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불교는 지금]
불교의 법적 지위 획득에 노력한 함부르크불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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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 2025 년 3 월 [통권 제143호] / / 작성일25-03-09 15:01 / 조회128회 / 댓글0건본문
세계불교는 지금 26_ 독일 ❷
글_ 툽텐 잠빠 번역_ 운산
함부르크불교협회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모든 불교전통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공통되는 부분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입니다. 또한 함부르크불교협회는 독일불교연합(DBU)과 함부르크불교공동체의 창립 회원입니다. 이 단체와 더불어 저희 협회는 불교가 독일의 공인 종교로서 법적 지위를 획득하고 각급 학교의 종교 교육에서 여타 종교와 동등한 권리를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불교 공통체 센터를 향한 발원
협회 건물 2층에는 봉사자들이 머무는 방이 있는데, 현재는 티베트 전통의 비구니 스님 두 분과 테라바다 전통의 사미니 스님 한 분께서 계십니다. 다락에는 법문이나 세미나를 하러 오시는 스승을 위하여 객실이 두 곳 마련되어 있습니다. 공동 생활공간이 있기에 작지만 수행 공동체로서 토대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함부르크대학의 아시아-아프리카연구소 및 누마타 불교학 연구센터와 교류하고 있으며, 그곳의 학생들도 종종 머물며 공부합니다.

협회 소유의 인접 부지에 있는 낡은 건물은 더 이상 보존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이곳은 그간 태국불교협회에서 사용해 왔습니다. 이렇게 부지가 마련되어 있으므로 함부르크불교협회가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불교 공동체 센터’ 계획이 준비되었습니다. 1층은 현재보다 더 넓은 참선 공간을 갖추고, 지하에는 도서관을 확장하여 세미나실을 마련하며, 2층은 출가자와 재가 법사, 불교를 공부하는 학생 그리고 불교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머물 수 있도록 원룸 형태의 방 여덟 곳을 설치하려 합니다.
이 발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날을 돌아보면, 어려운 가운데도 새로운 길이 늘 열렸습니다. 코로나19 대유행기간 동안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온라인 모임만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2022년 초부터 불자들이 다시 도량으로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즈음 저는 미국 스라바스티 도량에서 10년간 수행하고 돌아와 함부르크불교협회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아 여러 가르침을 찾다
저는 동베를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섯 살 때 부모님께서 이혼하셨고, 이후 사회주의 국영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매우 힘들었습니다. 늘 깊이 사색하며 제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곤 했습니다. 1989년, 제가 열한 살이 되던 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어머니와 재회하여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동안 젊은 나이에 아이를 둘이나 더 낳으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중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이 어린 제가 어머니의 보호자 역할을 했습니다. 이 경험으로 저는 자아를 찾는 길에 들어섰습니다.

열다섯 살이 되어, 삶의 고난에 혼란스러워 하며 친한 친구와 더불어 베를린의 종교 공동체를 여럿 찾아다녔습니다. 당시 저는 무척 외롭고 답답했으며, 마음을 의지할 곳과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종교라는 것을 전혀 접해 보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은 신앙도 없었지만, 열성적 사회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기독교는 이름만 아는 정도였습니다.
종교를 찾는 여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슬람 수피의 춤도 배워 보았고, 기독교 공동체도 찾아보았으나 제 마음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다만 거기서 만난 청년 기독교인들과 교류한 것은 특별했습니다. 이전 사회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만남이었기 때문입니다.
스무 살에 선종禪宗을 만났습니다. 길고 조용하게 참선하며 처음으로 마음자리가 안정되고 의식도 맑아졌습니다. 그즈음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사회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진정으로 찾던 것과는 거리가 있어서 안타까웠습니다. 사회학이나 정치학에는 지혜와 자비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달라이 라마 존자께서 자비의 정치를 말씀하신 ‘사랑의 논리’를 접하며 깊이 감동했습니다. 이 정신을 제 학문에 꼭 담고 싶었습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평화 사상에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그래서 연구 모임과 함께 인도의 델리로 가서 간디평화재단을 찾았고, 빈민가를 방문하여 주민과 대화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정글 깊은 곳에서 살아야 하는 ‘불가촉천민’도 있었습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거기서 일상 속에 살아 있는 종교의 모습을 보며 감명받았고, 사람들이 서로를 공경하는 모습에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다시 일본을 찾아 친구들과 지냈습니다. 일본인들의 마음가짐 그리고 제가 어째서 그들과 잘 통하는지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출가를 생각했고, 선종 사찰에 인연이 닿아 몇 달 머물며 수행했습니다. 매일 참선하는 것이 제게 좋은 약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알 수 있었으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지 더욱더 배우고 싶었습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자비심과 자애심을 기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법에 온전히 귀의하고 싶다는 마음을 안고 베를린으로 돌아왔습니다. 직장을 잡거나 결혼을 하거나 자녀를 갖는 등 수행에 방해가 될 만한 세속의 길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2007년부터 2011년까지 함부르크 티베트센터에서 공부하며 일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곳의 비구니 스님들은 도량에서 함께 살지 않았고 법회나 법문 때만 가끔 모이셨습니다. 그 무렵 어느 비구니 스님께서 저를 보살펴 주시며 인도, 호주, 이탈리아, 미국 등에서 출가 생활과 비구니 계율을 배울 만한 곳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저는 미국 스라바스티 도량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의 주지 툽텐 초드론 스님은 상주하는 스승이자 경험 많은 비구니로서 저와 같은 젊은 초심자들을 잘 이끌어 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스라바스티 도량에서 출가
2010년, 저는 워싱턴 주 뉴포트에서 3주간 시험 삼아 머물며 수행했습니다. ‘출가자의 삶 탐구’라고 이름 붙여진 프로그램을 따라 생활하며 첫날부터 감명받았습니다. 믿을 수 없게도, 비구니 스님들은 보시 받은 음식으로만 생활할 뿐 개인 돈을 전혀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에서 뵈었던 비구니 스님들이 용돈을 조금씩 받아 직접 물품을 구입하셨던 것과 매우 달랐습니다.
1년 후, 스라바스티 도량으로 다시 향했습니다. 그전에 고향 친구가 도와주어 학자금 대출을 정리했는데, 이런 지원조차 제게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후 거의 2년을 수행하고 스라바스티 도량에서 출가했습니다. 이날은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환희로웠습니다. 먼저 삭발하고, 속세의 옷을 내려놓은 다음 붉은 가사를 받았습니다. 수계식은 두 시간 동안 이어졌고, 저는 가정생활을 하지 않고 성생활도 하지 않으며,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자로 살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계를 받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았습니다. 새로운 길에 대한 희망과 확신으로 가득 찼습니다. 물론 이 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해탈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향한 원력을 따랐습니다. 다른 이를 돕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세상, 지혜와 자비가 이어지는 세상에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먼저 식차마나니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만만치 않았습니다. 도량의 여러 일상 업무를 8년간 도왔던 터라 소임을 더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주지스님께서는 “이 시기를 그냥 즐겨요. 때가 되면 소임은 얼마든지 따라올 테니까요. 그리고 옆에서 보기만 해도 많이 배우게 됩니다.”라고만 하셨습니다.
도량에서 제 일과는 새벽 4시 45분에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그날을 준비하고, 가사를 수하며 마음가짐(계율을 지니고, 생명을 해치지 않으며, 깨달음을 얻는 것)을 새롭게 했습니다. 때로는 법당 소임자로서 다른 스님들이 오시기 전에 불단을 정돈하고 티베트 전통의 공양을 올렸습니다. 오전 5시 30분이면 함께 아침 좌선을 했습니다.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차 한 잔 마시자.”고 생각했습니다. 제 자신에게만 머무는 것이지요. 반면 대중을 위해 일하면서 저는 더욱 충만해지고 행복해졌습니다. 차 한 잔을 좋아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대중과 함께할 때 장애를 수월하게 극복했습니다.

아침 공양은 오전 7시 30분부터 8시까지였고, 이어서 하루 일과를 계획하는 회의를 짧게 진행했습니다. 저는 선배 스님과 함께 지객知客 소임자로 방문객을 맞았습니다. 도량을 찾은 분들은 도량 울력에 다양하게 동참하셨습니다. 도량 주변의 숲을 관리하고 화재가 났을 때 피해를 입지 않도록 대비했습니다. 건물을 수리하고 때로는 개축했으며, 법문을 필사하고 번역하는 등 갖가지 일을 수행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울력을 점심 공양 시간까지 조율했습니다.
짧은 휴식 후, 오후 4시 30분까지 울력을 이어갔습니다. 스라바스티 도량에서는 이를 ‘공양 봉사’라고 부르는데, 삼보를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시까지는 공부한 다음 저녁 공양을 했습니다. 때로는 약식 공양[藥石]을 아주 조금 먹었습니다. 스님들은 정오 이후 공양을 하지 않지만, 몸이 약하거나 울력을 심하게 한 날은 예외였습니다.
이어서 한 시간 동안 저녁 좌선을 하고, 밤 10시까지 각자 공부했습니다. 스라바스티 도량에서는 석달 동안 동안거 묵언 정진을 했습니다.
가끔씩 제 일과는 제 뜻대로 꾸리고 싶었습니다. 주말에는 일정을 비운다든지, 이틀간 정진한다든지, 오후에 책을 읽으며 그냥 쉬는 것 등이지요. 하지만 매일 수행하며 의심을 극복하게 되었고, 저를 보살펴 주는 대중이 얼마나 소중한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분노와 같은 번뇌에 사로잡힐 때마다 구참 스님들께서 마음을 돌리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무언가 어긋나면 바로 알아차리고 손길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계를 익히려면 스승의 모범과 경험이 중요합니다. 책만으로는 삶이 바뀌지 않으니까요.
함부르크불교협회에서 수행
저는 다시 독일로 돌아와 함부르크불교협회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스라바스티 도량에서 10년간의 대중 생활을 익히고 2022년 2월에 귀국했습니다. 처음부터 저는 스라바스티 도량에서의 10년 정도 수행 이후 유럽에 출가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한편 함부르크 티베트센터에서 법사를 양성하는 다르마 대학과정을 전일제로 이수하고 있습니다.
함부르크불교협회에서는 수행 프로그램을 정례화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법우님들께 도움을 받으며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안내문을 디자인하며 홍보 업무도 진행합니다. 한편 매주 티베트 전통에 따르는 좌선 모임을 지도하고 법회를 매달 열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지나 테라바다, 일본의 젠Zen, 한국의 선禪,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룹 등과 함께 티베트 전통도 함부르크불교협회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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