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봉발신앙과 법주사의 봉발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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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5 년 1 월 [통권 제141호] / / 작성일25-01-04 21:31 / 조회62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 51_ 법주사 ❻
부처의 발우 이야기는 여러 불전佛典 자료에 나온다. 싯다르타가 무화과나무 숲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처음으로 음식을 공양한 사람이 박트리아Bactria 출신의 카라반caravan 거상巨商이었던 트라푸사(Trapuṣa, Tapussa, 提謂)와 발리카(Bhallika, Bhalluka, 波利) 형제였다.
불전에 나타난 봉발신앙
고행상의 좌대 등에 이들의 음식 공양 모습을 새긴 것이 있는데, 이런 부조는 2∼3세기 간다라 조각 등에서 형상화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문제는 이들이 보릿가루와 꿀로 만든 반죽과 차를 붓다에게 올릴 때 붓다에게는 발우가 없었다는 것이다. 외도들은 손으로 음식을 먹었지만 과거의 붓다들은 이들과 달리 손으로 먹지 않고 발우에 담아 먹었다.
그래서 싯다르타도 손으로 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는데, 이때 보살이 정각正覺을 이루면 반드시 발우를 올려야 하는 임무를 지고 있는 4명의 사천왕이 각자 돌산에서 돌로 곱게 만든 발우를 가져와 붓다에게 올렸다. 붓다는 그들이 올린 4개의 그릇 중 어느 하나만 사용할 수 없어 신통력으로 4개를 포개어 하나의 발우로 만들어 두 형제가 공양하는 음식을 담아 먹었다. 그리고 이 발우는 붓다가 열반에 들 때 자신의 가사와 함께 가섭에게 전하면서 나중에 미륵불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서양 중세의 기사knight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기독교의 성배聖杯(Holy grail) 이야기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예수의 성배나 붓다의 발우나 전설만 있을 뿐 확인된 것은 없다. 트라푸사와 발리카 형제가 음식을 싯다르타에게 올린 것까지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사천왕이 돌로 만든 발우를 싯다르타에게 올렸다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나중에 이 붓다의 발우가 미륵불에게 전해지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아육왕전阿育王傳』이나 『대지도론大智度論』과 같은 불전에 의하면 쿠시나가르에서 붓다가 열반에 들게 되었을 때 가섭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미래의 붓다인 미륵불에게 전하도록 하였고, 가섭은 이에 따라 쿠쿠타파다(Kukkuṭapāda, 屈屈吒播陀) 또는 구루파다(Gurupāda, 寠盧播陀)라고 부르는(현 Grupa hill) 즉 계족산(鷄足山=존족산尊足山)에서 이를 가지고 선정에 든 상태로 미륵불이 내려오기를 기다린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상 붓다의 발우는 아직 계족산에 있으며 56억 여년 후에 강림할 미륵불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된다.
이와 다른 버전도 있다. 싯다르타가 바이샬리(Vesali, 비사리毗舍離)의 암라원(Amrapalivana, 내씨원㮈氏園)에 있다가 열반에 들게 되는 쿠시나가르로 가게 되는데, 이때 붓다와 헤어지기를 슬퍼하며 따라오는 바이샬리의 릿차비(Licchava, 율첨파자栗呫婆子, 리차자離車子) 사람들과 케사풋타 마을(현 케사리야Kesariya)에서 이별하며 발우를 허공에 던져 그들에게 주었다. 이것이 나중에 북천국 쿠산제국의 왕 카니시카(Kanishika, 가이색가迦膩色迦, 재위:127∼150?) 왕이 중천국 파탈리푸트라[華氏國]을 정복하고 제국의 수도인 푸르샤푸르(=페샤와르Peshawar)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 발우는 불발사佛鉢寺의 탑에 안치하였다고도 하고, 당나라에서 온 구법승들이 이를 보았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현장 법사가 페샤와르에 왔을 때는 발우는 사라지고 없고 그것을 받치고 있던 보대寶臺만 남아 있었다고 했다. 발우가 있었던 곳을 지금의 페샤와르라고 쓴 자료도 있고 카슈미르Kashmir라고 기록한 자료도 있다. 유목민인 쿠샨족들이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페샤와르에 있던 발우는 어디로 갔을까? 오늘날 카불Kabul 박물관에 있는 거대한 발우 모양의 석조물이 그것이라는 견해와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이렇게 큰 돌그릇으로 붓다가 음식을 먹고 이를 허공에 던졌다고? 연구자들이 해명할 문제이다.
아무튼 붓다의 발우는 정작 인도에서는 성물도 아니고 이를 경배하는 행위나 신앙도 없었는데, 나중에 간다라 지방에서 발우를 경배하는 봉발신앙과 행위가 나타났다. 어쩌면 이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싯다르타가 죽고 없는 상태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는 경배의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불탑이나 불상을 조성한 것과 같이 붓다의 발우를 붓다의 가르침[佛法]으로 상징화하고 급기야 발우를 경배하고 신앙하는 행위를 한 것 같다.
간다라 지방에서 붓다의 발우는 붓다 일대기에서 한 장면으로 석물에 새겨지기도 하고 나중에는 발우를 경배의 대상으로 하는 장면도 나타나기에 이른다. 아예 발우를 그 자체 단독으로 경배의 대상물로 조성하기도 했는데, 이 경우에는 그릇의 표면에 여러 장의 연꽃잎을 새겼다. 발우 하나만 단독으로 경배의 대상이 되다 보니 불상처럼 큰 것도 조성되었다.
이러한 붓다의 발우는 불전설화에서 이렇게 사천왕과 미륵불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고 보면, 미륵불을 모신 용화보전 앞에 발우와 사천왕이 새겨진 석등으로 장엄한 것은 이해가 되는 것이고, 석련지를 ‘진리의 그릇’인 붓다의 발우라고 보는 것이 설득력을 가진다. 아무튼 이런 사정으로 보면, 법상도량에 합당하게 봉발석상, 사천왕석등, 석련지 등은 원래의 자리로 다시 옮겨 놓는 것이 옳다.
이러한 붓다의 발우를 경배의 사상으로 하는 봉발신앙에 비추어 보면, 화순 운주사雲住寺의 이상한 탑 가운데 봉발형다층석탑은 어쩌면 사천왕이 붓다에게 올린 4개의 돌발우를 포개어 놓은 모양을 조성하여 돌기둥 받침에 올려놓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이 이를 조성하였을까? 혹시 남방계 불교 국가에서 온 외국인은 아닐까?
추래암과 마애여래의좌상
석련지에서 다시 뒤로 돌아오면 마애여래의좌상磨崖如來倚坐像이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이를 수정봉에서 굴러떨어진 추래암墜來巖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사실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앞에는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을 새겨놓은 큰 바위가 있고, 이 두 바위 위에 큰 바위가 얹혀 있는 석문 사이에 석굴 같은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지장보살상을 새긴 것은 진표 율사가 지장보살로부터 계를 받은 이야기에 바탕을 둔 것일 수도 있는데, 석문 양쪽 바위 면에 미륵여래상과 지장보살상을 새긴 것이 어쩌면 법주사가 미륵신앙과 지장신앙을 축으로 하는 진표계 법상종임을 말하려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마애여래의좌상은 목에 3줄의 주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부조로 새긴 것으로 본다. 약 6m 정도의 큰 바위에 미륵불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인데, 이렇게 의자에 앉은 상은 중국에는 많지만 우리나라에는 이것이 유일하다. 간다라 불교조각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붓다의 모습이 많다. 미륵불을 새긴 것은 법상종의 도량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고, 진표 율사가 미륵보살에게서 점찰경과 불자 간자를 받은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 의자에 앉아 있지만 연꽃 위에 걸터앉아 있고, 발도 큰 연꽃 위에 올려놓은 모습이다. 이런 자세는 다른 마애불에서는 보기 드물다.
마애여래의좌상이 새겨진 바위의 안쪽에는 바위 면에 폭 4m 정도 높이 2m 정도의 면적에 5∼6명의 인물과 5마리의 말 등을 선으로 파서 새겨놓았다. 그림의 형태나 미륵여래상과 닿는 부분이 깎여진 것을 보면, 이 그림이 먼저 새겨졌고 마애여래좌상이 나중에 조각된 것으로 보인다. 진표 율사가 법주사로 가는 길에 수레를 끌던 소를 만났을 때 소가 무릎을 꿇고 붓다의 가르침을 구하자 마부도 율사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는 설화를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고, 의신조사가 불경을 가져온 이야기를 새긴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며, 중국의 불교가 처음 전해지던 낙양의 백마사 청건설화를 그린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인물이나 동물이 여러 방향으로 향하고 있고 모양도 다양한 것으로 보아 이런 설화와는 무관하게 어떤 기도처에 그린 그림이라고 보기도 한다. 큰 바위 사이의 이 공간이 그 옛날에 무엇으로 사용된 것인지 궁금하다. 어쩌면 절이 들어서기 이전에 있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세존사리탑
이 바위에서 오른쪽으로 능인전能仁殿과 사리각舍利閣이 있고, 그 뒤에 세존사리탑이 있다. 1362년 공민왕이 법주사에 왔을 때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가져와 친견한 후 하나를 여기에 모셨다고 한 바로 그 사리이다. 세존사리탑은 그 후 조선시대에 조성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탑으로 기단부 위에 장식이 없는 둥근 모양의 탑신塔身을 얹고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다음 보주寶珠로 상륜부를 장식하였다.
능인전은 법주사를 중건할 때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16나한을 모신 나한전의 역할을 한다. 원래는 이것이 사리각이었는데, 뒤편의 세존사리탑을 모시고 있는 적멸보궁의 예배공간이었다. 능인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를 모시고 있는 집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은 나한전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옆에 사리각이라는 건물을 따로 두고 있는데, 이 사리각은 과거에 노전爐殿이었다. 이름이 혼란스럽다.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하다.
법주사가 법상종의 도량이고 미륵신앙의 도량이라면 이 공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팔상전을 기준으로 수정봉을 바라보면, 수정봉을 주봉으로 하여 법상종의 주존인 미륵불을 봉안한 금당이 있었고, 그 앞에 미륵세계를 상징하는 봉발석상, 사천왕석등, 석련지가 장엄을 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는 미륵여래의좌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미륵하생신앙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라고 보이고, 나중에 그 옆 혈처穴處에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세존사리탑을 조성하고 능인전을 조성한 것은 미륵상생신앙의 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이런 석물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져 있고, 용화보전도 사라지고 거대한 금색미륵여래입상이 서 있어 그러한 체계적인 공간 구성이 가지는 의미를 음미하기 어렵게 되어 버려 세존사리탑도 구석에 방치된 것처럼 되어 있다. 석물들도 원래 자리로 옮기고 이 공간을 법주사의 중심 공간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법주사의 전체 모습이 다시 살아난다. 법상종의 주존인 미륵불을 모신 산호전(=용화보전)으로부터 현세의 석가모니불을 모신 팔상전과 그 앞 석등으로 이어지는 동서축은 미륵신앙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는 공간이 된다. 금강문에서부터 팔상전과 극락세계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과 그 너머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연화장세계의 대웅보전(=대웅대광명전)으로 이어지는 남북축은 나중에 조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화엄세계를 구현하고 있는 공간이 된다.
팔상전은 이 두 축이 서로 만나는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주불전이 두 개가 되는데, 비로자나불의 대웅대광명전은 관음봉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미륵불의 용화보전은 법주사의 주산인 수정봉을 주 배경으로 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법주사의 역사에서 왜 수정봉이 가지는 의미가 가장 큰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미륵도량의 주산이기 때문이다.
법주사는 법상종의 도량이라서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모시는 것이 기본이지만, 비로자나불이 봉안된 것은 법상종의 소의경전에 『유가사지론』, 『해심밀경』, 『십지경론』과 함께 『화엄경』도 포함되어 있고, 특히 신라의 법상종은 중국과 달리 화엄적인 색깔이 혼유된 모습으로 전개되어 왔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도 보인다.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종래의 불교가 선교 양종으로 통합되어 불교의 모습이 왜곡(?)되고 사찰 역시 엄격한 가람배치를 유지하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사찰을 보면, 그 가람배치가 시대에 따라 다른 경우가 있고, 교종과 선종에 따라 다르게 된 경우가 있다. 교종 사찰에서도 미륵신앙이나 미타신앙에 따라 다르고 화엄도량이냐 법화도량이냐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시대에 따라 당우들이 여기저기 들어서면서 변형이 가해져 이제는 원래의 모습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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