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당하즉시와 본래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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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5 년 3 월 [통권 제143호] / / 작성일25-03-08 22:11 / 조회38회 / 댓글0건본문
중국선 이야기 48_ 운문종 ❸
운문종은 후기 조사선 오가五家 가운데 네 번째로 출현하였으며, 오가는 모두 육조혜능을 계승했다고 표방하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운문종의 선사상은 『육조단경』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조사선의 사상인 당하즉시當下卽是와 본래현성本來現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이는 남종선南宗禪에 해당하는 남악계南岳系의 위앙종潙仰宗과 임제종臨濟宗, 그리고 청원계靑原系의 조동종曹洞宗 등 운문종 이전에 설립한 모든 조사선의 근본적인 선리禪理이다.
그런데 당하즉시와 본래현성은 역시 『육조단경』에서 극도로 강조하는 돈오頓悟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돈오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당하즉시나 본래현성은 어떠한 의미도 없는 쓸데없는 명언名言에 지나지 않음을 조사들은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가에 속한 선사들의 어록에는 돈오를 극히 아껴서 언급하고, 특히 『임제어록』에서는 아예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단경』에서나 남종선南宗禪에 속한 선사들이 돈오를 강조한 일과는 상당히 차별되는 점이다.

그렇다면 조사선의 오가에서는 더는 돈오를 중시하지 않는 것인가? 중국불교나 선과 관련된 문헌을 보면 그 이전 시대에 확고하게 논증된 어떤 도리나 명제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관행이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임제종과 같은 오가에서 돈오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를 중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선리에 대한 오득悟得에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으로 삼았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운문광록』 첫 구절에 보이는 문언의 선사상
문언의 어록인 『운문광록』 상권의 첫 번째 항목으로 실린 「대기對機」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대체로 도道를 제창하는 ‘기틀[機]’을 설명하는 것은 실로 조화롭게 나누어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만약 구句에서 기틀을 드러낸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하물며 계속 논쟁한다고 해도 어떤 이로움이 있겠는가? …… 만약 납승(운문)의 문하에서라면 말 속에서 기틀을 드러낸다 해도 부질없이 알음알이를 내는 것이며, 문을 두드리는 방법도 천차만별이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머뭇거린다면, 남의 혀끝으로 풀어낸 말이나 찾게 될 것이다.
다만 너희들에게 묻겠으니, 예로부터 무슨 일이 있었으며,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너희들에게 아무 일이 없음[無事]을 말하는 것은 이미 서로를 매몰埋沒시키는 것이다. 반드시 이 경지[田地]에 도달해야 비로소 얻을 것이다. 또한 입으로만 떠들며 어지럽게 묻지 말라. 자기自己의 마음속이 어둡고 더디더라도 내일 아침이나 다음 날에는 커다란 일이 있을 것이다. 네가 만약 육근六根으로 헤아리고 망설이며 나아가지 못한다면, 또한 고인古人이 건립하여 교화한 문정門庭을 찾아 이쪽저쪽을 살펴보면서도 “이것이 도대체 어떤 도리道理인가?”라고 고민할 것이다.
네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가? 이는 모두 한량없는 겁 동안 너 자신이 익혀 온 짙고 두터운 망상妄想에 반연攀緣하여 한 번이라도 남의 말을 듣게 되면 곧 의심疑心을 일으킨다. 부처와 법을 묻고, 향상向上과 향하向下를 물으며 이해하려고 찾아 헤매지만, 더더욱 멀어질 뿐이다. 의심하면 바로 어긋남[擬心即差]인데, 하물며 다시 “의심하지 않으면 옳은 것인가?”라고 말하지 말라. 다시 어떤 일이 있겠는가! 몸과 마음을 아끼도록 하라.(주1)
비록 장문을 인용했지만, 이는 『운문광록』의 첫 구절이기 때문에 편찬자가 상당히 신중하게 편집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실제로도 문언의 선사상을 개괄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이를 상세히 분석하자면 의외로 복잡한 선리가 숨어져 있지만, 최대한 핵심적으로 간결하게 논하고자 한다.

우선 문언이 말한 ‘도를 제창하는 기틀[唱道之機]’은 위앙종이나 임제종에서 강조하는 ‘대기大機’ 혹은 ‘전기全機’와는 다르게 다양한 기틀을 인정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임제종의 종풍을 흔히 ‘대기대용大機大用’(주2) 혹은 ‘전기대용全機大用’(주3) 으로 규정하지만, 문언은 그와는 다르게 “그것은 여전히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하여 기機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는 표현들이 많이 보인다. 그 때문에 「대기」의 항목에 3백 20칙을 열거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구句에서 기틀을 드러냄”을 언급하는데, 이는 명백하게 임제삼구臨濟三句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뒤에 다시 논하겠지만, 문언도 이른바 운문삼구雲門三句를 제시하고 있는 점으로부터 문언은 임제종을 의식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무사無事를 말하면 서로를 매몰시킴
둘째, “너희들에게 아무 일이 없음[無事]을 말하는 것은 이미 서로를 매몰埋沒시키는 것이다. 반드시 이 경지[田地]에 도달해야 비로소 얻을 것이다.”라는 말로부터 문언은 ‘무사無事’를 상당히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사’를 언급함은 서로를 망치는 것임을 경계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로부터 비로소 궁극적인 선리를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무사는 사실상 거의 모든 선사가 강조하는 바이지만, 임제의 스승인 황벽黃檗의 『전심법요傳心法要』에서는 선리를 깨달은 도인을 ‘무사인無事人’(주4) 이라고 칭하며, 『임제어록』에서도 “대장부라면 오늘 본래 아무 일이 없음[本來無事]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만 너희들이 믿음이 부족하여 염념念念에 치달려 구하면서 (자기의) 머리를 버리고 (또 다른) 머리를 찾으며, 스스로 쉬지 못할 것이다.”(주5) 라고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임제어록』에서는 이 ‘무사’를 최소한 40차례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무사는 당연히 돈오 이후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문언도 돈오를 궁극적 선리를 얻는 기본적인 출발점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문언의 『운문광록』 중권에서 “깨달음이 곧 불성佛性이니, 이를 무사인無事人이라 부른다. 그러나 반드시 향상일규向上一竅[向上一路와 같은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주6) 라고 설하는 바와 같다. 여기에서 문언은 앞에서 언급한 황벽의 무사인을 언급하는데, 돈오를 이룬 이른바 무사인으로부터 더욱더 나아가는 향상일로를 조사선의 핵심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의심하면 바로 어그러짐
셋째, 위의 글에서 끝부분에 문언이 강조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의심하면 바로 어긋남[擬心即差]”이다. 의심즉차, 즉 마음을 일으킨다면 바로 어그러진다는 말도 조사선에 속하는 선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 의심즉차를 가장 핵심적으로 사용한 용례는 바로 황벽의 『전심법요傳心法要』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모든 부처와 보살, 그리고 모든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중생들은 동일한 대열반大涅槃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 이 성품이 바로 마음이며,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부처가 바로 법이다. 한 생각이라도 진리에서 벗어나면 모두 망상妄想이 되니, 마음으로 다시 마음을 구하려 해서는 안 되고, 부처로 다시 부처를 구하려 해서는 안 되며, 법으로 다시 법을 구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는 곧바로 무심無心으로 묵계默契해야 하니, 의심하면 바로 어긋남[擬心即差]이다.(주7)
이는 남종선의 불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 때문에 상당히 잘 알려진 구절이다. 당연히 황벽을 계승한 임제의현도 “학인이 만약 눈을 깜박여도 바로 교섭交涉이 사라지니, ‘의심하면 바로 어긋나고[擬心即差]’,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어그러진다. 이 뜻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눈앞을 떠나지 않는다.”(주8) 라고 언급하고 있다. 의현은 조금의 인위적인 행위나 마음이 일어난다면 진리의 당체當體, 임제의 용어로는 대기大機와의 교섭이 사라짐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를 명확하게 깨달은 이는 당하즉시와 본래현성을 실현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부터 보자면, 문언이 ‘의심즉차’를 강조하는 것은 황벽-임제로 이어지는 남악계의 사상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문언이 깨달음을 얻게 한 스승 목주도종睦州道踪, 즉 진존숙陳尊宿은 바로 황벽의 제자이다. 그러나 문언은 의심즉차에 머물지 않고 다시 “의심하지 않으면 옳은 것인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이는 의심하지 않음도 역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무사를 언급함이 서로를 매몰시킨다는 지적과 유사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입장에서 무심無心이 제창되지만, 사실상 무심도 그에 천착한다면 결코 무심일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을 일으켜도 안 되고, 일으키지 않아도 안 되니, 참으로 어려운 길이다.
『운문광록』에 의심즉차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문답이 실려 있다.
문: 옛 성현의 말씀에 ‘마음을 내려고 하면 곧 어긋난다[擬心即差]’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어긋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답: 큰 기틀[洪機]은 손바닥을 지나간다.
문: 후인들이 다시 묻는다면 어떻게 답해야 합니까?
답: 느린 바람은 쉽게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주9)
이러한 문답은 문언의 가풍을 보여준다. 앞에서 언급한 일자관一字關과 같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함이 아니라 그 질문 자체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이끄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물론 위의 문답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문언이 이처럼 ‘의심즉차’를 제창하고 있으며, 이를 자신의 선리禪理에 가장 근본으로 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의심즉차를 바탕으로 하여 문언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내가 너에게 말하니, 직하直下에 어떤 일이 있다고 한다면, 일찍이 서로 매몰시키는 것이다. 네가 만약 실다운 입두처入頭處가 아직 없다면, 또한 그런 가운데에서 혼자 스스로 자세히 참하라. 옷 입고 밥 먹고 똥 싸고 오줌 누는 것 외에, 다시 어떤 일이 있겠는가? 이유 없이 수많은 망상 같은 것을 일으켜 무엇을 하겠는가?(주10)
여기에서 말하는 ‘직하’는 바로 ‘지금 이 자리’라는 ‘당하當下’와 통하는 말이고, 거기서 아무 일도 없음[無事]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니, 결국 당하즉시를 의미한다. 또 ‘입두처’는 입문처入門處와 같은 의미로 아직 애매한 가운데 “스스로 자세히 참하면” 그를 실현한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문언은 “하물며 너희들은 각자 당인當人으로 일단사一段事가 있어 대용大用이 현전現前하니, 다시 네 한 톨의 기력도 번잡스럽게 하지 않으면 바로 조불祖佛과 함께 차별이 없음이다.”(주11) 라고 설한다. 여기에서 ‘당인’은 임제의 ‘대장부’와 유사한 개념이고, ‘일단사’는 바로 ‘대기大機’로 이해할 수 있으니, 이는 명확하게 임제의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다른 표현으로 쓴 것이라 추정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로부터 문언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화상和尙들아! 너희들은 망상妄想하지 말라.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 승僧은 승이고, 속俗은 속이다.(주12)
이 구절은 황벽의 『완릉록宛陵錄』에 나오는 내용 즉,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움직임과 고요함, 모든 소리와 색깔이 모두 불사佛事이다. 어디에서 부처를 찾는가? 머리 위에 또 다른 머리를 얹고, 입 위에 또 다른 입을 더하지 말라. 다만 다른 견해를 내지 말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승은 승이고, 속은 속이다.”(주13) 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특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라는 구절은 후대에 수많은 선사의 어록에 등장한다.
이상으로 『운문광록』의 첫 구절로부터 문언의 대체적인 선사상을 고찰하였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문언의 선사상은 자신의 법계인 청원계보다는 남악계의 황벽-임제 계통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한 까닭은 문언이 황벽의 제자인 목주도종에게서 깨달음을 얻었던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에 이어서 문언의 가장 유명한 운문삼구를 고찰하고자 한다.
<각주>
(주1) [宋]守堅集, 『雲門匡眞禪師廣錄』 卷上(大正藏47, 545a), “夫唱道之機, 固難諧剖. 若也一言相契, 猶是多途. 況復刀刀, 有何所益? …… 若向衲僧門下, 句裏呈機, 徒勞佇思, 門庭敲磕千差萬別. 擬欲進步向前過在, 尋他舌頭布路. 且問汝諸人. 從來有什麼事, 欠少什麼? 向汝道無事, 已是相埋沒也. 須到者箇田地始得. 亦莫趁口亂問. 自己心裏黑漫漫地, 明朝後日大有事在. 爾若根思遲迴, 且向古人建化門庭, 東覷西覷看, 是什麼道理? 爾欲得會麼? 都緣是汝自家無量劫來妄想濃厚, 一期聞人說著, 便生疑心. 問佛問法, 問向上問向下, 求覓解會, 轉沒交涉. 擬心即差, 況復有言莫是不擬心是麼? 更有什麼事! 珍重.”
(주2) [唐]慧然集,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序”(大正藏47, 495a), “臨濟祖師以正法眼明涅槃心, 興大智大慈, 運大機大用.”
(주3) [淸]性統編, 『五家宗旨纂要』 卷上(卍續藏65, 255c), “臨濟家風, 全機大用, 棒喝齊施, 虎驟龍奔, 星馳電掣.
(주4) [唐]裴休集, 『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大正藏48, 383b), “上堂云: 百種多知, 不如無求, 最第一也. 道人是無事人. 實無許多般心, 亦無道理可說, 無事散去.”
(주5) [唐]慧然集, 『鎮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498b), “大丈夫兒, 今日方知本來無事. 祇爲儞信不及, 念念馳求, 捨頭覓頭, 自不能歇.”
(주6) [宋]守堅集, 『雲門匡眞禪師廣錄』 卷中(大正藏47, 559b), “覺即佛性矣, 喚作無事人. 更須知有向上一竅在.”
(주7) [唐]裴休集, 『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大正藏48, 381b), “諸佛菩薩與一切蠢動衆生同大涅槃性, 性即是心, 心即是佛, 佛即是法. 一念離眞皆爲妄想, 不可以心更求於心, 不可以佛更求於佛, 不可以法更求於法, 故修道人直下無心默契, 擬心即差.”
(주8) [唐]慧然集, 『鎮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501b), “學人若眼定動, 即沒交涉, 擬心即差, 動念即乖. 有人解者, 不離目前.
(주9) [宋]守堅集, 『雲門匡眞禪師廣錄』 卷上(大正藏47, 550b), “問: 承古有言, 擬心即差, 如何得不差? 師云: 洪機歷掌. 進云: 後人再問作麼生? 師云: 遲風難改.”
(주10) 앞의 책(大正藏47, 548b), “我向汝道, 直下有什麽事, 早是相埋沒了也. 爾若實未得箇入頭處, 且中私獨自參詳. 除却著衣吃飯, 屙屎送尿, 更有什麽事? 無端起得如許多般妄想作甚麽?
(주11) 앞의 책(大正藏47, 546c), “況汝等且各各當人, 有一段事, 大用現前, 更不煩汝一毫頭氣力, 便與祖佛無別.”
(주12) 앞의 책(大正藏47, 547c), “諸和尚! 子莫妄想, 天是天, 地是地, 山是山, 水是水, 僧是僧, 俗是俗.”
(주13) [唐]裴休集, 『黃檗斷際禪師宛陵錄』(大正藏48, 385c) “語默動靜一切聲色, 盡是佛事. 何處覓佛? 不可更頭上安頭嘴上加嘴, 但莫生異見. 山是山, 水是水, 僧是僧, 俗是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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