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돈점 논쟁은 돈문頓門 안에서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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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5 년 1 월 [통권 제141호] / / 작성일25-01-04 21:23 / 조회78회 / 댓글0건본문
돈頓과 점漸은 연속과 불연속의 문제
‘돈’과 ‘점’의 대비는 ‘연속과 불연속’의 문제다. 연속은 ‘어떤 전제가 유효할 수 있는 체제·계열·범주의 지속적 유지와 연장’이고, ‘어떤 전제를 토대로 구성된 체제·계열·범주 안에서 그 전제가 유효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지칭한다. 그리고 불연속은, ‘어떤 전제가 유효한 체제·계열·범주로부터의 탈출’이고, ‘어떤 전제를 토대로 구성되어 그 전제가 유효할 수 있는 인과관계와의 결별’이다.
‘시간의 시선’으로 본다면, 돈과 점은 ‘단번에’와 ‘점차’의 차이와 대립이 될 것이다. 그리고 돈점 논쟁을 바라보는 시선의 다수는 돈점의 차이를 시간의 문제로 파악하곤 한다. 그러나 시간의 시선만으로는 돈오사상의 본의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돈오에 관한 수많은 혼란과 오해, 불필요한 논쟁, 겉도는 논란의 원인이 되곤 한다. 돈오 통찰의 핵심은 시간의 시선보다는 범주·계열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것이 적절하다. 돈오의 맥락과 초점은 ‘시간적 노력의 종결’보다는 ‘범주·계열에서 한꺼번에 탈출함’에서 읽어내는 것이 적절하다. 그래야 돈오의 수행론적 생명력에 부응한다.
돈문頓門과 점문漸門
돈문은 ‘출발점부터 한꺼번에 바꾸는 측면’이고, 점문은 ‘출발점을 유지하면서 바꾸어 가는 측면’이다. 이러한 돈문과 점문의 구분은 불교 특유의 통찰에서 유래한다. 자아와 현상세계에 대한 관점과 이해를 그 출발점부터 해체하고 새로운 내용으로 대체하는 통찰이 그것이다.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관점 및 이해가 유효한 계열 및 범주’ 안에서 사유·욕망·행위를 바꾸며 수립해 가는 것〉은 점문, 〈관점 및 이해를 그 출발점부터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것’으로 바꾸어 기존 사유·욕망·행위의 계열·범주에서 한꺼번에 빠져나온 후,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사유·욕구·행위의 계열·범주’에서 삶을 재구성하는 것〉은 돈문이다.
자기에게 ‘불변의 순수한 영혼’이 있지만 오염물에 뒤덮여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여기는 갑돌이. 그는 본래의 그 ‘순수한 불변 영혼’을 참된 자아로 확신한다. 그러기에 그 자아를 가리고 있는 오염물의 제거를 인생의 과제로 삼는다. 육식이 오염의 원인이라 여기면 철저한 채식으로 바꾸고, 세속에 사는 것이 오염원이라 여길 때는 산중에 들어가 자연인으로 산다. 사람과 만나는 것이 오염이라 보면 대인 관계를 끊는다.
욕구에 따르는 것이 영혼을 오염시킨다는 금욕주의 교리에 공감하면, 모든 욕구를 거부하려는 자학적 고행에 몰두한다. 비윤리적 행위를 그치면 순수 영혼이 드러난다고 생각할 때는, 윤리 규범의 완벽한 준수에 온 힘을 쏟는다. ‘순수·불변하는 영혼의 완벽한 행복과 영생’을 보장해 준다는 종교 교리에 따라 삶을 헌신하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노력은 〈참 자아인 불변의 순수 영혼이 존재한다〉라는 관점을 전제로 전개되는 인과 계열 안에 있다. 그 인과 계열 범주 영역에서의 노력이며, 그에 따른 나름의 변화와 성취가 이어진다. 이 노력과 성취는 모두가 〈불변의 순수 영혼이 존재한다〉라는 전제가 유효한 계열과 범주 내에서의 일이다. 점문 안의 행보에 속한다.
이런 갑돌이가 불교를 접했다. 기존의 자아관을 뿌리째 흔드는 충격적인 내용이 있었다. 〈불변·절대의 순수 영혼은 본래 없다. 자아를 비롯한 모든 현상은 변화와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특징적 양상이다〉라는 관점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불편했고 부정하고 싶었다. 철학, 과학, 심리학의 관련 성찰들을 찾아 심사숙고해 보았다. 결국은 수긍하게 되었다. 그 순간, 〈불변의 순수 영혼이 있고 그것이 참 자아다〉라는 관점과 이해를 원인 조건으로 삼아 전개하던 기존의 노력은 모두 빛을 잃었다. 그러한 관점·이해를 조건 삼아 펼치던 일련의 판단·평가·감정·예측·선택 행위들에 더 이상 힘을 실을 수 없었다. 기존에 몸담았던 사유의 계열과 범주에서 발을 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새로운 자아관과 세계관에 입각한 새로운 삶의 계열과 범주에 진입했다. 돈문 안의 행보에 속한다.
돈점 논쟁은 돈문頓門 안에서의 일
돈문 안에는 점문 안에서는 없던 두 갈래 길이 있다. 그리고 그 두 길은 서로 얽혀 있다. 마치 두 갈래 줄이 한 몸처럼 꼬여 짜여 있는 새끼줄처럼. 깨달음[悟]과 닦음[修]의 길이 그것이다. 깨달음의 길에서는 다시 돈오의 내용 차이, 닦음의 길에서는 돈수와 점수의 차이가 엇갈리면서도 서로 얽혀 있다.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관점 및 이해가 유효한 계열 및 범주’ 안에서 통째로 탈출하는 ‘한꺼번에 깨달음[頓悟]’, 그 깨달음을 내용으로 삼는 닦음[修]. - 이 두 길을 둘러싼 다양한 시선의 충돌이 이른바 돈점 논쟁이다.
돈점 논쟁의 역사에서는 ‘한꺼번에[頓]’와 ‘점차[漸]’를 ‘깨달음[悟]’ 및 ‘닦음[修]’과 결합하는 다양한 조합이 등장한다.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 점오돈수漸悟頓修, 점오점수漸悟漸修가 그것이다. 그러나 돈문의 핵심과 초점을 고려하면, 돈점 논쟁의 관점 차이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문제로 압축된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차이는 무엇이며, 수행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답하는 것이 돈점 논쟁 탐구의 핵심이다. 이 질문에 대해 선종의 용어나 이론을 그대로 채용하면서 재배열하여 대답하면 자칫 ‘개념·용어의 동어반복적 돌려막기’가 되고 만다. 수사적修辭的 순환 논리의 맴돌이 현상에 빠지게 된다. 한문 전적을 다루는 학인들이 유념해야 할 문제다. 한자는 여러 뜻을 담는 중의적重義的 문자이기 때문에, 용어나 문장에 담긴 여러 의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은 용어와 문장을 대하는 사람의 관점과 이해에 따라 이루어진다. 사상적 의미가 담긴 용어나 문장은 특히 그러하다.
한자어나 한문 문장, 특히 불교 용어와 문장의 의미를 밝힐 때는, 자신이 선택한 관점과 이해를 ‘현재어 개념’에 담아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한문 문헌에 대한 영어 번역이나 저술이 의미 전달력과 가독성이 높은 이유는, 한국어와 달리 한자 용어를 그대로 채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한자어를 품고 있으면서도 관계사나 수식어가 고도로 발달해 있다.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드러낼 수 있는 탁월한 언어다. 다른 학인들도 그렇겠지만, 번역이나 연구 및 글쓰기에서 필자가 항상 유념하는 문제다. 돈오견성을 다루는 이하의 글들에도 그런 문제의식을 반영하려 노력하고 있다.
갑돌이는 〈참 자아인 불변·절대의 순수 영혼은 본래 없다〉라는 관점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참 자아인 불변·절대의 순수 영혼이 있다〉라는 자아관을 원인 조건으로 삼아 전개하던 ‘사유와 행위의 인과 계열’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이해를 원인 조건으로 삼는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삶의 구성 계열과 범주’에 몸담게 되었다. 돈문 안의 행보가 시작되었다.
무아·연기의 가르침에서 보면, 점문에서의 수행은 〈‘불변·절대의 자아가 있다는 관념을 토대로 삼는 사유·욕망·행위의 범주나 계열’ 안에서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돈문에서의 수행은, 〈‘무아·연기의 관점을 토대로 삼는 사유·욕구·행위의 범주나 계열’로 한꺼번에 자리를 바꾸어 향상해 가는 것〉이다. 갑돌이의 경우는 구도적 노력의 장場을 점문으로부터 돈문으로 바꾼 사례에 해당한다.
그런데 갑돌이는 또 다른 문제 앞에 섰다. 그는 분명, 〈‘불변·절대의 자아가 있다’라는 관념을 토대로 삼는 사유·욕망·행위의 범주와 계열 안에서 노력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공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변의 순수 자아가 있다〉라는 견해를 ‘한꺼번에’ 털어 버렸다. 자아에 대한 견해를 ‘무아·연기의 자아관’으로 ‘통째로’ 바꾸었다. 그는 이제, ‘자아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토대로 삼는 사유·욕구·행위의 범주와 계열’에 몸담게 되었다. 적어도 관점과 이해를 기준으로 볼 때는 그랬다.
그런데 자아에 대한 견해는 송두리째 바뀌었는데, 일상에서의 사유와 감정, 욕구와 행동은 여전히 예전 견해에 따르고 있지 않은가. 자아에 대한 관점은 한꺼번에[頓] 새로운 견해로 바뀌었지만, 삶의 대부분은 여전히 예전 견해가 이끌고 있지 않은가. 수행적 노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이 문제를 푸는 데 유효한 수행은 무엇이며, 어떤 조건들을 갖추어야 그 수행이 제대로 이루어지는가?〉를 묻고 답하는 성찰이 수반되어야 한다.
갑돌이가 봉착한 이 문제 상황은, 선종 선불교뿐 아니라 불교를 구도적 관심으로 탐구하는 모든 학인에게 유효하다. 그리고 구도 학인들을 다음과 같은 질문들 앞에 불러 세운다.
〈삶의 두 계열(점문과 돈문)을 발생시키는 원초적 조건은 무엇인가? 단지 관점이나 이해의 문제인가?〉, 〈돈문에로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해만으로 충분한가?〉, 〈이해 수행의 효력과 한계는 무엇이고, 한계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돈오견성은 삶의 어떤 변화를 전망하게 하는가? 돈오견성이 삶과 세상에 주는 구체적 이로움은 어떤 것인가?〉, 〈돈오견성은 삶과 세계의 인과적 전개에서 아예 벗어나는 것인가?〉, 〈니까야가 전하는 붓다의 법문은 돈오견성과 통하는 내용을 설하고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붓다의 선禪과 선종의 돈오선頓悟禪은 현재 유행하는 명상(주의 집중)과 같은가 다른가?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가?〉, 〈선종의 돈오선은 위빠사나(관觀)와 사마타(지止) 수행을 어떻게 보는가?〉, 〈선종에서 ‘마음을 깨닫는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를 만나는 것인가? 아니라면 어떤 국면을 일깨워 주려는 것인가?〉, 〈선종은 왜 돈오 수행을 이론불교[敎宗]의 이해 수행을 뛰어넘는 최상승 수행이라고 평가하는가?〉, 〈지눌은 왜 이론불교(교종)의 ‘이해에 의한 깨달음[解悟]’을 선종의 돈오에 연결하고자 하였고, 성철은 왜 그런 시도를 강하게 비판하는가?〉(주1) 등등. - 선종의 선문 안에는 이런 질문들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답변들이 축적되어 있다. ‘지금 여기의 관심과 언어’로 읽어내어 활용해 주기를 기다리는 내용이다.
돈문 안에는 다시 통과해야 할 여러 관문이 세워져 있다. 그 관문들의 열쇠 확보는 이런 질문들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관문들을 열고 들어서야 ‘해탈·열반·깨달음 및 선禪 수행의 의미’가 눈앞의 풍경처럼 펼쳐진다. 남은 회차에서 다룰 수 있는 데까지 필자의 소견을 가감 없이 밝혀 보겠다.
<각주>
(주1) 이런 질문에 나름대로 답해 본 것이 『선 수행이란 무엇인가?』(장경각, 2024년)이다. 선 수행의 두 축을 ‘이해 수행’과 ‘마음 수행’으로 구분하면서 관련 통찰의 흐름과 그 의미를 붓다부터 선종 간화선까지 계보학적으로 다루어 보았다. 내용이 기존 시선과는 달라서 독백으로 끝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평생 간화선 참구에 전념해 오신 한 선승께서 책을 읽고 연락하시어 “선방에 돌려야겠습니다.” 하셨다. 독백은 아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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