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불교를 만들어 낸 불교의 바닷길 ]
불교전파의 중간 거점 스리비자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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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 2025 년 2 월 [통권 제142호] / / 작성일25-02-04 11:40 / 조회42회 / 댓글0건본문
많은 이들이 부다가야, 룸비니 등 불적지 성지순례를 떠난다. 그러나 스리비자야 왕국(659∼1377)의 터전을 찾는 이들은 전혀 없다. 그러나 스리비자야야말로 불교사에서 중요한 섬 불교의 상징처였다. 잊힌 왕국이 되고 말았으며, 오늘날 인도네시아가 이슬람국가가 되면서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기억에서 사라진 공간이 되어 버렸다.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불자들과 함께 반드시 방문하고픈 중요한 불적지이다.
큰 바다를 뜻하는 수마트라
스리비자야 왕국의 성립은 항해술의 일정한 발전, 조선술의 양적 팽창에 따른 거대 상선과 해군의 증강, 해양을 통한 물류의 수요와 공급 증대 등 해양 실크로드 발전의 제 조건이 섬으로 이동하게끔 충족되어진 결과이다. 현재는 모조리 이슬람국가로 변신하였지만 본디 거대한 불교왕국이 남방 해역에 존재했다.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가 이슬람화하면서 방글라데시-미얀마-말레이반도-인도네시아-태국-베트남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불교문명 선이 끊어지고 일부만 남게 된 것이다.
스리비자야, 혹은 스리위자야라 부르고, 중국 문헌에서는 삼불제三佛齊라 부르는 불교왕국은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있었다. 섬에 있는 불교왕국으로는 스리랑카가 중요하지만 스리비자야는 ‘해상제국’이라 일컬을 정도로 그 영역과 힘이 남달랐다.
해상제국 스리비자야의 출현은 동남아시아 역사 및 해양 실크로드 문명사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말레이반도에서 명멸하던 많은 항시港市 국가들과 푸난[扶南] 등이 모두 육지부에 속해 있었다면, 비로소 섬에서 ‘섬제국’이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마트라는 원의 『도이지략島夷志略』에서는 ‘수문답랄須文答剌’로 표기하고 뇌자, 거친 강진, 학정鶴頂, 두석斗錫 등이 나는데 향·맛이 오래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원사』의 속목도랄速木都剌도 같은 섬을 말하며, 모두 음가가 ‘Sumatra’를 뜻하는 수무드라(Sumadra)에 해당한다. 수무드라는 ‘큰 바다’라는 뜻이다.
이들 명칭은 고스란히 조선에도 전해졌다. 조선 후기 최한기의 기록은 아마도 중국 문헌을 통하여 정보를 획득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는 『지구전요地球典要』 남양각도南洋各島에서 수마트라를 “소문답랍蘇門答臘. 섬 길이가 2천 리나 되고 가운데는 긴 산이 뻗어 있다. 종족은 말라유족이다.”라고 했다. 최한기의 기록에 소문답랍과 말라유족이 등장하는 것이다.
불교왕국 말라유와 삼불제의 공존
스리비자야는 오늘날 베트남 메콩강가의 푸난 몰락 이후에 본격 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수마트라의 해상세력으로 세력을 키워오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 느닷없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5세기 무렵, 칸톨리(Kantoli)는 스리비자야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칸톨리는 스리비자야와 말라유의 거점인 잠비와 팔렘방 사이에 위치하였다. 스리 바라나렌드란(Sri Varannarendran) 왕이 중국 남조의 유송(454∼464)에 사신을 보내고 있었다. 칸톨리는 수마트라 적도 우림의 아로마나 벤젠 같은 숲 생산물로 중국 시장의 수요에 응하면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6세기 중엽에 내리막길을 걷는데, 이 시점에 팔렘방에 거점을 둔 스리비자야가 제압한다.
스리비자야 이전에 수마트라에 먼저 등장한 말라유가 중요하다. 팔렘방에서 북쪽으로 300km 올라가면 무아라 잠비(Muara Jambi)가 나온다. 오늘날의 잠비시에서 26킬로미터 떨어진 수마트라에서 가장 큰 고고학 유적지이자 고대 힌두-불교 사원 단지가 남아 있는 좋은 예이다. 잠비는 말라유 왕국의 본거지이다.
말라유 왕국은 그간 스리비자야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독립왕국으로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팔렘방과 마찬가지로 강을 이용하여 내륙과 바다를 연결했으며, 팔렘방보다 북쪽에 위치하여 중국이나 믈라카 해협 무역로에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었다. 전형적 불교왕국으로 그 명성이 중국에 널리 알려져서 많은 구법승이 말라유에 들렀다.
중국 문헌에서 당 시기의 마라유摩羅遊(혹은 末羅瑜)와 몽골 시기의 몰랄유沒剌由 등은 모두 말레이어의 말라유(Malayu)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당이 성립된 이후에 수마트라에서 최초로 사신을 보낸 곳이 말라유다. 644년에 최초로 사신을 보냈으며, 200여 년 있다가 다시 853~871년에 잠비에서 사신을 보낸다.
당의 의정(635∼713)이 방문했을 당시, 말라유는 이미 7세기 말에 스리비자야에 복속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말라유는 853·871년에 사신을 보내어 자신들의 독립성을 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의정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奇歸內法傳』에서 “말라유주末羅遊州가 지금의 시리불서국”이라고 하였다. 의정은 695년에 팔렘방을 거쳐서 귀국하였으므로, 그의 기록은 이미 말라유가 스리비자야에 복속된 7세기 말의 상황을 말해 준다. 현장(602∼664)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서 왕이 후원하고 말라유국으로 가도록 호송해 주었다고 하였는데, 『도이지략』은 “지금은 실리불서로 바뀌었다.”고 첨언하였다.
의정은 『남해기귀내법전』에서 “남해의 여러 주에 십여 국이 있는데 오로지 근본설일체유부뿐이다. 정량부正量部가 때에 맞춰 최근에 들어왔는데 적은 수가 두 가지를 겸한다.”고 했다. 설일체유부(Sarva-stiva-da)의 율장과 그것에 따르는 수계 전통이 온전히 존재했다는 뜻이다. 학자들은 7세기 현장이 당시 천축승의 약 1/4이 정량부 승려였다는 추정을 자주 언급한다. 정량부가 가장 널리 퍼지고 대중적인 수계 전통이었음을 뜻한다.
현장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서 왕이 후원하고 말라유국으로 가도록 호송해 주었다고 하였다. 현장에 의하면 말라유를 거쳐간 승려들은 상민常愍·무행無行·혜명慧命 등이었다. 말라유에서 북상하여 말레이반도로 들어가고, 부장계곡 같은 항시국가를 거쳐서 벵골만 복판의 니코르바제도를 거치는 천축행 뱃길을 이용한 것이다.
구법승들이 필수코스로 들른 스리비자야
671년 당 의정(635~713년)은 인도 여정의 첫 기착지로 동남아 해안을 선택했다. 그가 탄 배는 중국과 인도 사이의 해협을 통치한 스리비자야 왕국에 도착했다. 250여 년 전 스리비자야에 불교가 없다고 비난했던 법현과 달리, 의정은 이 섬 왕국에 불교가 번성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법현과 의정의 기록으로 보아 동진과 당나라 시기 중간쯤에 불교가 전파된 것으로 확인된다.
중개무역으로 큰 돈을 벌어들이는 스리비자야 왕은 사원을 넉넉하게 후원했고, 승려들이 인도에 방문할 수 있도록 여비를 지원했다. 의정은 수마트라 중심지에 발달한 불교학에 깊이 감명받아 중국 승려에게 인도에 가기 전에 스리비자야에 들러 수학할 것을 권했다. 의정 자신도 스리비자야에서 수년간 머물렀다. 671년 인도로 가던 중 스리비자야에 6개월간 머물렀을 뿐 아니라, 685년에 다시 돌아와 685~695년에 걸쳐서 그곳에서 지냈다.
의정이 본 스리비자야는 거대한 정치적 변화를 겪은 후였다. 법현이 살던 시기에는 역내 항구 간 경쟁이 치열했으나, 7세기 말에는 한 항구가 다른 경쟁자를 모두 압도하고 스리비자야(대승리 또는 영광스러운 정복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 지명)라는 왕국을 형성한 상태였다. 왕국은 중국해 남단을 비롯한 인근 해협 연안, 즉 말레이반도, 수마트라, 칼리만탄, 자바 서부 등지에서 패권을 잡고 있었다. 스리비자야는 믈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까지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에 인도와 중국 사이의 모든 해로를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다. 의정은 이러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인도로 갔다.
스리비자야의 종교생활은 활기에 넘쳤다. 의정은 수천 명의 학생과 승려가 정진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에서 오는 수도승이 많았으며, 1011년에서 1023년 사이에 티베트 승려 아티사Atisa가 종교적 지식을 심화하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다. 멀리 나란다Nalanda 불교대학에 기숙사를 지어서 유학생을 배려했다. 나란다대학의 비문에 스리비자야의 지대한 공헌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스리비자야는 600여 년간 동남아 해상의 중간 거점에 거대한 해상제국으로 버티고 있으면서 동서 불교문명 교류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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