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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억울하게 요승으로 몰린 학조대사와 보우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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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5 년 3 월 [통권 제143호]  /     /  작성일25-03-08 23:03  /   조회2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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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서 ‘요승妖僧’이라는 표현은 조선 전기 거의 모든 왕조에서 등장한다. 그러나 유학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요망한 승려’일 수 있겠지만 불교를 신앙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훌륭한 고승일 수도 있다. 연산군, 중종, 명종 대에 요승으로 표현된 승려들을 살펴보자. 연산군 대에는 요승이라는 표현이 1회 나온다.

 

홍문관 부제학 박처륜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금강산 유점사 등 절에 소금을 공급하자는 요청이 내시들 입에서 나왔기에 신들이 바야흐로 안 될 일이라고 논쟁하고 있사온데 갑자가 보내주라는 명령을 내리셨으며 … 내시의 말을 들으시되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시고, 요승에게 은혜를 베풀되 오히려 부족할까 염려하시니, 신들은 …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 『연산군일기』 2년(1496) 1월 7일.

 

사진 1. 연산군묘. 서울 도봉구 방학동 소재. 사진: 서재영.

 

위의 글에서 요승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지칭하지 않았으므로 단순히 승려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중종 대에는 구체적으로 인물을 지칭하고 있다. 

 

성균관의 생원 이경 등이 편의便宜 10조條를 올렸다. “… 다섯 번째, 이단을 배척하소서.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래로 서울의 폐찰廢刹을 다시 수리하지 않고, 승과僧科를 다시 거행하지 않으시나 … 기신재忌晨齋는 오히려 예전대로 하시니 … 자신도 모르게 원통하고 분한 마음이 듭니다. … 이제 요승 학조學祖는 선대 왕조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자임에도 자기 절에 앉아서 승려들을 제 마음대로 나눠 보내 여러 절에 거주하게 하며, 그의 거처와 음식은 참람되게 왕후에 비길 만하여 그의 무리가 그를 승왕僧王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습니다. … ” 

- 『중종실록』 5년(1510) 12월 19일. 

 

사진 2. 학조대사 진영. 해인사 성보박물관 소장. 사진: 광흥사.

 

요승으로 지목된 학조는 세조 대 묘각왕사 수미의 제자로 간경도감의 불서 간행 및 언해에도 참여했으며, 성종 대에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해인사 판전을 수리하고 고려대장경을 인출했던 고승이다. 그런 그에게 유생들은 요승이라고 하면서 가까이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불교계에서 고승으로 여기는 승려를 요승이라고 한 경우도 있지만, 그야말로 요승이라고 할 수 있는 승려에 대한 기록도 있다. 

 

부제학 최보한 등이 차자箚子를 올렸다. “요승이 궁성에 잠입하여 금어禁御가 가까운 곳에서 여러 날을 숨어 있다가 다행히 잡히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증거를 갖추어 자세히 심문해 보지도 못한 채, 형신을 질질 끌다가 매듭을 짓지 못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 『중종실록』 34년(1539) 5월 27일.

 

여기서 말하는 요승은 궁궐 내부에 침입했다가 붙잡힌 은수誾修라는 승려이다.(『중종실록』 5월 20일) 이 승려가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궁궐 안에 들어가게 된 이유가 지운智雲이라는 승려의 꾀임에 속아서라고 하였다. 그는 고문을 이기지 못해 죽었는데, 당시 대신들은 이 일을 기회로 불교에 대한 각종 개혁안을 요구하였다.

 

성균관 생원 유예선 등이 상소를 올렸다. “지난달 궁궐 안 동산에 어떤 승려가 몰래 숨어들었다가 체포되어 국문을 받던 중 매에 못 이겨 죽었는데, 그 사정이 매우 모호하여 사람들이 의혹에 젖어 있습니다. … 지난해 역사役事 때문에 승려들을 모집하면서 호패號牌를 지급한 것은, 이를 계기로 점차 다스려 없애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호패를 지급한 뒤로 흉도凶徒들이 더욱 성해져서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상소를 올려 먼저 봉선사와 봉은사를 철거하여 그 뿌리를 뽑아 버리자고 청하였지만 전하께서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장부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사찰을 순차적으로 철거하겠다는 내용의 유지有旨를 내렸는데, 경기와 전라도의 사찰만 철거한 뒤에는 더 시행하지 않고 폐기했으니, 이는 전하께서 불교를 배척함에 있어 글로만 보였을 뿐 성의가 없었던 탓입니다. … 삼가 전하께서는 돈독히 살피소서.”

- 『중종실록』 34년(1539) 6월 3일.

 

중종은 “승도를 모두 도적으로서 역役을 피해 도망한 자라고 여기고 지금 만약 핍박하여 산골짜기에 떼 지어 모이게 하고, 심지어 조정에서 군사를 동원해 토벌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그 폐단이 더 클 것이다.”라며 유생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위의 글에서 장부에 기재되지 않은 경기도와 전라도의 사찰을 철거했다는 내용과 관련하여 허응보우(1509~1565)는 1538년(중종 33) 9월 16일, “임금이 여러 명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지방의 사찰을 철거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나도 모르게 피눈물이 흘러 수건을 적시고 임금의 은택을 받지 못함을 슬퍼하며 눈물로 율시를 지어 여러 벗에게 보임”(주1)이라고 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여기서 장부에 기재되지 않은 사찰은 성종 대까지 국가에서 확인한 사찰 외에 새로 창건한 사찰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진 3. 허응보우 진영. 봉은사 소장. 사진: 불교신문.

 

한편 그에 앞서 중종 대에 보우는 신륵사에서 벌어진 유생과 승려 사이의 폭행 사건과 관련하여 시를 남기기도 했다. 먼저 이 사건과 관련한 『중종실록』의 기록을 보자. 

 

사헌부가 아뢰기를, “경상도 유생인 생원 장응추 등 30여 인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수로水路로 올라오다가 여주의 벽사甓寺(신륵사)에 투숙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지 축령竺靈이 30여 명의 승려들을 거느리고 도적이라고 하면서 막대기로 난타하여 한 사람이 상해를 입었다고 해당 관아에서 보고하였습니다. … 이 승려들을 각별히 추문하여 치죄하게 하소서.” 하였다. 

- 『중종실록』 33년(1538) 8월 30일.

 

이 사건과 관련하여 성균관 진사 박문수 등도 상소를 올려 “유교와 불교가 양립할 수 없고 사邪와 정正이 병행할 수 없다.”(『중종실록』 33년(1538) 9월 19일)면서 신륵사 승려들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결국 임금은 국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해 보우는 다음의 시를 남긴 바 있다.

 

벽사(신륵사)의 주지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문벽사주승계옥 聞甓寺主僧繫獄

 

보은해야 할 승려가 예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호협한을 잘못 맞이한 죄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하니

어찌 알리오. 한 명을 벌주어 천백을 경계해야 하지만

죄가 합당하지 않은데 일부러 형벌을 준 것이라면

 

문설보은승실례 聞說報恩僧失禮 

오영호협죄당형 誤迎豪俠罪當刑

안지벌일징천백 安知罰一懲千百 

죄부당형고치형 罪不當刑故致刑 

- 『허응당집』 권상.

 

주지하다시피 허응보우는 명종 대 문정왕후를 도와서 일시적이나마 불교를 중흥시켰던 고승이다. 그가 적극적으로 불교 중흥에 나섰던 이유는 국가의 폐사廢寺 정책이라든가 신륵사 구타 사건에 대한 처리 등을 보며 결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유학자들에게는 역시 요승으로 평가받았다. 『명종실록』에서 보우를 요승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날짜를 헤아려 보면 모두 28회에 이른다.

 

사진 4. 여주 신륵사 설경. 사진: 신륵사.

 

성균관 생원 안사준 등이 상소를 올려 요승 보우를 죽이고 정업원淨業院을 수리하지 말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인수궁仁壽宮의 일에 대해서는 조정이 다 나의 뜻을 알고 있는데, 어찌 너희들의 말이 필요하겠는가. 대비께서 선대의 조종祖宗을 봉공奉供하는 일에 있어서 옛 관례를 따라 하였지 무엇을 더 보탠 것이 있는가? 그리고 보우도 하늘이 낸 백성인데, 어찌 큰 죄를 줄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 『명종실록』 5년(1550) 1월 5일.

 

보우는 1548년(명종 3) 12월에 봉은사 주지로 임명되었다.(『허응당집』 「선종판사계명록」 참조) 그리고 1549년(명종 4)에 금강산 표훈사에서 간행한 『선문염송집』의 간기에 “봉은사 주지 보우”라고 되어 있다. 보우를 봉은사 주지에 임명한 문정왕후는 명종 5년(1550) 12월 15일에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복립을 명하였다.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에서 지속적으로 선교양종의 복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자, 1551년 1월에 양사의 신하들이 사직해 10일간 복귀하지 않았고 성균관 유생들도 20일간 퇴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문정왕후는 뜻을 굽히지 않고 이를 관철하였다. 이에 대해 『명종실록』을 편찬한 사신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사진 5. 봉은사 허응당보우대사봉은탑.

 

사신은 논한다. 오랫동안 폐지하였던 양종을 다시 세우고 또 승려를 선발하는 옛날 법전을 회복시켰기 때문에 승려의 무리가 날로 번성하고 부처를 섬기는 것이 더욱 정성스러웠다. 이는 모두 요승 보우가 미혹시킨 소치인 것이니, 재해가 겹치고 나라의 일이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이 괴이한 것도 없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 『명종실록』 7년(1552) 4월 12일.

 

선교양종의 복립은 승과의 재개를 의미하였다. 승과는 1552년(명종 7), 1555년(명종 10), 1558년(명종 13), 1561년(명종 16), 1564년(명종 19) 총 5회에 걸쳐 시행되었는데, 이때 승과에 합격한 승려 가운데 청허휴정, 사명유정 등 임진왜란 의승장들이 많이 있었다. 승과를 통해 선발된 승려는 관직을 받고 전국에 있던 왕실 원당願堂 395사寺의 주지에 임명되었다. 실록에서는 당시 보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대비가 불교를 혹신하여 독실히 숭상하였으므로 전국 사찰에 보시하지 않은 곳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구 휩쓸렸다. 대비가 불교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주장할 만한 승려가 없어서 널리 수소문하였지만 적격자를 얻지 못하였었다. 요승 보우가 은밀히 그런 대비의 뜻을 탐지하고 금강산에서 능침사로 와서 고승 행세를 하였으므로 내수사가 그의 이름을 알렸다. 궁중에서는 그를 살아 있는 부처라고 여겼는데, 보우는 그때부터 과장되고 속임수의 행동을 일삼았다. 승려들의 교만한 풍습이 세조 때보다 더하였다. 

- 『명종실록』 7년(1552) 5월 29일.

 

이 모든 불교 중흥 정책은 1565년 5월 15일 문정왕후의 사망으로 폐기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정 대신들은 그 책임을 물어 보우를 제주도에 유배하여 살해하였다. 이제 모든 책임은 보우의 것으로 전가되었다.

 

사신은 논한다. … (임금께서) 어려서 왕위에 올라 모후母后가 수렴청정을 하고 조정의 정사가 모두 고식적姑息的이어서 사림士林 사이에 큰 옥사가 연달아 일어난 데다가 요승을 높이고 사랑하여 불교를 숭상했으나 모두 임금의 뜻이 아니었다. 

- 『명종실록』 22년(1567) 6월 28일.

 

사진 6.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무덤 태릉. 사진: 국가유산청.

 

명종 대 보우를 제외하고 요승이라는 호칭을 받은 승려로 계은戒誾이 있었다. 계은은 관악사 승려로서 궁궐에 나아가 호랑이 가죽을 바쳤다.(『명종실록』 5년(1550) 10월 17일) 그러자 사간원에서 요승의 물건이라며 징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무릇 승려들이 도성 안을 출입하는 데는 본디 금법이 있는데 관악사 승려 계은이 갑자기 궁궐에 들어와 제멋대로 호피를 바쳤으니, 이는 전에 없던 큰 변괴로서 조야에서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의금부에 하명하여 끝까지 힐문詰問하여 그 죄를 통렬히 다스리소서. 또 임금은 기이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법입니다. 하물며 요승이 바친 물건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추고하게 하였으니 지금 감옥에 가두어 소란스럽게 할 것은 없다. 호피는 되돌려 주라.”고 하였다. 

- 『명종실록』 5년(1550) 10월 21일.

 

계은이 호랑이 가죽을 바친 일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때가 선교양종을 복립하기 직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문정왕후의 불교정책에 대한 불교계의 기대감이 한껏 반영된 영향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감은 문정왕후의 사망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각주>

(주1) 『허응당집』 권상, “戊戌之秋九月旣望 驚聞聖上以兼三五之德 燒毁諸方佛寺 不覺血淚沾巾 憾其獨不蒙至治之澤 泣成數律 以示諸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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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불교학과에서 석사학위, 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 교수와 조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국립순천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역서로 『운봉선사심성론』, 『월봉집』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등 다수가 있다.
su55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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