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대흥사로 가는 길은 봄도 좋고 겨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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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5 년 3 월 [통권 제143호] / / 작성일25-03-08 22:47 / 조회34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 53_ 대흥사 ❶
대흥사大興寺는 한반도 땅 남쪽 끝자락에 있는 두륜산頭輪山(=頭流山=大芚山)에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이다. 우리 영토 남쪽의 끝에 있어 땅끝인 셈인데,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마을을 진짜로 ‘땅끝마을’이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토말土末이 된다. 풍광이 아름다운 보길도甫吉島로 건너가는 배를 이곳에서 탄다.
땅끝마을 대흥사
대흥사로 가는 길은 봄도 좋고 겨울도 좋았다. 두륜산으로 찾아들면 풍광이 차분하고 평화로와 세상을 떠나 있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겨울바람이 차가운 때에도 한적한 솔숲 사이를 걷는 것은 당장 절이 보이지 않아도 등불을 찾아가는 것 같아 즐거웠고, 마음이 편했다. 정적靜寂과 고독孤獨이 즐겁다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느 때인가 겨울에는 혼자 일지암一枝庵을 찾아가다가 날은 저물고 길을 잃어 되돌아 내려온 적도 있다. 왜 일지암에 가려고 했을까? 아마도 초의의순草衣意恂(1786∼1866) 선사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에 대한 글들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어 그 자취를 찾아간 것 같다. 그것뿐이었을까? 『반야심경般若心經』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벽암록碧巖錄』부터 읽고 그에 심취해 있었던 시절 같기도 한데, 그 이후에도 인연이 닿는 대로 대흥사로 몇 차례 발걸음을 옮겼다. 『선가귀감禪家龜鑑』을 여러 차례 읽어본 적이 있어 서산휴정西山休靜(1520∼1604) 대사를 생각하며 찾아간 적도 있었으리라.
이 절은 대흥사로 부르기 전에는 산의 이름을 따 대둔사大芚寺로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는 두륜산頭輪山에 대둔사大芚寺가 있다고 되어 있고, 『대둔사지大芚寺誌』(1823)에는 대둔사는 대흥사大興寺로서 대둔산大芚山에 있다고 되어 있다. 자료상으로는 대흥사라는 명칭은 1647년에 건립한 「해남현대흥사청허대사비海南縣大興寺淸虛大師碑」에 처음 보이지만, 그 이전에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비문에 쓴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1)에 의하면, 514년 신라 법흥왕法興王(재위 514∼540) 때 아도阿道 화상이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도화상이 선산의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한 이후에 창건한 절이 된다. 홍문관 제학 채팽윤蔡彭胤(1669∼1731) 선생이 지은 「대둔사사적비명병서大芚寺事蹟碑銘幷序」에는 자장慈藏(590∼658) 율사가 중건했다거나 원효元曉(617∼686) 대사와 의상義湘(=義相 625∼702) 대사가 걸음을 하였다는 내용이 있지만, 사실인지는 의심스럽다.
초의선사도 의상대사의 입적 당시에 해남현은 아직 신라 땅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둔사가 의상의 법을 전한 화엄10찰에 속했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대둔사지』의 편찬에서 자료를 정리·고증한 아암혜장兒庵惠藏(1772∼1811) 화상도 이런 것은 모두 사실과 맞지 않는 근거가 없는 말이고, 통일신라 말기의 창건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며, 누가 언제 창건하였는지도 고증할 수 없다고 하였다. 채팽윤 선생도 직접 고증한 것이 아니라 당시 승려들이 제공한 자료들에 의거하여 비문을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 사은思隱, 성유性柔 화상의 부도浮屠=窣堵波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의 행적은 알 수 없고 고려시대의 승려로 짐작되는 정도이며, 고려시대에 대흥사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대흥사에서 가까운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가 요세了世(1163∼1245) 화상이 주석하며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일으켜 천태종天台宗의 종지宗旨를 널리 펼쳐나간 가람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대흥사의 당시 상황을 말해 주는 자료는 발견하기 어렵다.
서산대사와 대흥사의 중창
『보장록寶藏錄』 등 남아 있는 자료만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대흥사는 사찰의 모습을 제대로 갖춘 것 같지는 않고,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가 대흥사에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대흥사가 중창되고 사세가 일어선 것으로 보인다. 서산대사는 평안도 묘향산妙香山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하던 날, 사명유정四溟(=泗溟)惟政(1544∼1610) 대사에게 자신의 대선사大禪師 교지敎旨와 함께 가사와 발우를 대흥사에 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두륜산은 지형상 오래도록 훼손되지 않을 곳이고, 뇌묵처영雷默處英(?∼?) 대사 등 많은 제자들이 남쪽 지방에 있으며, 자신도 출가 초기에 두륜산에서 법을 들었다는 것을 근거로 종宗의 법통法統이 귀결되는 곳이 대흥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하며, 사명대사는 스승의 이런 유지를 받들어 실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보장록』은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고,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대흥사에 왔다는 것도 후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의심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월사선생집月沙先生集』에 실려 있는, 1630년에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 선생이 서산대사의 유고遺稿를 들고 온 대사의 제자 보진葆眞, 언기彦機, 확흘矱仡 화상의 부탁을 받고 지은 <유명 조선국 사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서산청허당 휴정대사 비명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에는 출가 이전에 동학들과 두류산을 유람하며 경서를 읽은 사실과 임진왜란 시기에 80세의 고령으로 맡은 팔도선교도총섭의 자리를 사명대사에게 맡기고 절로 돌아온 후 선조로부터 호를 받고 두류산, 풍악산, 묘향산 등을 왕래하며 제자 등을 만난 일은 기록되어 있으나, 대흥사와의 연고는 보이지 않는다.

1631년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 선생이 서산대사의 제자 해안海眼, 쌍흘雙仡 화상 등이 행장을 가지고 와서 스승이 주석했던 해인사에 세울 비명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지은 <유명 조선국 사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淸虛堂大師碑銘>에는 해인사에 주석했던 내용만 있을 뿐 대흥사와 관련된 것은 전혀 없다. 이 비명은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에 실려 있다.
이수경·임성춘·김다빈의 <해남 대흥사 청허휴정의 부도와 석비에 대한 고찰>의 연구에 의하면, 1647년에 대흥사에 세운 <서산대사비>는 실물과 탁본이 전하지 않고 역대 고승비문을 모은 자료집에 내용만 실려 있는데, 장유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 이 글에는 서산대사가 두륜산 대흥사에 주석하였다고 되어 있어 『계곡선생집』에 실린 원래의 비문 내용과 다르게 변개變改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현재 부도전浮屠殿에 있는 <청허당보제존자비淸虛堂普濟尊者碑>도 1778년(정조2)에 연담유일蓮潭有一(1720∼1799) 화상이 원래의 비문이 아닌 1647년에 세웠던 비의 비문을 그대로 다시 새겨 세운 것이고, 비신碑身도 귀부龜趺의 끼우는 부분과 서로 맞지 않은 상태로 세워진 사실도 밝혀내었다. 비문의 내용이 바뀐 연유는 알 수 없으나, 변개된 비문의 내용은 그 후 1791년(정조 15) 좌참찬을 지낸 서유린徐有隣(1738∼1802)이 지은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표충사기적비海南大興寺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와 『대둔사지』(1823)에 영향을 주어 바야흐로 서산대사가 대흥사에 주석하고 의발이 전해진 것으로 굳어지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하였다.
이에는 17세기까지 묘향산과 금강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편양언기鞭羊彦機(1581∼1644)의 문파가 18세기에 남쪽 지방으로 와 근거지를 마련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정은 더 연구해 봐야 하겠지만, 이런저런 인연으로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아우라에 힘입어 발전하였다고 보인다.
1665년(현종 6)에는 심수心粹 화상이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1669년(현종 10)에는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다. 1811년(순조 11) 봄에 남원南院 구역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가허루駕虛樓, 천불전千佛殿, 대장전大藏殿, 용화당龍華堂, 적조당寂照堂, 지장전地藏殿, 팔해당八解堂, 약사전藥師殿, 향로전香爐殿 등 대부분의 당우들이 소실되었다. 1812년부터 완호윤우玩虎尹佑(1758∼1826) 화상의 주도로 극락전, 용화전, 지장전 등을 지었고, 1813년에는 천불전을 짓고 경주 기림사衹林寺에서 백석인 불석으로 만든 천개의 불상을 옮겨와 1817년에 봉안하였다.
12종사를 배출한 대흥사
대흥사의 12종사宗師는 모두 서산대사의 문하에서 나왔다. 서산대사는 젊었을 때 과거시험에 낙방한 후 지리산 등을 주유하던 중 부용영관芙蓉靈觀(1485∼1571) 대사의 설법을 듣고 여러 불전을 독파한 끝에 출가하여 1540년(중종 35) 영관대사에게서 수계受戒를 받았다. 그 후 운수 행각을 하다가 제13대 명종明宗(재위 1545∼1567) 시대에 들어와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와 보우普雨(1509∼1565) 대사가 주도한 불교 부흥 정책으로 다시 부활된 승과僧科에 응시하여 1549년(명종 4)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그러나 1556년에 선교양종판사라는 직이 수행자의 본분에 맞지 않는다고 사직하고 금강산, 두류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을 두루 만행하며 수행에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까지 피난을 간 선조宣祖(재위 1567∼1608)의 간곡한 부탁에 따라 전국 승려들로 하여금 구국의 전선에 나서게 하고 스스로 최선봉에 서서 의승義僧들을 지휘하며 처영대사, 사명대사 등과 같은 제자들과 함께 평양 탈환 전투 등에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자 그는 승군장僧軍將에서 물러나 묘향산 등 여러 곳을 순력하다가 1604년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하였다. 부도는 묘향산 안심사安心寺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세워졌다. 선교융합을 기반으로 하되 사교입선捨敎入禪에 무게 중심을 두고 기본적으로 임제종臨濟宗의 법맥을 공고히 하였다. 그 아래에서 사명유정, 편양언기, 소요태능逍遙太能(1562∼1649), 정관일선靜觀一禪(1533∼1608)의 4대 문파가 나왔고, 그 휘하에서 뛰어난 제자들이 기라성같이 나와 한국 불교의 장강長江을 형성하였다.
대흥사의 12종사들은 풍담의심楓潭義諶(1592∼1665), 취여삼우醉如三愚(1622∼1684), 월저도안月渚道安(1638∼1715), 취여의 가사와 발우가 전해진 화악문신華嶽文信(1629∼1707), 월저의 법을 받은 설암추붕雪巖秋鵬(1651∼1706), 풍담의 적자인 월담설제月潭雪霽(1632∼1704)에게서 가사와 발우를 받은 환성지안喚醒志安(1664∼1729), 화악에게서 교학을 배우고 환성에게서 선을 전수받은 벽하대우碧霞大愚(1676∼1763), 화악의 제자인 설봉회정雪峰懷淨(1678∼1738), 설암에게서 가사와 발우를 받은 상월새봉霜月璽篈(1687∼1767), 환성의 제자 호암체정虎巖體淨(1687∼1748), 환성에게서 가사와 발우를 받은 함월해원涵月海源(1691∼1770), 호암의 제자 연담유일이 그들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로 이름난 다승茶僧 초의선사까지 포함시키면 13종사가 된다. 이들은 『화엄경華嚴經』을 바탕으로 화엄대법회를 열어 화엄종의 종풍을 진작시켰는데, 전국 각지에서 대중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팔도의 승려들도 대흥사로 많이 귀의하여 대흥사는 선종과 교종의 중심적인 도량으로서 그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풍담화상은 편양대사에게서 법을 전수받아 해동화엄종의 중흥조로 존경을 받았다. 편양문파에서는 풍담문파가 가장 번창하였고, 풍담의 법맥을 이은 월담화상이나 월저화상의 문파도 번성하였다. 월저화상은 화엄華嚴과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여 명성을 날렸고, 묘향산妙香山에서 화엄법회를 열어 당대 화엄종주華嚴宗主라는 명성도 얻었다. 월저의 제자 설암화상이 대둔사의 백설당白雪堂에서 연 강회講會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곤 했다.
환성화상도 해인사, 청평사, 정양사, 통도사 등 전국의 여러 사찰을 다니며 화엄대회를 열어 화엄종풍을 크게 일으키고 화엄학의 제1인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특히 1725년 금산사金山寺의 화엄대법회에는 1,400여 명의 대중이 전국에서 운집하였으며, 사대부 가운데도 박학 명쾌한 그의 식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치열한 당파싸움에 희생된 환성화상
환성화상은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를 지어 선종 오가五家의 종지를 밝혀내어 임제종의 종통을 견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런데 1729년에 환성화상은 1725년의 금산사 화엄법회가 1728년(영조 4)에 있은 ‘이인좌李麟佐(1695∼1728)·정희량鄭希亮(?∼1728)의 난’과 연관되었다는 무고를 당하여 전라도 관찰사 이광덕李匡德(1690∼1748)에 의해 제주로 유배되어 장살杖殺을 당하였다. 이광덕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1595∼1671) 선생의 현손이 된다. 아무튼 조선 초기의 천태종의 행호行乎(?∼1447) 화상, 보우普雨(1515∼1565) 대사에 이어 3번째로 고승이 제주에 유배되어 죽임을 당한 일이 발생하였다. 통도사도 환성화상이 주석했던 이유로 사찰 창건 이래 처음 탄압을 받기도 했다.

‘이인좌·정희량의 난’이라는 명칭에서 반란이라는 용어 때문에 이 사건이 무식한 무뢰배들이 나라를 상대로 일으킨 난으로 인식되기 쉬우나, 이 사건은 좀 복잡하다. 청주 출신의 이인좌는 세종世宗(재위 1418∼1450)의 4남인 임영대군臨瀛大君(1420∼1469)의 후예로 집안은 남인 명문가로 명성이 있었다. 세종의 차남인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 세조)이 조카인 제6대 단종端宗(재위 1441∼1457)을 제거하고 왕좌를 찬탈한 이후부터 조선의 왕은 모두 세조世祖(재위 1455∼1468)의 자손들이다. 세종의 장남은 문종文宗(재위 1450∼1452)이고, 그 문종의 외아들이 단종이다.
이인좌의 조부 이운징李雲徵(1645∼1717)은 숙종肅宗(재위 1661∼1720) 때인 1674년 ‘갑인예송甲寅禮訟’ 정국에서 서인 세력과 남인 세력의 대결 끝에 남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1622∼1680)의 추천으로 6품직에 바로 발탁되어 관로에 진출하여 온건파인 탁남濁南의 영수 허적許積(1610∼1680) 선생의 배경에 힘입어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의 처조부인 윤휴尹鑴(1617∼1680) 선생은 개혁파 문인으로 강경파인 청남淸南의 영수였다. 그런데 1680년(숙종 6)에 이런 남인은 서인西人에 의해 역모逆謀로 몰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정권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허적, 윤휴, 이원정 등 당대의 남인의 거두들이 사사賜死되거나 참형을 당하였다. 이원정은 대학자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 선생의 손자로 대대로 학문으로 명성을 떨친 명문가 출신인데, 그 역사는 현재도 칠곡 석전石田 마을에 남아 있다. 서울대학교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이수성李壽成(1937∼) 선생도 이 집안 후손이다.
이인좌·정희량의 난과 치열한 당파싸움
1689년 숙종과 후궁 장옥정張玉貞(1659∼1701) 사이에 난 아들 윤昀의 원자元子 책봉과 장씨의 희빈禧嬪으로의 책봉 문제를 놓고 다시 서인과 남인이 대결한 끝에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사사되고 핵심 인사인 김수흥金壽興(1626∼1690), 김수항金壽恒(1629∼1689) 등이 파직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권대운權大運(1612∼1699), 김덕원金德遠(1634∼1704), 목래선睦來善(1617∼1704) 등이 요직에 등용되어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이때 아들이 없던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1667∼1701)는 폐출廢黜되었고, 장희빈은 정비正妃가 되었다. 인현왕후가 경북 김천의 청암사靑巖寺에 내려가 머물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인현왕후의 외할아버지가 서인의 영수였던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다.
1694년에 숙종이 기사환국 때 몰락한 서인들을 다시 등용하고 남인을 축출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벌어지면서 남인들은 다시 권력을 상실하였다. 그 이후 영남의 남인들은 조선시대 내내 서인 특히 노론이 주도하는 중앙 정계에 진출할 길이 막혀 버렸다.
이런 정치의 격랑 속에서 이인좌의 할아버지 이운징도 경신환국 때 유배를 갔다가 기사환국으로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갑술환국으로 또 유배를 당하여 1710년에 풀려난 후 어려운 길을 걷다가 1717년에 사망했다. 그때도 집안이 흉당凶黨으로 몰려 큰 화를 입었고, 후손들은 관직에 나갈 길이 막혀 버렸다. 조선 역사에서 이 당시 숙종은 오래된 당파정치에서 벗어나 왕권 강화의 방법으로 이런 ‘환국정치’의 방법을 구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아까운 인재들만 대거 죽는 처참한 결과만 가져왔다. 이인좌의 삶도 이런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나라와 백성을 책임지고 있는 군주라면 국정 운영에서 인재들을 골고루 등용하여 그 능력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 바른 길임에도 숙종은 그간 격렬하게 싸워 온 서인과 남인을 차례로 이용하여 서로를 제거하게 만드는 책략을 썼다.
장희빈의 아들 윤이 경종景宗(재위 1720∼1724)으로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죽자 노론에 의한 독살이라는 의혹이 확산되면서 조정은 또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노론 세력에 힘입어 왕이 된 영조英祖(재위 1724∼1776)의 정통성을 두고 서인 내부에서 노론과 소론이 갈라져 정치 목숨을 걸고 대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최씨 사이에 2남으로 태어났는데, 친모의 미천한 출신으로 인하여 노론의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종질녀이자 숙종의 후궁인 영빈寧嬪 김씨의 양자 노릇을 하며 자랐다. 이렇게 영조는 태어난 후부터 출생의 약점을 아는 노론세력에게 잡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희량과 장원 급제한 박필현朴弼顯(1680∼1728), 이유익李有翼(1697∼1728), 경종의 처남 심유현沈維賢(1697∼1728) 등 소론 강경파는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 세력과 연합해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영조를 폐위시키고 인조 때에 억울하게 죽은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의 증손인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1698∼1729)을 옹립하여 왕통을 새로 정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전국 각지에서 동조세력을 규합하였다.
이인좌의 형제들도 이 계획에 동참하여 영남의 사족들을 끌어들이고 병사를 모았다. 그런데 1728년(영조 4) 4월 이런 계획이 영의정을 지낸 소론의 영수 최규서崔奎瑞(1650∼1735)에 의해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거사가 무산될 것을 감지한 이인좌는 급히 군사를 일으켜 청주성淸州城을 공격하여 충청병사忠淸兵使를 죽이고 청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는 삼남대원수三南大元帥로 칭하면서 충청도 관내 수령들을 새로 임명하여 전국적으로 병사를 모으게 하고, 안성과 죽산으로 진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5월 죽산 주민에게 붙잡혀 한양에서 영조의 친국親鞫을 받고 목숨을 잃고 말았다. 거사 계획에 동참했던 사람들도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의리에 투철했던 정희량은 원수元帥의 직을 맡아 주로 경남 지역을 장악해 갔다. 정희량의 거사에 동조한 사람들은 이인좌의 경우보다 많았는데, 이인좌의 죽음 이후에도 수그러들지 않고 거세게 저항하였다. 이 사태에서 정희량의 세력이 워낙 강하여 영조는 절치부심切齒腐心 이를 갈며 격분을 하였는데, 결국에는 거창에서 체포된 정희량을 참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희량의 출신지인 안음현安陰縣을 쪼개서 함양부와 거창군에 복속시키고 고을 자체를 없애 버렸다.
지난 날 금성대군錦城大君(李瑜, 1426∼1457)과 집현전 박사 출신인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1457) 선생을 중심으로 시도한 단종복위사건에서 세조가 이들을 반역죄로 죽이고 영남의 순흥順興 고을을 없애 버린 것과 같다. 그 결과 순흥 안씨安氏의 관향貫鄕까지 없어지는 사태까지 생겼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덟 아들 중 유일하게 형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불의에 반대하다가 순흥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를 당했던 것이다.

대학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1388∼1443) 선생에게서 공부한 대전大田 이보흠 선생은 1456년 집현전 동문인 성삼문成三問(1418∼1456), 박팽년朴彭年(1417∼1456) 등이 역적으로 몰려 죽는 모습을 보고는 벼슬을 던지고 낙향해 버렸다. 1457년(세조 3)에 순흥부사에 임명되자 바로 금성대군을 만나고 비밀리에 순흥에서 영월에 유배된 단종의 문안을 오가기도 하면서 단종복위 격문을 짓고 거사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사사되고 본인은 유배지 박천博川에서 의금부도사 최계남崔季男에 의해 교살絞殺되었다. 정창손鄭昌孫(1402∼1487), 신숙주申叔舟(1417∼1475), 황수신黃守身(1407∼1467), 박중손朴仲孫(1412∼1466)이 이보흠을 죽이라고 줄기차게 왕을 압박한 결과였다.
1693년(숙종 19)에 회복된 순흥부의 정중창鄭重昌 부사가 금성대군 위리안치의 터에 금성대군, 이보흠 선생, 함께 순절한 선비들의 제단을 마련하고 제사를 올렸다. 1719년(숙종 45)에 이 신단神壇을 상, 중, 하단으로 나누어 중수하고 제사를 지낸 금성단錦城壇이 불후의 이름과 함께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거창 덕천서원德泉書院과 청주 죽계서원竹溪書院에는 금성대군과 이보흠 선생을 함께 배향하고 있다.

다시 ‘이인좌·정희량의 난’을 보면, 당시 격노한 영조는 이에 더하여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에 영남을 평정했다는 <평영남비平嶺南碑>까지 세웠다. 졸지에 영남이 반역의 땅으로 찍혔다. 그리고 경상우도 사람들의 과거 응시도 금지해 버렸는데, 이로 인하여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의 문인들까지 출사의 길이 막혀 버렸다. 이후 경상우도 사람들은 대원군에 의해 과거제도가 혁파될 때까지 벼슬할 생각은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정희량은 남명학파南冥學派의 거유이자 인조 때 대사헌을 지낸 절의파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 선생의 4대손인데, 이 사건으로 정온 선생 집안도 큰 화를 입었다. 아무튼 ‘이인좌·정희량의 난’이라는 사건의 전말은 이러한데, 이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견해가 분분할 것이다. 이 사건 당시에 승려들 가운데 이에 동조한 사람들도 있었고, 난을 토벌하는 관에 협력한 사람도 있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환성화상이 참변을 당했고, 그 불똥이 통도사에까지 튀어 고난을 겪었던 것이다. 1994년 제주도 조천읍 고관사古觀寺에 <환성화상비>가 세워졌다. 허목許穆(1596∼1682) 선생은 그의 『기언記言』에서 정희량을 청사淸士로 분류하여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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