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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속의 불교 ]
석전 박한영과 서정주 그리고 ‘인연’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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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  2025 년 2 월 [통권 제142호]  /     /  작성일25-02-04 11:34  /   조회4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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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마재 마을의 절간 선운사의 중 백파한테 그의 친구 추사 김정희가 만년의 어느 날 찾아들었습니다.

종이쪽지에 적어온 ‘돌이마[石顚]’란 아호 하나를 백파에게 주면서, “누구 주고 시푼 사람 있으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파는 그의 생전 그것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아껴 혼자 지니고 있다가 이승을 뜰 때, “이것은 추사가 내게 맡겨 전하는 것이니 후세가 임자를 찾아서 주라.”는 유언으로 감싸서 남겨 놓았습니다.

 

그것이 이조가 끝나도록 절간 설합 속에서 묵어 오다가, 딱한 일본 식민지 시절에 박한영이라는 중을 만나서 비로소 전해졌는데, 석전 박한영은 그 아호를 받은 뒤에 30년간이나 이 나라 불교의 대종정 스님이 되었고, 또 불교의 한일합병도 영 못하게 막아냈습니다.

 

지금도 선운사 입구에 가면 보이는 추사가 글을 지어 쓴 백파의 비석에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말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추사가 준 아호 ‘석전’을 백파가 생전에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이 겨레의 미래영원에다 가만히 유언으로 싸서 전하는 것을 알고 추사도 “야! 단수 참 높구나!” 탄복한 것이겠지요.

- 서정주, 「추사와 백파와 석전」, 『질마재 신화』(일지사, 1975).

 

인용한 시는 백파스님과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를 통해 ‘석전石顚’이라는 호가 후대의 박한영스님에게 전해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신라의 내부’에서 불교적 은유법과 ‘인연’을 발견한 서정주에게 ‘인연’이 어떻게 문학적으로 수용되었고 미적 성취를 이루었는가 하는 점은 실제로 ‘석전 박한영’과의 인연에 대한 서정주의 ‘회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서정주는 ‘석전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시와 산문을 통해 여러 차례 썼고, 그 내용에 따르면 문학과의 인연, 등단, 중앙불교전문학교 입학 등과 관련된 모든 일이 석전스님과의 만남을 통해 펼쳐지고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한영과 미당의 만남

 

박한영스님은 만해 한용운과도 막역한 관계였고, 위당 정인보,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신석정, 김달진 시인 등이 그의 문하에서 한동안 불교를 배우는 등 한국문학 속에 불교의 사상과 자취가 스며드는 과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분이다. 미당이 이런 석전스님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동대문 밖 개운사 대원암에서 스님의 권고로 ‘소년 거사’로 머물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때의 심정을 서정주는 후에 “육당 최남선 씨와 춘원 이광수 씨가 한동안씩 이분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것과 춘원은 또 이분에게서 삭발한 것을 들어 알고 있던 나는 그의 그 따라 웃지 않을 수 없는 묘한 매력을 가진 웃음소리에 접하자 그게 첫째 궁금해 쾌히 그 권고를 받아 여기 한동안 머물기로 한 것이다.”(「단발령」)라고 적었다.

 

사진 1. 석전정호石顚鼎鎬(1870~1948). 1930년 동국대 전신 중앙불전 교장실에서.

 

서정주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박한영스님은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장으로서 종정의 자리를 겸하면서 당시 문단과 문학계에 두루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서정주는 광주학생운동 이후 학교를 중퇴한 뒤 무작정 상경하여 넝마주의를 하면서 보들레르와 톨스토이 등에 심취해 있던 문학청년이었는데, 우연히 서정주의 친우 배미사(본명 배상기) 씨와의 인연을 통해 석전의 부름을 받게 되었고, 그로부터 위와 같은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사진 2. 대원강원(현재 암암동 대원암) 강주 겸 중앙불전 교장 시절의 석전스님.

 

서정주는 이때 『능엄경』을 석전에게서 배웠고 가끔 재주가 있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는데, 미당은 이런 석전을 “제자가 뭘 조금 잘 이해하는 것을 이분처럼 전신으로 좋아하시던 스승을 나는 내 생애에서 아직도 본 일이 없다.”(「단발령」)라고 극찬한 바 있다. 실제로 석전의 미당 서정주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점이 있었고, 서정주 또한 그런 스승의 칭찬과 인품에 깊은 존경을 품고 있었던 듯하다. 

 

‘인연’의 사상과 영원주의

 

미당 서정주가 불교의 은유법과 ‘인연’을 ‘신라의 내부’를 들춰 보며 알았다고 한 말의 핵심은 실제로 앞에서 인용한 시 「추사와 백파와 석전」의 “추사가 준 아호 ‘석전’을 백파가 생전에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이 겨레의 미래영원에다 가만히 유언으로 싸서 전하는 것”이라는 구절에 그대로 암시되어 있다.

 

물론 이 구절뿐만 아니라 미당 서정주의 영원주의가 사실은 ‘불교적 인연’에 대한 감각과 사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그의 시 도처에서 발견되는 사실이다. 다만, 이렇듯 그의 시 곳곳에 있는 ‘인연과 영원주의’의 핵심이 지금까지의 연구와 평가에서는 종종 ‘동양주의’, ‘신라정신’, ‘고대성’, ‘회고주의’ 등으로 모호하게 표현되어 온 점은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사진 3. 석전스님의 시첩에 실린 석전스님(좌)과 최남선의 한시(우).

 

동양주의나 신라정신, 고대성, 회고주의 등은 다분히 현대적 합리성을 전제로 한 불교적 인연과 시간관념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이런 일반적 용어는 그 개념의 전제 속에 이미 오리엔탈리즘이나 고대주의, 반근대적 전통주의 등의 선개념을 함축하고 있어서 서정주 시의 인연 감각과 체험, 그리고 사상을 그 자체로 이해하는 데에는 방해가 되는 측면이 적지 않다. 

 

서정주에게 불교적 인연은 ‘석전石顚’이라는 호가 추사 김정희와 백파를 거쳐서 ‘박한영’에게 전달되었듯이,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정해진 것과 ‘주인’이 없는 것 같지만 인연법에 의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나 감각은 때로는 천리나 순리의 개념으로 나타나면서 ‘탈속적 체념’의 감각과 ‘인간의 의지, 욕망’이 순화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서정주가 불교적 은유에서 귀신과 인간이 서로 통하는 설화와 마법의 세계를 보았다면, ‘인연’의 감각을 통해서는 인간과 인간의 인연, 그리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연의 법칙성이 어떻게 삶과 운명을 만들어 내는가 하는 점에 집중된다. 서정주의 ‘인연의 감각’은 이 점에서 추상적이지 않으며 아주 미시적이고 체험적이다. 인연의 사상을 감각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은 그의 독특한 시적 능력이기도 한데, 이런 시적 자질의 기원에는 그가 불교를 처음 접한 ‘석전과의 만남’이라는 개인적 체험이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인연의 체험’이 ‘감각’이 되기까지

 

톨스토이가 갖는 사람들의 고난에 대한 연민이라면 그건 물론 승려들 속에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소년 시절의 그 무작정한 연민심 때문에 한때 사회주의에도 감염되었다가 탈피해서 니체와 그리스신화의 신성의 분위기에도 상당히 또 젖어 있었던 나로서는 그리스신화적 그 육감과 혈기라는 것은 여간한 매력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것을 불교의 그 넓은 세계 속에 포함하여 안한安閑할 만한 실력도 되지 못했고, 또 그 나이도 아니었던 것이다.(「단발령」)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은 문학사적으로는 하나의 ‘사건’에 해당된다. 시에 관능과 욕망, 그리고 육체성과 신성의 딜레마가 그대로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니체의 운명애’ 같은 것이 너무나 감각적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적인 육체성, 기독교적인 초월과 신성의 대립, 그리고 니체의 운명애와 같은 철학적 사유의 시적 이미지화는 종래의 시적인 언어가 지니고 있던 ‘묘사로써의 이미지’를 초월한 것이었다. 

 

사진 4.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남만서고, 1941년)의 표지.

 

철학이나 관념적 사유 혹은 사상이 시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관념과 사상’을 어떻게 실제적인 감각과 미시적 일상의 체험으로 표현해 내느냐 하는 추상성의 극복이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한다. 서정주는 이 점에 있어서는 단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석전과의 만남 이후 『능엄경』을 배웠지만 서정주의 이 시기 주된 관심은 그리스적인 육체성과 니체, ‘혈기와 피’ 같은 것이었기에 ‘불교’의 넓은 사상을 시로 써내거나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위의 고백은 이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서정주가 자신이 들춰 본 신라의 내부에서 그나마 터득한 성취는 ‘불교적 은유법과 인연’이라고 ‘콕 집어서’ 말한 까닭은,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품을 수 없었던 불교를 ‘신라’라는 불교적 감각이 일상에서 살아 움직이던 세계를 그가 엿봄으로써 비로소 품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것의 감각화가 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라면 서정주는 자신이 다 품을 수 없었던 불교를 ‘은유와 인연론’으로 다시 감각화하고 있는 것이다. ‘설화조와 인연조’라는 말로 나중에 언급하기도 하는데, 설화조가 불교적 은유가 일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시적 구현이라면, 인연조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연결된 세계에 대한 감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와 장소가 서로 합이 맞지 않는 것은 그 시간과 장소의 인연이 서로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의 고뇌와 운명적 속박 등이 발생하는데 이런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벗어난다면, 그런 운명의 굴레 또한 없어지게 된다. 인연의 감각화는 결국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넘어서는 ‘영원성의 세계’에서 인연을 바라보는 것이다. 서정주의 시에서 ‘달관’이라는 경지를 종종 읽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달관이란 곧 시공을 초월한 인연의 경지에서 삶을 바라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인연설화조因緣說話調, 귀신과 통通하는 이야기

 

국화꽃이 피었다가 사라진 자린

국화꽃 귀신이 생겨나 살고

 

싸리꽃이 피었다가 사라진 자린

싸리꽃 귀신이 생겨나 살고

 

사슴이가 뛰놀다가 사라진 자린

사슴이네 귀신이 생겨나 살고

 

영 너머 할머니의 마을에 가면

할머니가 보시던 꽃 사라진 자리

할머니가 보시던 꽃귀신들의 떼

 

꽃 귀신이 생겨나서 살다 간 자린

꽃귀신의 귀신들이 또 나와 살고

 

사슴이의 귀신들이 살다 간 자린

그 귀신의 귀신들이 또 나와 살고

 

- 「고조古調2」, 『신라초』(정음사, 1961).

 

만해 한용운이 불교적 우주관을 사랑의 이야기로 변주해 냈다면, 서정주는 불교적 사유가 지배하는 삶의 감각을 적확하게 재현해 냄으로써 불교가 한국의 현대시에 접목되는 한 장면을 보여준다. 서정주의 인연설화조는 ‘사람’만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된 세상을 보여주는데, 이런 ‘세상’에서는 ‘사람과 귀신, 꽃, 나무, 동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통한다.

 

“국화꽃이 피었다가 사라진 자린/국화꽃 귀신이 생겨나 살고”처럼, 이런 세계에서는 삶과 죽음 또한 철저하게 절연되어 있지 않다. 서정주가 신라를 통해 발견한 것은 ‘삼국유사’와 ‘고대사’에 담긴 불교적인 삶과 우주관의 생생한 재현과 관련되어 있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한때 존재했던, 설화가 지배하던 세계. 

 

사진 5. 서정주(1915∼2000).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통靈通이 일상 속에 존재하며 한때, 누군가의 딸이 바라보던 아름다운 목화꽃이 ‘이불’과 ‘솜’이 되는 것(「신라의 상품商品」)을 ‘달관’하는 것이 ‘시적 예지’라고 한다면, 서정주는 이런 세계를, 불교와 그 불교의 세계관이 일상적 삶의 원리로 작동하던 ‘신라’, ‘고대성’, ‘설화’의 세계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특히, 향가와 향가설화는 그가 발견한 신라와 시(노래)의 사상을 연결해 주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기도 하다. 향가의 매력이 ‘귀신을 울게 한다’, ‘천지 귀신에게 통한다’는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서정주가 향가를 통해 발견한 것은 불교가 녹아든 향가, 즉 시의 원천에 대한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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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계간 <시작>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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