반적인 ‘이성’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깊은 법이라고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선은 비록 “승조와 승실이 중화의 보름달로 드러나 그 뒤를 이어 전하여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주16)고 평가하지만, 전체적인 문맥을 살펴보면 오히려 달마의 허종을 더욱 중시하는 의중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진실과 허망한 것에 서로 현혹되면 갑자기 환히 깨닫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만약 마음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허망한 경계가 맺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앞의 경계에 집착한다면, 마음작용의 행이 아니니, 이런 무리들이 어찌 도를 논할 수 있는가?”(주17)라는 당시 선학을 비판하는 가운데 달마의 선사상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후대에 불타-승조계의 소림사는 오히려 달마 선사가 주석한 사찰로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여러 자료를 고찰하면 달마는 소림사에 다녀간 흔적이 없으며, 후대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호적胡適은 『보리달마고菩提達摩考』에서 “보리달마의 소림사 면벽面壁 고사는 바로 후대 사람들이 소림사 불타의 고사를 달마의 고사로 혼동한 것이다.”고 지적하는 바와 같다. 달마가 소림사에서 주석했다는 것은 아마도 ‘법의지쟁法義之爭’을 통하여 달마-혜가계가 불타-승조계를 사상적으로 대체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조의 선학은 바로 안세고安世高로부터 비롯된 선수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대승의 선관禪觀을 더한 ‘정학’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학은 중국선사상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를 담당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주)--
1) 『魏書』, 「釋老志」, “太祖明睿好道, 即是當今如來, 沙門宜應盡禮.”
2) [唐]道宣, 『續高僧傳』卷16(大正藏50, 551a), “別設禪林, 鑿石爲龕, 結徒定念.”
3) 앞의 책(大正藏50, 551b), “有勅就少室山為之造寺. 今之少林是也.”
4) 앞의 책, “四海息心之儔, 聞風響會者, 衆恒數百.”
5) 앞의 책(大正藏50, 551b), “又令弟子道房度沙門僧稠, 教其定業.”
6) 앞의 책(大正藏50, 553c), “初從道房禪師受行止觀.”
7) 앞의 책, “要必繫緣, 無求不遂.”
8) 앞의 책, “當依涅槃聖行四念處法.”
9) “十六特勝法”은 “十六特勝行”으로도 칭하고, 『成實論』卷14(大正藏32, 355c)에서 “一念息短, 二念息長, 三念息遍身, 四除身行, 五覺喜, 六覺樂, 七覺心行, 八除心行, 九覺心, 十令心喜, 十一令心攝, 十二令心解脫, 十三無常行, 十四斷行, 十五離行, 十六滅行” 等으로 분류해 그 작용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天台智顗는 『釋禪波羅蜜次第法門』卷7(大正藏46, 525b)에서 “所言十六特勝者, 一知息入, 二知息出, 三知息長短, 四知息遍身, 五除諸身行, 六受喜, 七受樂, 八受諸心行, 九心作喜, 十心作攝, 十一心作解脫, 十二觀無常, 十三觀出散, 十四觀欲, 十五觀滅, 十六觀棄捨.”라고 설명하고 있다.
10) [唐]道宣, 『續高僧傳』卷16(大正藏50, 553b), “自蔥嶺已東, 禪學之最, 汝其人矣.”
11) 앞의 책(大正藏50, 554b), “佛化東流, 此焉盛矣!”
12) 앞의 책(大正藏50, 557c), “雖三學通覽, 偏以九次雕心.”
13) 앞의 책, 卷20(大正藏50, 596c), “高齊河北, 獨盛僧稠; 周化關中, 尊登僧實.”
14) 앞의 책, “故使中原定苑剖開綱領, 惟此二賢, 接踵傳燈流化靡歇.”
15) 앞의 책, “觀彼二宗, 卽乘之二軌也. 稠懷念處, 淸範可崇; 摩法虛宗, 玄旨幽賾. 可崇則情事易顯, 幽賾則理性難通.”
16) 앞의 책(大正藏50, 597b), “稠實標於華望, 貽厥後寄其源可尋.”
17) 앞의 책(大正藏50, 596c), “真妄相迷卒難通曉. 若知惟心妄境不結. 返執前境非心所行, 如此胥徒安可論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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