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 길라잡이 ]
시비분별,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상태
페이지 정보
일행스님 / 2025 년 3 월 [통권 제143호] / / 작성일25-03-08 22:55 / 조회56회 / 댓글0건본문
질문 1. 시비[옳고 그름]를 나눔에 대해
스님, 제가 어떤 일을 겪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인지를 가려야 되겠지요? 일을 당할 때마다 시是와 비非를 가리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이 일에 더욱 휘말려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시비是非에서 벗어나라.”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말은 시비를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현실적인 측면에서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답변
“시是[옳음]와 비非[그름]를 두지 마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시·비를 가리지 않고 살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경우에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명하게 가르는 것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분별과 가림으로써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불화不和와 반목이 일어나게 된다면 삶이 피곤해지지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시是와 비非를 분별하여 가리는 것보다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는 것이 훨씬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방법이 되지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사실(팩트)의 여부보다 공감과 배려가 더 크게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어느 것이 맞고 틀리는지 내용의 사실 여부에 더 큰 관심을 갖는 습관이 있습니다. 거기에 휘말린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기보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보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 주거나 다치지 않게 배려해 주는 마음을 먼저 갖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충돌은 옳고 그름이라는 내용의 사실보다 사람의 입장에 따른 감정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옳게 하는 것보다 원만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점은 대중생활을 하면서 많이 느꼈고 배웠던 부분입니다. 선방禪房 다닐 때 선배 스님들로부터 대중생활을 잘 하는 비결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종종 듣곤 했었죠.
서로에게 상처가 남지 않도록
“시비를 두지 마라.”는 가르침은 자기중심적인 시비, 즉 에고에 기반한 분별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자기에게 유리한 측면을 부각하여 분별합니다. 그래서 양보 없는 다툼과 충돌이 일어나지요. 내용의 진실성 보다 서로의 이해가 부딪치는 것입니다. 이런 분별을 일으켜서 마음의 평온을 흔들어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아직은 내가 이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차라리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내지 마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서로에게 그러기도 어렵다면 적어도 “내 마음이 분주하고 번잡스럽지 않게 하라.”는 의미로 보라는 것입니다.
즉 ‘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둔 말씀으로 보는 겁니다. 상대(상황)와 상관없이 스스로 상대(상황)를 의식하여 자신의 내면의 평온을 깨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는데 나만 울그락불그락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고, 적어도 스스로를 자극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비를 가림으로써 내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 깨진다면 ‘작은 것’[말末]을 얻기 위해 ‘큰 것’[본本]을 잃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온입니다. 이것이 ‘본本’입니다. 그다음이 ‘옳고 그름’[是非]입니다.
공부인은 냉혹하게 시비를 가려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노파심이 일어납니다. 해서 시각을 달리하여 부언합니다.
수행, 즉 마음공부를 해나가는 데에 있어서는 ‘옳은 것’과 ‘그른 것’, ‘아닌 것’과 ‘긴 것’ 등을 분명히 가려야 합니다. 적어도 높은 정신적 경지에 있지 않은 이상, 이제 마음을 내서 애쓰는 단계에 있는 초심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처음 마음을 낸 분들에게 요긴한 글인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도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부초심지인夫初心之人은 수원리악우須遠離惡友하고
친근현선親近賢善하야
대저 처음 마음을 낸 사람은 모름지기 악한 친구를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이를 친하고 가까이해서…
나의 정신을 나쁘게 물들일 만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 낼 힘이 아직 미약한 상태라면, 나쁜 것과 좋은 것을 분별해서 멀리할 것은 멀리하고 가까이할 것은 가까이해야 합니다. 시비를 따지지 말고 분별을 하지 말라고 했다 해서 지금 이 순간 탁 놓아 버리고 “시와 비, 선과 악은 본래 없는 것”이라는 큰스님들의 말씀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읊조리고 있다면, 이는 ‘알음알이’라는 지해知解의 병에 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알음알이는 실제의 앎이 아니라 관념적인 앎입니다. 자신에게 도움보다는 독毒으로 작용됩니다.
무엇이 옥玉이고 돌[石]인지, 무엇이 바른 것이고 삿된 것인지 바르게 분별하지 않으면, 자칫 도적을 자식으로 오인해 받아들이는 허물을 범하게 됩니다. 공부의 세계는 인정을 두지 말고 냉혹하리만큼 엄격하고 분명해야 한다고 옛 큰스님들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질문2. 인연에 대하여
스님, 요즘 들어 ‘인연’이란 단어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일어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때로는 어찌 처리해야 할지 벅차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 사람과 제 인연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좋은 인연도 있지만 슬프고 아픈 인연도 있습니다. 제가 나약한 것이겠지요? 기도를 하면 힘든 인연들이 잘 풀릴 수 있는지요?
인연因緣이라….
전생前生에 심어 놓은 인연이 씨앗이 되어 금생今生의 인연으로 새롭게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는 이전의 시간에 지어 놓은 인연이 현재의 인연으로 다가오고, 현재 지어 가는 인연이 장차 다가올 인연의 씨앗이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많은 일들의 이면에는 이런 인과因果의 이치가 있는 것이지요. 이미 익숙해진 인간관계 혹은 일들도 왜 이렇게 연결되어야 했는지 알지 못하기에 막연히 그저 우연偶然하게 다가오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때로 어떤 경우는 처음임에도 마치 잘 알고 있었던 듯 낯익은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어쨌든 낯설든 낯익든, 그 어떤 경우라도 ‘인因(원인)·연緣(조건)·과果(결과)·보報(받음)’라는 이치의 작용에 의한 것이었겠지요. 알든 모르든 말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가깝고 낯익은 인연들에서는, 그래서 편안하게 느껴지는 인연들에서는 애틋함을 갖고 마음을 더 쓰게 됩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요.
자신을 잘 살피고 수용하는 자세
하지만 이러한 인연일지라도 그 인연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요? 인연에 매번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면, 인연은 역설적이게도 나를 평온한 상태로 유지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좋은 인연은 그저 좋은 대로, 좋지 않은 인연은 그저 좋지 않은 대로 그 어떤 상태에서도 자신을 살피면서 일단은 수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픈 인연은 아픔을 감내하며, 얽혀 다가온 인연의 매듭이 잘 풀릴 수 있도록 말과 뜻과 행위를 살피면서 기도하며 자신의 마음 역량을 키워가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다가온 인연의 모양에 따라 그나마 내 마음이 심하게 출렁거리지 않게 됩니다.
『아함경』에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마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라는 육근六根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육근을 통해서 세상의 정보가 들어오고 사물이나 상황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호오好惡의 느낌, 즉 ‘좋다’, ‘나쁘다’의 감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인식된 사물에 대해 호오의 감정, 즉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 첫 번째 화실입니다.
이미 일어난 좋고 나쁨의 욕망대로 좋은 것은 취하고 좋지 않은 것은 버리려는 집착을 갖는다면 이것은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입니다. 이 화살은 내 마음에 배어 있는 이기적 속성, 즉 에고가 쏘는 화살입니다. 이 화살을 맞는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에고에 휘둘려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는 인연에 습관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면 자칫 집착의 강도가 세질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에고에 기반한 것이기에 마음에 동요動搖가 더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모든 관계나 일들 속에서 나의 감정이 이리저리 출렁거리지 않도록 스스로 단속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다가온 인연을 어떻게 수용하고 다시 어떤 모습으로 맺어 가느냐가 장차 다가올 인연의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이런 과정을 매끄럽게 풀어 가는 데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정림사 일행스님의 글을 더 보실 분은 https://cafe.daum.net/jeonglimsarang을 찾아주세요.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비운의 제6대 달라이 라마를 아시나요?
정말로 잠양갸초의 고향집은 인도 동북부 끝자락의 따왕사원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자그마한 사원인 우르겔링 곰빠(Urgyeling G.)로 변해 있었다. 제6대 달라이 라마, 잠양갸초의 고…
김규현 /
-
시비분별,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상태
질문 1. 시비[옳고 그름]를 나눔에 대해스님, 제가 어떤 일을 겪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인지를 가려야 되겠지요? 일을 당할 때마다 시是와 비非를 가리려…
일행스님 /
-
당하즉시와 본래현성
중국선 이야기 48_ 운문종 ❸ 운문종은 후기 조사선 오가五家 가운데 네 번째로 출현하였으며, 오가는 모두 육조혜능을 계승했다고 표방하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운문종의 선사상은 『육조단경』…
김진무 /
-
대흥사로 가는 길은 봄도 좋고 겨울도 좋다
거연심우소요 53_ 대흥사 ❶ 대흥사大興寺는 한반도 땅 남쪽 끝자락에 있는 두륜산頭輪山(=頭流山=大芚山)에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이다.…
정종섭 /
-
돈오점수와 선교일치
한국선 이야기 15_ 한국선의 정립, 보조지눌의 선사상 ❷ 1990년대 한국 불교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돈오점수-돈오돈수 논쟁’은 한국불교 연구자는 물론 선 수행자에게 많은 영향…
김방룡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