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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돈오점수와 선교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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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  2025 년 3 월 [통권 제143호]  /     /  작성일25-03-08 22:28  /   조회3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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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 이야기 15_ 한국선의 정립, 보조지눌의 선사상 ❷ 

 

1990년대 한국 불교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돈오점수-돈오돈수 논쟁’은 한국불교 연구자는 물론 선 수행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선문禪門의 정로正路가 무엇인가?’하는 성철의 문제 제기로부터 출발한 이 논쟁은 선의 본질에 관한 심층적인 담론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이를 계기로 지눌 선사상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눌은 광종 대 법안종의 유입과 의천의 천태종의 창종으로 인하여 미약해졌던 구산선문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선사상을 구축하였다. 지눌은 한평생 당시 불교계의 지배담론이었던 화엄 교학을 의식하였다. 법장과 징관 및 종밀의 화엄 교학으로 무장된 화엄종 승려들에 대항하여 사상적으로 화엄과 선의 동질성을, 실천적으로 화엄에 대한 선의 우위성을 밝힌 것이 지눌 선사상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지눌의 저서와 선사상 체계

 

지눌의 선사상 속에는 ‘돈오점수’와 ‘선교일치’와 ‘간화선’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는 세 번에 걸친 지눌의 깨달음과 긴밀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어서 삼문 체계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상적 일관성이 없다거나 상호 모순적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자신의 선사상 체계에 대해 지눌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눌 선사상의 체계는 우리가 지눌의 저서를 통하여 ‘발견’하거나 ‘구성’해야 하는 해석학적 작업을 요구한다.

 

사진 1. 보조국사가 주석했던 송광사 삼일암.

 

지눌은 10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상당록上堂錄』, 『법어法語』, 『가송歌頌』, 『목우자시집牧牛子詩集』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해지는 저술 가운데에도 정확히 저술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권수정혜결사문』(33세, 1190년), 『계초심학인문』(48세, 1205년), 『화엄론절요』(50세, 1207년), 『절요사기』(52세, 1209년) 등 네 편뿐이다. 그리고 『수심결』, 『진심직설』, 『간화결의론』, 『원돈성불론』, 『염불요문』 등은 모두 저술 연대가 미상이다. 이 가운데 『진심직설』과 『염불요문』은 지눌의 저술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보면 『수심결』은 1205년에서 1208년 사이, 『원돈성불론』은 1208년경, 『간화결의론』은 1209년경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수정혜결사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저술은 정혜결사의 이름을 수선사로 바꾼 1205년 이후 열반에 든 121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세 번의 깨달음 이후 결사를 이끌면서 동시에 저술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수심결』을 포함한 지눌의 글들은 ‘언어도단의 선의 세계를 언어를 통하여 어떻게 표현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아랑곳하지 않고 간이簡易하면서도 명쾌하게 선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다. 지눌의 글이 감명을 주는 이유는 선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 2. 송광사보조국사비(부도암 부도군 내).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필자는 지눌의 저서 가운데 『수심결』 및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에 주목한다. 이는 ‘1209년에 쓰여진 『절요사기』가 지눌의 선사상을 종합하고 있다’라는 선학들의 견해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1207년 완성한 『화엄론절요』와 더불어  『대혜어록절요』를 집필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의 경전적 근거를 제공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종밀의 『법집별행록』의 말미에 수록된 일부 대혜의 어록을 첨부하여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라 이름을 붙인 것과 생전에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을 공개하지 않은 점에서 그러한 추론을 하게 된다. 

 

수선사에 참여한 대중들을 상대로 깨침과 닦음에 관한 자신의 선사상을 정리한 것이 『수심결』이라면, 화엄종 승려를 상대로 화엄교학과 비교를 통하여 자신의 선사상을 펼치고 있는 것이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세 저서를 통하여 지눌 선사상의 체계를 구성해 볼 때, 무신집권기 결사結社를 통하여 교종의 주도에서 선종 주도로 불교계의 지형을 바꾸었던 지눌 선사상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수심결』과 돈오점수

 

지눌 선사상의 체계에 대하여 최초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 인물은 김군수이다. 지눌의 비문에서 김군수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국사가 사람들에게 외우고 간직하라고 권한 것은 언제나 『금강경金剛經』이었다. 법法을 세우고 가르침을 펴는 때에는 그 뜻을 반드시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두었고,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華嚴論』과 대혜선사大慧禪師의 『어록語錄』을 양 날개로 삼았다.(주1)

 

위의 인용문에서 제시한 김군수의 관점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지눌이 『육조단경』과 『신화엄론』과 『대혜어록』을 중시하였고, 이를 통하여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간화경절문’의 삼문을 제시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둘째는 지눌이 자신의 선사상을 『육조단경』을 통해 정립하였고, 이통현의 화엄사상과 대혜의 간화선 사상을 통해 보완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필자는 두 번째 해석이 더 타당해 보인다.

 

『수심결』은 지눌의 선사상에 다가가기 위한 입문서이자 그의 선사상의 완결판이며 정수精髓이다. 『단경』에 나타난 ‘심즉불, 돈오견성, 정혜불이, 자성삼학, 일행삼매’ 등 혜능의 선사상을 결사에 참여한 대중들이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제시한 수행 지침서가 『수심결』이라 할 수 있다. 의천 사후 고려불교 사상계는 법상종과 화엄종이 주도하였고, 구산선문의 남종선 사상은 의천이 선종의 승려들을 모아 창종한 천태종에 의하여 빛이 가려 있었다. 혜능의 『단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여 구산선문 전체를 아우르고자 하는 지눌의 의지를 『수심결』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조계종’이란 말은 지눌 이전에도 보이지만 지눌에 의하여 확고하게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사진 3. 규봉종밀의 초상.

 

돈오점수의 주창자는 규봉종밀이다. 종밀은 살아생전 화엄종과 하택종의 종주宗主였다. 회창법난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종밀의 사상은 중국의 선사상은 물론 중국불교사상 전체를 석권하였을 것이다. 회창법난 이후 신회와 종밀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마조와 석두의 제자들에 의하여 혜능의 남종선은 중국 불교계의 중심이자 선종의 정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회창법난과 이후 마조와 석두의 제자들에 의하여 남종선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남종선의 선풍이 이 땅에 전해져서 구산선문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오대 북송 및 남송으로 이어진 중국 불교계의 상황과 고려 불교계의 상황은 사뭇 다르게 전개되었다. 

 

법안종의 유입과 천태종의 개창을 통하여 약화되었던 구산선문 세력이 다시 고려불교의 중심 세력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문벌귀족 세력이 몰락하고 무신 세력이 집권한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사굴산문의 선승인 지눌의 등장 때문이다. 지눌의 선사상 형성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종밀과 더불어 영명연수이다. 지눌이 주창한 ‘돈오점수와 선교일치’가 종밀의 영향이라면 ‘수심결’이란 제목은 연수의 저서 ‘유심결’의 영향이라 추측된다. 그럼에도 김군수가 지눌의 비문에서 종밀과 연수를 언급하지 않은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수심결修心訣’이란 제목은 ‘마음 닦는 비결’이란 뜻이다. 선사상의 두 축은 ‘깨침[悟]’과 ‘닦음[修]’이다. 혜능의 『단경』이 ‘깨침’의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면, 지눌의 『수심결』은 ‘닦음’의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지눌의 돈오점수는 ‘깨침’ 이후의 닦음이자, ‘깨침’에 입각한 닦음이다. 그러기에 지눌의 점수는 ‘무단지단無斷之斷·수이무수修而無修’로서 혜능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닦음의 출발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점은 중요하다. 지눌은 이를 ‘돈오’에 두었고 그 사상적 근거를 혜능의 『단경』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러한 돈오를 구체적인 일상 속에 투영하여 앎과 행이 일치되는 삶을 구현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지눌은 ‘점수’에 주목하였다.

 

화엄교학에 대한 도전

 

원효와 더불어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사상가로서 지눌이 가지는 위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선사로서 화엄 교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이라는 명저를 남긴 데에 있다고 본다.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의 교정을 화엄종 승통 수기守其가 맡았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눌 당시 불교계는 사상적으로 화엄 교학이 주도하였다. 약세에 있던 선종의 승려로서 선과 화엄이 사상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고, 이어 실천적인 면에서 간화선의 실효성과 우월성을 주장함으로써 화엄종의 승려들을 설득시키고자 하는 것이 지눌의 전략이었다.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은 지눌의 사후 한참이 지나 혜심이 작은 상자에서 발견하여 공개하였으며, 사후 5년 후인 1215년 5월에 두 책을 묶어 홍주거사洪州居士 이극재李克材의 보시로 간행하였다. 혜심은 이 책의 발문跋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슬프다! 근래에 불법의 쇠퇴가 심하여 간혹 선禪을 종으로 삼는 이는 교敎를 배척하고, 간혹 교를 숭상하는 이는 선을 비방한다. 이들은 둘 다 ‘선은 곧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곧 부처의 말씀이며, 교는 선의 그물[網]이 되고 선은 교의 벼리[綱]가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선과 교는 서로 원수와 같이 견해를 지어서 법法과 의義의 두 배움을 도리어 모순의 가르침으로 여기고 있다. 끝내는 다툼이 없는 세계[無諍門]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의 실다운 도를 밟지 못한다. 이점을 선사(지눌)는 애석하게 생각하여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을 저술한 것이다.(주2)

 

사진 4. 예천 학가산 보문사 극락전.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위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며, 교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궁극적인 세계에서는 다르지 않음을 밝히기 위해 지눌이 두 저술을 지었다고 혜심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선에 대한 화엄종 승려들의 인식이 잘못되었다’라는 점을 비판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지눌이 작심하고 화엄 교학에 대한 도전장을 낸 것이다. 

 

‘화엄’과 관련한 두 번의 깨달음

 

법장과 징관에 의하여 정립된 화엄의 교판론에 의하면 선은 돈교에 화엄은 원교에 해당한다. 사법계관四法界觀으로 보면 선은 이법계나 이사무애법계에 해당하지만 화엄은 사사무애법계에 해당한다. 지눌 당시 화엄종 승려들은 이러한 교판론에 근거하여 ‘선은 화엄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생각하였다. 1185년 지눌은 학가산 보문사에 머물며 『화엄경』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였고 마침내 『화엄경』 「출현품出現品」에 이르러서, 한 티끌이 대천의 경전을 머금고 있다는 비유를 거명한 다음에 “여래의 지혜 또한 이와 같아서, 중생의 몸 가운데 구족되어 있으나 이것을 어리석은 중생들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라는 구절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이는 선에서 말하는 자심과 화엄의 부동지불이 다르지 않다는 확신이었다. 이에 지눌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마음을 닦는 사람은 먼저 조사祖師의 도로써 자기 마음의 본래 묘함을 알아서 문자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논서論書로써 마음의 바탕과 작용을 분별하여야 한다. 이 법계의 성상性相은 사사무애의 덕이며 지혜와 자비가 동체인 공덕으로 서로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주3)

 

사진 5. 대혜가 말년에 머물렀던 항주 경산사 전경.

 

지눌은 화엄과 선이 근원적으로 일치한다는 이론적 근거를 『화엄경』을 통하여 확인하였고, 이통현의 『신화엄론』을 통하여 자신의 화엄에 대한 견해가 바르다는 점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것이 화엄에 관한 첫 번째 깨달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지눌은 이후 10년 동안 분별하는 생각[情見]이 없어지지 않고 마음속에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어 마치 원수와 함께 지내는 것 같았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지적 이해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선禪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또한 소란한 곳에 있지도 않다.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에 있지도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라는 대혜의 말에서 지눌은 마지막 깨달음을 얻었다. 이는 화엄의 관법으로는 지적 이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자각으로 이것이 화엄에 관한 두 번째 깨달음이다.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에서 지눌은 화엄과 선의 동질성과 화엄에 대한 선의 실천적 우위성을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다루기로 한다. 

 

<각주>

(주1) 金君綏撰, 「佛日普照國師碑銘」, “其勸人誦持常以金剛經 立法演義則意必六祖壇經 申以華嚴李論大慧語錄相羽翼.”

(주2) 慧諶, 「圓頓成佛論 看話決疑論 合干跋文」, “噫. 近古已來 佛法衰廢之甚 或宗禪而斥敎 或崇敎而毁禪 殊不知禪是佛心 敎是佛語 敎爲禪網 禪是敎網. 遂乃禪敎兩家 永作怨讎之見 法義二學 返爲矛楯之宗 終不入無諍門 履一實道. 所以 先師哀之 乃著圓頓成佛論 看話決疑論.”

(주3) 知訥, 「華嚴論節要序」, “余謂修心之士 先以祖道 知自心本妙 不拘文字 次以論文 辯心之體用 是法界性相 則事事無碍之德 同體智悲之功 不爲分外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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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전북대 철학과 학부, 석사 졸업, 원광대 박사 졸업. 중국 북경대, 절강대, 연변대 방문학자. 한국선학회장과 보조사상연구원장 역임. 『보조지눌의 사상과 영향』, 『언어, 진실을 전달하는가 왜곡하는가』(공저)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brkim1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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