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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 저편 티베트 불교]
비운의 제6대 달라이 라마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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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현  /  2025 년 3 월 [통권 제143호]  /     /  작성일25-03-08 23:39  /   조회10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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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잠양갸초의 고향집은 인도 동북부 끝자락의 따왕사원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자그마한 사원인 우르겔링 곰빠(Urgyeling G.)로 변해 있었다.

 

제6대 달라이 라마, 잠양갸초의 고향

 

역대 14분의 달라이 라마 중에서 가장 이채로운 인물 한 분을 들자면 필자는 제6대 잠양갸초(Tsangyang Tashi Gyatso, 倉央嘉措, 1683∼1707)를 주저하지 않고 손꼽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생애는 영욕榮辱이 반전하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는 단어가 어울릴 만큼 비록 짧지만 강력한 여운을 남긴 생을 살다가 떠났다.

 

사진 1. 잠양갸초의 고향집. 따왕사원 아래 우르겔링 곰빠의 전경.

 

그는 히말라야 산골에서 태어나 어느 날 갑자기 설역고원 최고의 지고지순한 신분으로 수직상승하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휘말렸다. 그러나 그는 당시 정치와 종교의 위정자들이 만들어 놓은 굴레에서 꼭두각시 춤을 추기보다는 그냥 한 인간으로 살기를 고집했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기에 당시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수백 년이 흐른 뒤 우리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성스러운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의 위대한 시인으로 말이다.

 

필자가 멀고 먼 따왕으로 발길을 내디딘 것은 물론 ‘인도 최대의 티베트 사원’이라는 꼭지에 흥미를 느낀 것이 사실이지만 그 외에도 비운의 달라이 라마가 태어난 곳이 그 근처에 있다는 일종의 가산점도 작용하였다. 

 

사진 2. 우르겔링 곰빠 입구에 ‘잠양갸초의 고향집’이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다.

 

왜냐하면 필자가 티베트대학에서 수학할 때 자주 갔었던 ‘마케아메(Makye Ame, 玛吉阿米)’(주1)라는 티베트식 카페에서 제6대 달라이 라마가 작사한 노래를 비롯하여 뉴에이지풍의 초원정가草原情歌를 즐겨 들으며 객수客愁를 달랬던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의 따왕행은 나로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고 더구나 이번 글을 쓰기 위해서 구굴링을 해보니, 그의 전기傳記와 그의 음악 앨범 그리고 카페 ‘마케아메’라는 항목이 많이 검색되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한 분의 달라이 라마로서가 아닌 당당한 시인으로 이미 현대의 인드라망網에서 화려하게 환생還生하였던 것이다. 

 

짧지만 드라마틱한 생애

 

잠양갸초의 생애를 연출한 사람은 또 하나의 풍운아였던 상게갸초(Sangye Gyatso, 1653〜1705)였다. 위대한 제5대 달라이 라마 나왕갸초(Ngawang Gyatso)를 오랫동안 섭정攝政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그는 주군을 보필하여 티베트 역사상 불멸의 건축물인 뽀딸라(Potala) 궁전을 완성하였고 나아가 ‘법왕제法王制’라는 독특한 정치종교제도의 틀을 만들어 근대 티베트(Böe)란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사진 3. 제6대 달라이 라마 잠양갸초의 탕카.

 

이런 위업을 이룩한 그였지만 문제는 1682년 그의 주군인 5대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였는데도 ‘폐관수행중閉關修行中’이라는 연막으로 가려놓고 자신이 섭정 노릇을 계속했다.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뽑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려 15년 동안이나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소위 국정 농단을 했다. 그동안 그는 입적한 전대 라마의 ‘뚤꾸’, 즉 환생자還生者를 찾기 위해서 비밀리에 최측근 심복들을 밀파密派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머나먼 땅 ‘묀율’, 즉 현재의 따왕사원 근처에서 그 환생자를 찾아내고 극비리에 법왕으로서 교육시키도록 안배하였다.

 

그러나 5대 달라이 라마의 사망설이 국내외로 퍼져나가 의구심이 증폭되자 마침내 1697년 15년 동안 숨겨 왔던 ‘위대한 나왕갸초’의 입적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이미 준비해 두었던 달라이 라마의 육체를 탑장塔藏한 영탑靈塔(주2)을 공개하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간 숨겨서 훈련시켜 온 잠양갸초를 대중 앞에 공개하고 제6대 달라이 라마의 즉위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면서 15년간의 상황에 대해 연착륙을 시도하였다.(주3)

 

사진 4. 우르겔링 곰빠 안. 역대 달라이 라마 영정을 모셔 놓은 기념관 내부. 

 

그런데 이때 희대의 천재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상게갸초라도 당시 외교적 국제정세에 대해서는 촉이 무뎠던지 당시 떠오르는 신흥강국 청淸 나라를 도외시하고 몽골계 준가르 부족과 손을 잡은 것이 비극의 첫 단추였다. 이에 화가 난 청나라는 호슈트(Khoshut)족의 라장칸(Lhatsang Khan, 拉藏汗)과 동맹을 맺고 티베트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여 1705년 라장칸으로 하여금 라싸를 침공하여 상게갸초를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서 칼날을 상게갸초의 작품(?)인 잠양갸초에게 겨누어 그간의 법왕으로서의 행실과 비구로서의 파계 행위를 구실로 폐위시켰다. 그가 법좌法座에 오른 지 10년 되는 해였다. 그리고 폐위된 잠양갸초를 압송하여 베이징으로 유배를 보냈으나 일행이 청해호반에 이르렀을 때 잠양갸초는 열병에 걸려 사망하였다.(주4)

 

사진 5. 우르겔링 담벼락 아래에서 명상 삼매에 든 필자.

 

이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잠양갸초의 애잔한 일생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역대 달라이 라마들은 대부분 대략 5세 전후에 ‘뚤꾸’로 선정되어 당대 최고의 학승들에게 둘러싸여 특수교육을 받았다. 반면에 잠양갸초의 경우는 두메산골에서 14세라는 늦은 나이까지 갇혀 있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라싸로 보내져 법좌에 등극했기 때문에 뽀딸라 궁전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그는 몇 번이나 자살 위협을 하면서 교육담당 스승인 제5대 빤첸라마 롭상계셰(1663〜1737)로부터 받은 비구계比丘戒를 반납하고 평민이 되려고 하였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등의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사진 6. 라싸 조캉사원 인근의 ‘마케아메’ 카페 앞에서 필자.

 

그렇게 비록 비구계는 반납했지만 달라이 라마로서 역할은 계속하면서 때로는 변복을 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른바 무애행無碍行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일한 우군인 상게갸초가 살해되고 궁정 내부의 분위기가 변하자 그도 늦게나마 제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돌아가 티베트의 실권을 쥔 라장칸은 예셰갸초라는 소년을 또 다른 제6대 달라이 라마로 옹립하면서 잠양갸초를 폐위시키고 귀향 보내는 절차를 밟게 된다. 

 

현대의 인드라망網에서 다시 환생한 잠양갸초

 

비록 못다 핀 잠양갸초의 삶이었을지라도 10년간의 그의 재위 시절의 일화는 지금도 입에서 입으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면서 민초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그가 남긴 작품들도 현대에 이르러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시는 약 66수 정도가 전해지는데, 수행승으로서의 게송偈頌보다는 서정시抒情詩로 분류되는 것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그중 한두 수 정도만 소개해 보기로 하자. 몸은 비록 한 나라에서 존경받는 지존의 몸이었지만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남몰래 찾아갔던 카페 ‘마케아메’에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로 가장 널리 알려진 시구절이다. 

 




 

높고 높은 동쪽 산머리에 밝은 달처럼

휘영청 떠오르는 아름다운 모습.

매혹적인 마케아메의 웃는 얼굴

내 마음속에 아련히 떠오르는구나.

 

실제로 이 여인의 이름을 딴, ‘마케아메’라는 카페는 필자가 무시로 드나들면서 나그네의 객수를 달래고 했던 곳이라고 위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사랑스런 님을 따르려니

깨달음의 길 걷기 힘들고

깊은 산 속에서 수행하려니

님 그리는 한 조각 마음이 걸리는구나.

지성을 다해 떠올리는 붓다 얼굴은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데

생각지 않으려는 님의 얼굴은

더욱 또렷이 떠오르는구나.

 

또 한 수는 그가 준가르 군에게 끌려가던 중 청해호 근방에서 입적하기 직전에 지은 마지막 절명시絶命詩로 다음과 같다.

 

하얀 두루미야! 나에게 너의 날개를 빌려주려무나.

그다지 멀리 갈 생각이 없고,

그냥 리탕까지 한 바퀴 돌고 올 테니…

 

사진 8. 잠양갸초의 앨범 <That day>.

 

정말 그가 노래한 것처럼 그의 영혼은 티베트의 동부 캄(Kham) 지방의 리탕(Lithang)에서 다시 환생하여 제7대 달라이 라마 겔장갸초(Kelzang Gyatso)의 신분으로 뽀딸라 궁전의 자기 법좌로 돌아왔다고 한다. 

 

<각주>

(주1) 이 ‘마게아메’는 ‘숭고한 어머니’라는 의미지만 시에서는 여인의 이름으로 보인다. 현재 베이징을 비롯해서 중국과 인도의 대도시에 같은 상호를 달고 성업중인 체인점이다.

(주2) 달라이 라마, 빤첸 라마 같은 초고위 고승들이 입적하면 ‘미라’로 만들어 영탑靈塔 속에 넣어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전통이 있기에 라싸 뽀딸라 궁전에는 이런 역대 달라이 라마의 황금 영탑이 보존되어 있으나 단지 제6대 달라이 라마의 것만 없다.

(주3) 상게갸초는 원래 1688년 잠양갸초를 발견하고 따왕사원 근처 쪼나(Tsona) 지역에 격리 수용하고 교육을 받게 하다가 후에 제5대 달라이 라마의 입적을 공식 발표하면서 제6대 달라이 라마의 법좌에 오르게 안배하였다.

(주4) 일설에는 독살되었다고도 하며 또 다른 설에는 청해호 근처에서 탈출해 몸을 숨겨 살면서 여러 사원을 재건하면서 천수를 누렸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어느 것이나 믿거나 말거나 한 야사일 뿐이다. 라짱칸에 의해 세워졌던 다른 6대 달라이 라마, 예셰갸초는 티베트인들에 의해 축출되었기에 지금도 역대 달라이 라마 명단에서는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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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현
현재 8년째 ‘인생 4주기’ 중의 ‘유행기遊行期’를 보내려고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로 들어와 네팔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틈틈이 히말라야 권역의 불교유적을 순례하고 있다.
suri116@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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