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식민사관 정립은 過, 새 방법론 도입은 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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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1 년 4 월 [통권 제96호] / / 작성일21-04-05 11:32 / 조회5,606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4 | 다카하시 도루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1878-1967)는 조선총독부의 관료로 일하다 경성제대 교수를 지낸 식민지기의 대표적 관학자이다. 그는 평생 조선학(한국학)에 매진했고 한국의 유교와 불교 사상사의 대계를 구축하려 했다. 저술은 『이조불교』가 대표작이지만 주리主理, 주기主氣로 상징되는 그의 유교사관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학문은 비록 식민사관으로 낙인 찍혔지만, 근대학문의 연구방법론을 통해 문·사·철을 아우르는 한국학의 초석을 놓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다카하시 도루는 1878년 일본 니가타의 한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도쿄제대 한학과에서 고전학과 문헌비판 중심의 실증사학을 배웠다. 졸업 후 대한제국 정부의 초청으로 1903년 관립중학교 교사가 되어 한국에 왔다. 통감부 촉탁을 거쳐 1911년 조선총독부의 종교 및 도서조사 촉탁이 되었다. 그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에게 한국의 민속조사를 위한 문헌 수집이 필요하다고 건의했고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도서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1912년에는 실록 등이 있는 사고 조사를 위해 오대산에 갔다가 수행에 전념하는 승려들을 보고 한국불교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1916년에는 영남지역 고문헌을 조사하다가 의병장의 책상 위에 이황의 『퇴계집』이 있는 것을 보고 한국유학 연구에 뜻을 품었다. 1919년에는 「조선의 교화敎化와 교정敎政」이라는 논문으로 도쿄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명 문화통치시기였던 1920년대에는 총독부가 주관하는 관제 역사서 편찬사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1922년에 조선사편찬사업위원회가 만들어졌고 1938년까지 『조선사료총간』과 『조선사』 35권 등이 나왔다. 다카하시는 이외에도 조선사학회에 참여하였고 「조선유학대관」을 집필하였다. 1921년 총독부 시학관이 된 그는 유럽과 미국의 대학을 1년 정도 시찰하고 1923년 경성제대 창립위원회 간사가 되었다. 1926년 대학에서 소장할 한적 구입을 위해 중국에 다녀온 후 경성제대 법문학부 교수가 되어 조선어학문학 강좌를 맡았다. 그는 조선 문학사와 사상사 강의를 주로 하였는데. 그의 최고의 학문적 성과인 『이조불교』(1929)가 이 시기에 나왔다.
1939년에 정년퇴임 후 다음 해 6월에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교명을 바꾼 혜화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1941년 4월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갔다가 1944년 다시 돌아와 경학원(옛 성균관) 제학 및 명륜연성소장, 조선유도연합회 부회장을 맡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1950년 덴리天理 대학 조선학과의 교수가 되었고 조선학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그는 명종대의 선교양종 재건 때 활동한 허응 보우의 문집 『허응당집』을 나고야 호사문고에서 발견하여 1959년 그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다카하시는 1964년 퇴임 후 덴리대의 1호 명예교수가 되었고 1967년 세상을 떠났다.
한국불교에 관한 다카하시의 연구는 1912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월정사와 상원사에서 정진하는 승려들의 모습을 보고, “조선불교는 척불로 인해 사회적으로 종교의 기능을 박탈당하고 산속에 유폐되어 형기가 완전히 죽은 것 같지만, 이런 깊은 산의 거찰에 오면 아직도 그 정신을 이으며 탈속의 분위기가 충만하다.”고 감탄하며 한국불교사 연구에 발을 들였다. 그가 쓴 한국불교 관련 첫 글(1912)에서는 “조선 왕실이 불교를 믿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잘못이며 조선의 불교는 종교의 입장에서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다.”고 하면서 연구 의지를 불태웠다. 이때부터 그는 해인사 고려대장경, 종파의 변천, 사찰의 현황과 특징, 종교사와 신앙, 승직과 승병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논문을 썼다.
1910년대 초반부터 총독부 촉탁으로 자료 조사와 수집에 힘쓰던 다카하시는 그간의 어려움에 대해, “어느 고승의 사적을 찾아보기 위해 삼복더위, 줄기차게 내리는 비와 눈을 무릅쓰고 말 등 위에서 10리 길을 왕복하기 일쑤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고와 끊임없는 연구,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같은 선구적 업적에 힘입어 『이조불교』라는 역작이 탄생한 것이다. 이 책은 많은 자료를 활용하여 조선 초부터 왕대별 승정과 사건, 고승과 사상, 법맥과 문파, 사회경제, 문화 의례 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비록 조선시대 불교만을 대상으로 삼았지만, 여기서 시도한 계통별 분류와 방대한 자료 구사, 엄밀한 해석은 근대학문의 문헌 실증주의와 역사학의 방법론이 적용된 것이었다. 또한 이 책에 나오는 주제들과 문제의식, 입론은 이후 연구의 길라잡이가 되었다.
하지만 다카하시의 문제는 식민사관의 전형인 타율성과 정체성의 시각에서 한국불교를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그는 조선시대를 억압과 쇠퇴로 인해 발전이 정체된 시기로 규정하고 여성과 서민 신앙을 제외하고는 독자적 특성을 찾을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다시 말해 구체적 종교사로서 독특한 성격은 있지만, 크게 보면 조선조 500년 동안 불교가 국가로부터 교화의 권리를 완전히 빼앗기고 국가의 정책 방침에 좌우되어 종교의 본래 기능을 잃었다는 것이다. 또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한 분파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불교나 유학이나 한국의 사상 또한 중국과 다른 독창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평하였다.
그는 『이조불교』의 「서설」에서 조선시대를 교법의 성쇠를 기준으로 세 시기로 구분했다. 제1기는 불교가 국가로부터 억압받았지만 공인은 되고 있던 성종 대까지, 제2기는 승정체계가 폐지되었지만 아직은 교법이 쇠퇴하지 않고 명승도 배출된 인조 대까지, 제3기는 효종 대 이후로 교세가 완전히 몰락하고 승려의 지위가 급락하여 사찰이 겨우 명맥만 잇고 불법이 거의 사라진 시기로 정의하였다. 그는 “제1기부터 순차적으로 교법이 점차 쇠퇴한 흔적을 기술하려 한다.”고 하여 이 책의 구성과 서술 방향에 앞의 시기 구분론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이러한 부정적이고 편향된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조불교』에는 조선시대 불교에 관한 거의 모든 내용이 담겨있다. 조선 전기의 억불정책과 방임, 조선 후기의 승역 활용 등 불교정책의 변천, 배불론과 호불론의 성격, 사십구재와 수륙재 등 불교신앙과 왕실불교가 다루어졌다.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도 승려 소유지의 문파 내 상속, 사찰계의 성행, 승역과 잡역, 사원경제의 실상과 승려의 위상 문제 등이 거론되었다. 인물로는 조선 전기의 함허 기화, 허응 보우에 이어 조선을 대표하는 고승인 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와 이후 조선 후기의 계·문파별 법맥 계보와 활동을 상세히 정리하였다. 또 이이, 허균, 정약용, 김정희 등 이름난 유학자들의 불교관과 활발한 유불 교류의 양상도 주목되었다.
사상 및 수행의 측면에서는 휴정이 간화선을 궁극적 수행방안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선교겸수를 내세웠음을 들어 조선시대에 미친 보조 지눌의 영향을 언급하였다. 이어 승려 교육과정과 선·교·염불의 삼문 수행체계 등을 통해 다양한 전통이 이어져갔음을 밝혔다. 또 이를 기반으로 화엄을 비롯한 교학이 연구되고 불교 측의 심성 논쟁이 벌어진 사실도 소개하였다. 그런데 19세기 백파 긍선과 초의 의순에서 촉발된 선 논쟁도 비중 있게 다루어졌지만, 그에 대한 평가만큼은 부정적이었다. 그는 “선에 대한 논의는 사상의 일관성이 없고 혼돈스럽고 불철저하여 조선 유파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이는 조선 학인의 공통 특성인 형식논리에 얽매인 편벽성에서 기인한다.”라고 폄하하였다.
이처럼 『이조불교』의 학문적 성취는 인정되어야 하지만, 그 안에 깔려있는 타자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부정 일변도의 도식으로부터는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다카하시는 조선시대는 유교가 단독으로 사회를 지배하며 국가 차원에서 금기시한 결과 불교는 사회성을 잃고 풍속과 미신 형태의 기복신앙으로 존속하였다고 보았고, 이는 동양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역사라고 평하였다. 식민주의자인 그의 관점에서 기이하고 왜곡된 타자의 모습으로 조선의 역사상을 그려내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 조선시대, 특히 후기는 쇠퇴와 부정의 올가미를 씌우기에 적합한 시기였고, 유교는 타파해야 할 타자의 전형, 그로부터 억압받은 불교는 어찌 보면 동정하고 구제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다카하시는 유교와 불교의 관계를 계속 주시했는데, 유불 교체와 그 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교가 쇠약해진 것은 유학의 발흥 때문이다. 고려 유학은 윤리와 훈고의 학문으로 철학적 성격이 약하였고 불교가 철학 및 우주 문제까지 다루었다. 하지만 주자학이 들어오면서 유학이 고원하고 심오함에서 처음으로 불교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주자의 학문적 근원은 불교에 있었는데 그는 선학을 좋아했고 『대승기신론』의 철리를 얻어서 송대 유학의 여러 학설을 집성해 불교의 취지와 유교의 문자로 설명하였다. 조선의 유학자는 이러한 주자학 발달의 역사를 모르고 불교사상을 채굴한 주자를 본래의 유학으로 여겨서 존숭해왔다.”
또한 그는 조선에서는 정치가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경제, 도덕, 종교 등은 그 아래 종속되어, 정치가 한 번 부패하고 무너지면 사회 전체의 진보 발달이 동력을 잃고 나쁜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 정치 우위의 전통과 정치적 종속성을 조선의 중요한 특징으로 규정하고 모든 문제를 유교정치의 전횡에 책임을 돌린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의 상층과 중류 가정에서 표면적으로는 유교의례를 시행했지만 공덕을 기원하는 불사와 복을 비는 무속이 풍속으로 행해졌다고 하여, 이것이 바로 조선 신앙문화의 이중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지식계급의 남자는 유교, 여자와 촌민들은 불교 및 무격을 믿으며, 한 가정 내에서도 이중의 습속이 형성되어 불교와 무속의 범위가 유교 신앙문화의 몇 배에 달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다카하시는 의타성과 고착성, 정치적 종속성에 이어 유교와 불교(무속)의 이중성을 한국 종교문화의 특성으로 제시하였다.
다카하시 도루가 추구한 조선학은 비록 식민사관의 투영이라는 한계를 갖지만 그가 이룩한 학문적 업적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조선시대 불교의 역사에 대한 학문적 틀을 세우고 한국사에서 유교와 불교 전통이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에 대해 선구적 입론을 펼친 점은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와 연구는 식민지기 조선학의 태생적 모순과 함께 이후 한국학의 토대를 닦았다는 점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원점에서 다시 출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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