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문학의 거봉 고칸 시렌과 『원형석서』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최신호 기사

월간고경

[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오산문학의 거봉 고칸 시렌과 『원형석서』


페이지 정보

원영상  /  2025 년 3 월 [통권 제143호]  /     /  작성일25-03-08 21:52  /   조회25회  /   댓글0건

본문

일본선 이야기 15

 

선과 문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내세우는 선사들의 언어는 빼어난 문학적 예술과 다름이 없다. 언어를 통해 언어를 초월한다는 생각은 결국 언어의 극치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일까. 상징과 비유가 중심인 문학은 선어의 성격과도 닮았다. 따라서 그 둘을 나눈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일본의 오산五山문학이 이를 잘 보여준다. 가마쿠라 후기에서 무로마치기, 즉 13세기 말에서 16세기 후반에 걸쳐 교토와 가마쿠라의 오산을 중심으로 행해진 승려의 한문학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 선문학의 요람인 오산문학

 

오산은 초기에 건장사·원각사·동복사·정지사·정묘사가 지정되었다. 이후 교토와 가마쿠라에 각각의 오산이 성립되었다. 사찰통제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후대에 문화의 중심지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기 선승에 의해 출간된 출판물을 오산판五山版이라고 하여 권위를 갖게 되었다. 주로 송원宋元의 복각판에다 일본 선승들의 저작도 들어 있다.

 

사진 1. 일산일녕의 좌상. 남선원南禪院 소장.

 

송으로부터 명에 걸친 중국 선문학의 역사를 가진 오산문학이 일본에도 전해진 것은 일산일녕一山一寧과 같은 중국 선승들에 의해서다. 북송시대에 과거에 낙방한 승려들이 46변려체의 시문을 선림에 전하고, 상류층과의 교류에 활용했다. 

 

일본에서는 동복사에 중국 전통이 전해지고 이후 오산을 통해 활발해졌다. 그 주역들은 고칸 시렌虎關師鍊(1278〜1346), 추간 엔게츠中巖圓月(1300〜1375), 기도 슈신義堂周信(1325〜1388), 젯카이 추신絶海中津(1334〜1405) 등이다. 이들은 시문, 일기, 수필, 논설 등을 통해 불법의 세계와 세속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물론 외교에도 시문에 능한 승려들이 등장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고칸 시렌과 『원형석서』

 

초기 오산문학의 대표 인물은 고칸 시렌이다. 그는 엔니 벤넨을 파조로 하는 쇼이치파聖一派에 속했다. 어린 나이에 천태종의 본산 히에이산에서 수계를 받고, 여러 선사들의 문하에서 수행했다. 인화사仁和寺와 제호사醍醐寺에서도 밀교를 배웠다. 1308년에 가마쿠라의 건장사에 주석하던 일산일녕一山一寧을 참알했다. 일산은 원나라에서 도일한 임제종 승려로 처음에는 막부로부터 순수선 전도의 마음을 의심받았지만, 후에 명망이 높아지자 의심이 풀리고 건장사 주지로 임명되었다. 

 

사진 2. 고칸 시렌의 상. 해장원海蔵院 소장.

 

고칸의 시대는 원나라의 침략,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무로마치 막부의 등장, 남북조의 대두 등 일본사 내에서도 가장 격동의 시기였다. 국가의 자의식이 필요한 때이기도 했다. 고칸은 당시 요동치는 사회 상황에서도 동아시아의 불교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문답 중 일산은 고칸에게 “중국 고승들의 사적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나라 승려들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라는 힐난을 듣고 발분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일본 최초의 불교사로 부르는 『원형석서元亨釋書』(1322년)다. 

 

이 책은 전 30권으로 전傳·자치표資治表·지志의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전은 전지傳智·혜해慧解·정선浄禪·감진感進·인행忍行·명계明戒·단흥檀興·방응方應·역유力遊·원잡願雑의 10항목으로 이뤄져 있으며, 전의 마지막에는 찬과 논을 붙이고 있다. 자치표는 불교사의 대강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의 지는 학수學修·도수度受·제종諸宗·회의會儀·봉직封職·사상寺像·음예音藝·습이拾異·출쟁黜争·서설序説의 10항목이다. 전체에 등장하는 인물은 437명이다. 중국의 『고승전』, 『속고승전』, 『송고승전』에는 역경이 처음에 등장하지만 고칸은 일본의 경우에는 생략했다. 역경의 과정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진 3. 원형석서 1624년 판. 산세이山星서점 소장.

 

무엇보다도 일본불교의 전파를 선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권1 전지의 첫 인물을 ‘남천축의 보리달마’로 삼고, 이어 고려의 혜관, 오나라의 지장, 원흥사의 도쇼 순으로 전개하고 있다. 달마의 전에서는 고대 일본불교를 부흥시킨 쇼토쿠聖德 태자와의 관련 설화를 연계시키고 있다. 달마가 인도로 돌아간 뒤, 86년이 지난 604년에 일본으로 왔다는 것이다.

 

태자가 하루는 거리를 걷다가 길가에 누워 있는 거지를 보았다. 노래를 지어 어디에서 왔는가 물었는데 그가 노래로 응답했다. 음식과 옷도 벗어주고 편안히 지내도록 하고 궁궐에 돌아왔는데 시자가 돌아와 그가 죽었다고 보고했다. 장사를 지내주고, 태자는 그가 필시 진인일 것이라고 하며, 무덤을 파보게 하니 태자가 하사한 옷만 관 위에 있고 몸은 없었다. 고칸은 이 이야기가 중국의 여러 고승전에도 나온다고 했다. 이 설화의 근간은 『일본서기』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 걸인이 달마라고 지칭하지 않고 있다. 고칸은 이후 심종心宗, 즉 선종이 발흥하고, 조사선의 선풍이 크게 일어났다고 한다.

 

사진 4. 쇼토쿠 태자 좌상. 나라奈良국립박물관 소장.

 

나아가서는 양기파에 속한 쇼이치파의 벤넨에 대해서도 권7 정전에서 지면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묘안 에사이는 황룡파를 이끌었지만 길을 연 것뿐이며, 양기파의 난계도륭 또한 임금이 계신 도성까지는 전해지지 못했다고 한다. 찬에서는 “외부의 업신여김을 막고 올바른 종지를 세웠으며, 교학의 벼리를 정돈하고 선의 벼리를 높이 들었으니, 조사의 도가 때를 얻은 것”(정천구 역, 이하 동일)이라고 한다. 벤넨에 이르러 임제의 순수선이 일본에 뿌리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논에서는 여러 변론이 이뤄지고 있는데, 특히 임제·위앙종과 양기·황룡파의 성쇠도 논하고 있다.

 

『원형석서』에 나타난 한반도 관련 기술

 

그렇다면 『원형석서』에 한반도 관련 인물들은 얼마나 기록되어 있을까. 약 70명이 등재되어 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고구려의 혜관 스님이다. 수나라에서 삼론학을 배웠으며, 625년 도일했다. 기우제를 지내 큰비가 내려 일왕이 기뻐했다고 한다. 신라의 의림, 심상, 백제의 의각, 도녕 등과 같은 삼국의 승려들이 기록되어 있다.

 

쇼토쿠 태자의 스승인 혜자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히 전하고 있다. 일본 최초의 승정제도를 두어 백제의 관륵이 임명된 사실도 있다. 고칸은 “담징과 혜자는 불도가 깊은 사람이니 이 나라의 가섭마등이고 축법란이다.”라고 칭송한다. 중인도 출신의 가섭마등과 축법란은 후한시대에 중국에 불법을 전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칸은 중국불교사에도 매우 밝았음을 알 수 있다. 

 

사진 5. 『원형석서』의 내용. 교토 붓교佛敎대학 소장.

 

삼국에 불법을 구하러 건너간 승려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교젠行善 스님은 고구려에 구법하고 718년에 귀국했다. 그가 고구려에 체류할 때, 홍수를 만났다. 다리가 끊어지고 배도 없었는데 일심으로 관음보살의 명호를 염했다. 어떤 노인이 배를 가지고 와서 스님을 태워 건네주었다. 노인과 배가 사라지고 나자 그가 관자재보살임을 알았다. 그 보살상을 조각하여 조석으로 예불하고 일본으로 가져와 흥복사에 안치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백제 성명왕이 불법을 전한 일은 『일본서기』에 나오는데 아마도 그것을 전거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입장에서 성명왕이 승려들과 석가불 동상과 경론, 그리고 번개 등의 물품을 보내 일왕에게 표를 올렸다고 한다. “이 불법은 여러 가르침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이해하기도 힘들고 입문하기도 힘들어 주공이나 공자도 일찍이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법은 무량무변한 복덕과 과보를 일으키고 결국 무상보리를 이루게 할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여의주를 품으면 원하는 바가 뜻대로 되어 결핍된 바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일본이 불법을 받아들일 것을 권하고 있다. 이후 찬불파와 배불파의 역사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원형석서』의 일본 정신세계

 

『원형석서』는 국수적인 입장에서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시기 민족주의가 횡행할 때 조명되기도 했다. 원잡은 주로 불법에 조예가 깊거나 외호자였던 왕이나 신하의 전기다. 마지막 부분은 가마쿠라의 실권자였던 호조 도끼요리北条時頼에 관한 것이다. 선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때, 군사 및 정치적 권력을 잡은 호조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논에서는 일본국이야말로 타국에 비해 뛰어난 나라라고 한다.

 

일본이 자연에 뿌리박은 나라인 것은 신경神鏡·신검神劍·신새神璽의 3종의 신기神器 때문이다. “저 중국은 큰 나라라 일컬어지고 토지가 광대함에도 천명을 나타내는 신표는 모두 사람이 만든 것이고 하늘이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비록 작지만 터를 닦고 기물을 전한 것은 신령神靈이다.”라고 한다. 고칸의 이러한 신국神國 사상은 대승大乘의 나라, 염부제에서 지극하게 다스려지는 일본에서 불법이 번영하는 이미 튼튼한 기반이 있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사진 6. 천만대자재천이 모셔진 교토의 기타노텐만궁北野天滿宮.

 

전의 마지막인 원잡은 고덕高德·왕신王臣·사서士庶·비구니(尼女)·신선神仙·영괴靈怪의 6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중에 신선은 백산명신白山明神·단생명신丹生明神·신라명신新羅明神·천만대자재천天満大自在天神 등 신화나 신사, 영장이나 설화와 관련된 사항을 넣었다는 점이 재미있다. 신라명신의 경우, 엔친圓珍 스님이 당으로부터 귀국할 때 탑승선에 출현하여 자신이 신라국의 신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다. 귀국해서도 이 신은 스님을 돕는다. 아마도 산동성의 신라방과 관계가 있거나 한반도에서 도래한 신이 아닌가라고 보고 있다. 

 

천만대자재천은 고대 후기의 충신이었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신격화한 것으로 학문의 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입시나 입사 시험이 있는 시기에는 이 신을 모신 신사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 신격은 대자재천이나 대위덕명왕이 일본 신사의 주신으로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신불습합의 전형적인 예인 것이다. 신불습합은 불교 전래 초기부터 지금까지도 전개되고 있는 신의 세계와 불법과의 긴밀한 관계를 잘 드러내는 것으로 일본 정신사의 큰 흐름을 지니고 있다.

 

종교 문화사적인 높은 가치

 

『원형석서』는 일본불교사로서의 위상만이 아니라 중세 일본 종교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불교 유통 과정이나 불교의 토착화, 불교문화의 창안이나 계승, 중세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삼국유사』와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칸은 이외에도 어록인 『고칸화상 십선지록虎關和尚十禪支録』, 시문집인 『제북집濟北集』, 『능가경』의 주석인 『불어심론佛語心論』, 46문 작법을 설한 『선의외문집禪儀外文集』, 일본 최초의 운서韻書인 『취분운략聚分韻略』, 보살계의 수계의궤인 『선계궤禪戒軌』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무엇보다도 계는 불도 수행의 기초라고 보았다. 그리고 선계의 내용을 범망계에 두었다. 일본불교 또한 보살계, 대승계를 통해 대승불교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본불교가 끊임없이 대승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고칸이 만년에 지은 『정수론正修論』에서는 평실선平實禪·묵조선黙照禪·갈등선葛藤禪·돈교선頓教禪이라는 네 가지 선풍을 사선邪禪이라고 비판한다. 그중에 갈등선에 대한 비판은 지혜의 종이라고 부르는 하택종에 대해 안이하게 문자에 의존하는 폐풍을 지적하고 있다. 중세의 선림에 종밀사상의 영향이 큰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선풍을 예리하게 주시하는 동시에 내면에서도 문자의 한계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내외로 갈등의 시대를 보낸 고칸에 의해 살아 있는 불교의 역사를 손안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깊은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원영상
원불교 교무, 법명 익선. 일본 교토 불교대학 석사, 문학박사. 한국불교학회 전부회장, 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원광대학교 일본어교육과 조교수. 저서로 『아시아불교 전통의 계승과 전환』(공저), 『佛教大学国際学術研究叢書: 仏教と社会』(공저)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일본불교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 교훈」 등이 있다. 현재 일본불교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wonyosa@naver.com
원영상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