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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불립문자와 언하대오, 언어에 대한 선종의 양면적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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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5 년 3 월 [통권 제143호]  /     /  작성일25-03-08 22:37  /   조회2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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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립문자不立文字(언어·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교외별전敎外別傳(이해를 위한 교설 외에 별도로 전하는 것이 있다)·직지인심直指人心(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지적해 알려준다)·견성성불見性成佛(본연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 이 네 구절은 선종의 안목을 압축적으로 전한다. 그리고 네 명제가 전하는 뜻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구四句가 전하는 선종의 안목

 

그러나 네 명제가 각각의 뜻을 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네 명제가 합하여 하나의 뜻을 전하는 것인지, 그 뜻(들)이 왜 선종 안목의 특이성이 되는지를 드러낼 수 있는 정도의 탐구가 필요하다. 종래의 해설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

 

필자는 이 네 명제가 <‘이해 수행’과 ‘마음 수행’의 차이와 관계에 관한 선종의 안목>을 압축적으로 천명하는 것이라 본다. 네 명제가 합하여 이 안목을 전하고 있다. 필자가 이해하는 이들 명제의 취지를 풀어서 합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사진 1. 마음을 닦는 선수행. AI로 생성한 이미지.

 

불립문자不立文字(언어·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교외별전敎外別傳(이해를 위한 교설 외에 별도로 전하는 것이 있다) - 이해는 언어·문자에 의거하고 있고, 교종敎宗은 이해를 통해 해탈하려 한다. 그러나 언어·문자를 통한 이해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언어·문자는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무지의 통로’일 수 있는 동시에, 무지를 품은 이해는 ‘분별을 펼쳐가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해를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가는 ‘이해 수행’만으로는 ‘무지를 품은 이해’를 온전히 극복하기 어렵다. ‘마음 수행’이 가세해야 한다. 그런데 교종은 ‘이해 수행’에 치우쳐 ‘마음 수행’을 놓치고 있다. 선종은 ‘이해 수행’ 외에 별도로 전하는 ‘마음 수행’의 도리를 계승하고 있다. 

 

직지인심直指人心(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지적해 알려준다)·견성성불見性成佛(본연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 - 이해가 없으면 마음 작용은 공허해지고, 마음이 없으면 이해의 수립·유지·수정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마음은 이해와의 관계에서 상위의 지위이다.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이해’를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이해’로 바꿀 수 있는 궁극적 근거는 마음이다. 마음 수행은, 마음의 국면과 행로를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언어·이해의 계열 수립과 유지’에서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언어·이해의 계열 수립과 유지’로 바꾸는 수행이다.

 

선종은 이 마음 수행의 길을 드러낸다. ‘언어·이해의 계열을 선택하는 마음의 국면과 행로’를, 마음이 작용하는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곧바로 지적해 주어’ 알아차리게 해준다. 그리하여 마음 국면과 행로를,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언어·이해의 계열·범주’에서 한꺼번에 빠져나와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언어·이해의 계열·범주’로 옮기게 한다. ‘현상의 사실 그대로’(본연)에 상응하면서 펼쳐지는 부처의 삶이 뒤따른다.

 

이하에서는 몇 가지 관련 주제를 통해 네 명제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풀어본다. 먼저 ‘언어에 대한 선종의 양면적 시선’을 ‘불립문자不立文字’(언어·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와 ‘언하대오言下大悟’(말 듣자마자 크게 깨닫는다)의 대비를 통해 음미한다. 이어 ‘이해와 마음’, ‘이해 수행과 마음 수행’, ‘붓다의 정념과 혜능의 무념 그리고 원효의 일심’, ‘간화선과 마음 수행’,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그리고 마음 수행’ 등의 주제들을 다룰 것이다. 각각의 주제마다 관련된 부수 주제들이 많아 의욕의 자제가 필요할 것 같다.

 

언어·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不立文字]

 

‘불립문자’ 천명에는 분명 언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담겨 있다. 그런데 선종의 언어 부정적 시선에는 두 유형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유형의 시선은 모두 ‘한꺼번에 빠져나오는 마음 국면’(일념반조一念返照)을 일깨워 주어 ‘마음 수행의 길’에 오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언어가 ‘마음 수행에서의 돈오’를 가로막는 장애라는 인식이 불립문자 천명의 배경이다.

 

사진 2. 마조도일馬祖導一(709〜788) 선사. 시모무라 간잔(下村觀山) 작,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

 

부정적 시선의 첫 번째 유형은, 언어의 속성에 수반하는 ‘사실 왜곡의 무지’에 대한 것이다. 이 시선은, <언어에는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무지’가 그림자처럼 쫓아다닌다. 따라서 언어를 따라가면서 뜻을 헤아리고 생각을 굴려 가면 ‘사실을 왜곡하는 사유를 전개하고 확산시키는 길’(분별망상)을 달리게 된다>라는 통찰을 담고 있다. 마조馬祖道一(709~788)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여섯 가지 감관능력[六根]’의 운용과 모든 행위가 다 ‘현상의 [‘사실 그대로’서의] 본연[法性]’인 것이다. ‘[사실 그대로 보는] 근원으로 돌이킴[返源]’을 알지 못하여 이름을 따르고 형상을 좇아가면 미혹한 생각이 망령되이 일어나 갖가지 행위를 짓게 되지만, 만약 ‘한 생각을 돌이켜 비출 수[一念返照]’ 있다면 모든 것이 ‘성스러운 마음[聖心]’의 드러남]이다.”(주1)

 

부정적 시선의 두 번째 유형은, 〈언어의 길은 대상을 좇아가게 하여 ‘대상에 휘말리지 않는 마음 국면’에 관한 소식을 알지 못하게 한다〉라는 점에 대한 것이다. 이 시선은, 〈언어의 길에서 얻는 이해가 아무리 수승한 것일지라도 그 이해는 언어로 지시하는 대상(경계)을 좇아가면서 확보한 것이다. 이해를 좇아가는 길을 걸어가면 ‘대상을 좇아가는 길에서 한꺼번에 빠져나오는 마음 국면’, ‘어떤 대상도 붙들지 않는 마음자리’는 알지 못한다〉라는 통찰을 담고 있다. 임제의현臨濟義玄(?~867)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이 만약 생각마다 ‘밖으로 달려 나가 구하는 마음[馳求心]’을 쉴 수 있다면 곧바로 조사나 부처와 다름이 없다. 그대들은 조사와 부처를 알고자 하는가? 다만 그대들이 내 앞에서 법문을 듣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학인이 [이 사실에 대해] 믿음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곧 밖으로 달려 나가 구하는 것이다. 설혹 구하여 얻은 것일지라도 모두 ‘문자를 통해 얻은 그럴듯한 내용[文字勝相]’이어서 끝내 저 살아 있는 조사의 뜻을 얻지 못한다.”(주2) 

 

사진 3. 임제의현臨濟義玄(?~867) 선사.

 

“어떤 스님이 물었다. <선사께서는 누구의 가풍家風을 노래하며, 종풍宗風은 누구를 이었습니까?> 임제 선사가 말했다. <내가 황벽희운黄檗希運(?~850) 스님의 처소에서 세 차례 묻고 세 차례 얻어맞았다.> 그 스님이 [뜻을] 헤아려 말하려 하자 임제 선사는 곧바로 고함[喝] 지르고, 뒤이어 [주장자를] 내리치면서 말했다. <허공에 못을 박아서는 안 된다.>”(주3)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떤 것이 ‘마음과 마음이 [대상을 붙들고 쫓아 나가면서] 달라지지 않는 국면[心心不異處]’입니까?> 임제 선사가 말했다. <그대가 질문을 헤아리는 순간 벌써 달라져 버렸다. ‘[‘사실 그대로’서의] 본연[性]’과 ‘[현상의] 특징적 차이[相]’가 각각 나뉘었다.>”(주4)

 

말 듣자마자 크게 깨닫는다[言下大悟]

 

불립문자가 천명하는 ‘언어를 보는 부정적 시선’과는 전혀 다른 언어 인식이 선종에서 목격된다. 언어를 돈오의 직접적 매개로 삼는 시선이다. 혜능慧能(638~713)을 비롯하여 조사선祖師禪의 거장들에 이르기까지 <말 듣자마자 돈오한다>라는 설법이 줄지어 등장한다. <언어가 돈오의 통로다>라는 설법이다. <‘대상을 좇아가게 하여 대상에 매이도록 하는 언어의 길’에서 한꺼번에 빠져나오게 하는 것도 언어>라고 하는, 언어 인식의 대반전이다. <언어는 돈오를 가로막는 장애>(불립문자)라는 언어 부정의 인식과는 반대되는, 언어 긍정의 언어관이다. 혜능은 말한다.

 

사진 4. 남화선사에 모셔진 육조혜능六祖惠能 대사의 등신불.

 

“선지식들이여, 나는 홍인弘忍(601~674) 화상의 처소에서 ‘한 번 듣고 말 끝나자마자 크게 깨달아[一聞言下大悟]’ ‘참 그대로를 보는 본연의 면모[眞如本性]’에 ‘한꺼번에 눈 떴다[頓見]’.”(주5) 

 

“[어떤 사람은] 가르침[法]을 비방하면서 오로지 <문자를 쓰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하는데, <문자를 쓰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사람은 언어를 써서는 안 되니 언어가 바로 문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대로 보는] 자신의 본연[自性]’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공空[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언어이지만 ‘[사실 그대로 보는] 본연의 면모[本性]’는 ‘없지 않은 것[不空]’이니, 어리석음으로 자신을 미혹시킨 것을 언어로 제거하기 때문이다.”(주6)

 

마조도 혜능의 언어관에 동조하여 이렇게 설법한다.

 

“만약 ‘탁월한 자질[上根]’의 중생이라면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말 듣자마자 바로 알아차려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보는] 본연의 면모[本性]’를 ‘한꺼번에 깨닫는다[頓悟]’.”(주7)

 

“모든 현상은 다 ‘마음의 현상[心法]’이고, 모든 이름은 다 ‘마음의 이름[心名]’이다. ‘온갖 현상[萬法]’은 다 마음을 따라 생겨나니 마음이 ‘온갖 현상[萬法]’의 근본이다. 경전에서는, <마음을 알아 본래의 근원을 통달하니, 따라서 사문이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道’인 국면에서는 차이[相]에 대한 분별의 차별이 없어] 이름 붙인 것들이 같고 [이름들의] 뜻도 같으니, 모든 것들이 다 같아서 ‘순일하여 섞임이 없다[純一無雜]’.”(주8)

 

선종이 천명하는 ‘불립문자’와 ‘언하대오’는 분명 언어에 대한 양면적 시선이다. 이런 언어관은 선종 특유의 것일까? 아니다. 붓다의 언어관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개성 있는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다음 글에서 그 사정을 살펴본다. 

 

<각주>

(주1) 마조, 『마조도일선사광록馬祖道一禪師廣錄』, “六根運用, 一切施為, 盡是法性. 不解返源, 隨名逐相, 迷情妄起, 造種種業, 若能一念返照, 全體聖心.”

(주2) 임제, 『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爾若能歇得念念馳求心, 便與祖佛不別. 爾欲得識祖佛麼? 秖爾面前聽法底是. 學人信不及, 便向外馳求. 設求得者, 皆是文字勝相, 終不得他活祖意.” 

(주3) 임제, 같은 책, “問. 師唱誰家曲, 宗風嗣阿誰? 師云. 我在黄蘗處, 三度發問, 三度被打. 僧擬議, 師便喝, 隨後打云. 不可向虚空裏釘橛去也.”

(주4) 임제, 같은 책, “問. 如何是心心不異處? 師云. 爾擬問早異了也. 性相各分.” 

(주5) 혜능, 『돈황본 육조단경』, “善知識, 我於忍和尚處, 一聞言下大悟, 頓見眞如本性.”

(주6) 혜능, 같은 책, “謗法, 直言不用文字, 既云不用文字, 人不合言語, 言語卽是文字. 自性上說, 空正語言, 本性不空, 迷自惑, 語言除故.”

(주7) 마조, 『마조도일선사광록馬祖道一禪師廣錄』, “若是上根衆生, 忽爾遇善知識指示, 言下領會, 更不歷於階級地位, 頓悟本性.”

(주8) 마조, 같은 책, “一切法, 皆是心法, 一切名, 皆是心名. 萬法皆從心生, 心為萬法之根本. 經云, 識心達本源, 故號為沙門. 名等義等, 一切諸法皆等, 純一無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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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고려대에서 불교철학으로 석·박사 취득. 울산대 철학과 교수와 명예교수를 거쳐 현재 인재대 석좌교수로 있다. 울산대에서 불교, 노자, 장자 강의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원효전서 번역』, 『대승기신론사상연구』, 『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 『돈점 진리담론』, 『원효의 화쟁철학』, 『원효의 통섭철학』,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이해수행과 마음수행』 등이 있다.
twpark@ul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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