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원응국사 학일과 청평거사 이자현
페이지 정보
김방룡 / 2025 년 1 월 [통권 제141호] / / 작성일25-01-04 21:19 / 조회67회 / 댓글0건본문
한국선 이야기 13 / 천태종의 개창에 맞서 임제선을 수용한 선사들 ②
고려 광종 대 법안종의 유입과 의천의 천태종 창종으로 인해 나말여초에 형성된 구산선문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의천 사후 지눌이 출현할 때까지 고려 중기 선종을 지탱한 대표적인 3대 고승으로 혜조국사慧照國師 담진曇眞(미상)과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1070~1159) 및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1052~1144)을 들 수 있다. 담진과 탄연이 사굴산문의 대표적 선승이라면 학일은 가지산문의 대표적 선승이었다.
「원응국사 비문」의 찬자 윤언이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에는 윤언이尹彦頤(1099~1149)가 찬한 원응국사의 비문이 있다. 비문의 찬자 윤언이는 숙종과 예종 대에 여진족을 토벌하였던 윤관尹瓘의 아들이다. 1127년 남송이 세워지자 이듬해인 1128년(인종 6) 윤언이는 예부시랑이 되어 송나라로 들어가 국교 재계를 청하고 돌아왔다. 또한 1135년(인종 13)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중군좌中軍佐로 임명되어 김부식과 더불어 묘청의 난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조선불교통사』에서 이능화는 윤언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149년(의종 3년) 9월 임오일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윤언이尹彦頤가 죽었다. 언이는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였고 문장에 뛰어나 일찍이 『역해易解』를 저술하여 세상에 전했다. 만년에는 불법에 심취하여, 늙었다는 핑계로 파평坡平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스스로 금강거사金剛居士라고 불렀다. 일찍이 승려 관승貫乘과 벗이 되었다. 관승이 겨우 한 사람이 앉을 자리만 있는 초막 암자[蒲菴]를 짓고 먼저 죽는 사람이 이 자리에 앉아 입적하자고 약속하였다. 하루는 언이가 소를 타고 관승에게 찾아가 이별을 고하고 곧바로 돌아가니, 관승이 사람을 초막 암자로 보냈다. 언이가 웃으며 말하기를, “스님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구나.”라고 하며 드디어 초막 암자에 앉아 서거하였다.(주1)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윤언이의 마지막 삶의 순간은 생사를 초탈한 선사의 열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묘청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또한 요나라와 금나라 및 송나라 등과의 외교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윤언이가 만년에 불법에 심취하여 당대를 대표하는 거사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가 학일의 비문을 찬한 것은 단순히 왕명을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학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원응국사 학일과 가지산문
학일은 1052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지방인 서원西原 보안保安에서 출생했다. 속성은 이씨李氏이고, 법명은 학일學一이며, 자는 봉거逢渠이다. 아버지는 응첨應瞻으로 관직에 진출하지는 않았으며, 어머니 역시 이씨李氏로 용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임신했다고 한다.
학일은 11세가 되던 1062년(문종 16) 진장眞藏 선사의 제자가 되어 13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향수사香水寺의 혜함惠含 선사를 찾아뵈었다. 어느 날 혜함은 학일에게 “어떤 승려가 장경長慶 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배우는 이가 출신할 길입니까?’라고 하니, 장경이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네가 출신할 길이다.’라고 했다.”라는 고칙을 들어 보이니, 학일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계속 정진하여 선지禪旨를 깨달았다 한다.
학일의 스승인 진장과 혜함에 대한 상세한 이력은 알 수 없지만, 가지산문 소속의 선사로 추정된다. 학일은 1082년(문종 36) 개성의 광명사에서 개최된 승과고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그는 경·율·논 삼장은 물론 『대반야경』에 달통하여 반야삼매를 얻었다. 그리고 치병 능력이 있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였는데, 문종의 아들이자 의천의 아우인 원명국사 징엄澄儼이 9살 때 몸이 아파 거의 숨이 끊어져 가는 순간 대반야를 염송하여 낳게 하기도 하였다.
학일은 의천과 동시대를 살았는데, 담진이나 의천과 달리 해외에 나가지 않았으나 당시 승려들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의천이 송나라에 다녀와서 천태종을 창종할 때 여러 차례 학일에게 동참하기를 권했지만, 학일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윤언이는 비문에서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대각국사가 원우 원년(1084)에 귀국하여 천태지자를 존숭하여 별도로 천태종을 창립하였다. 이때 선종에 소속된 승려 가운데 천태종으로 치우쳐 속한 자가 10중 6〜7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본 학일은 조도祖道가 조락하여짐을 슬퍼하면서 홀로 서겠다는 마음을 확고히 하였으며,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생명을 바쳐 호종護宗하였다. 대각국사가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권하였으나 끝내 그의 명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주2)
의천이 화엄종의 종주이면서도 천태종을 개창한 이유 중의 하나는 호족 세력과 결탁된 선사들을 왕권에 복속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천이 천태종을 선종의 종파에 소속시킨 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때 천태종에 합류한 선사의 수가 1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기존의 구산선문에 속했던 승려가 7백여 명, 자발적으로 천태종에 합류한 승려가 3백여 명이었다. 이러한 의천의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남종선의 종지를 지켰던 대표적인 선사가 사굴산문의 담진과 더불어 가지산문의 학일이었던 것이다.
천태종을 개창한 이후에도 의천은 천태종의 불사에 학일이 동참하기를 권유하였다. 예를 들면 1098년(숙종 3) 의천이 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圓覺經』 법회를 개최할 때 학일을 법회의 부강副講으로 삼고자 했으나, 학일은 이를 사양하고 단지 청강만 했다. 가지산문의 선사로서 자신이 갈 길을 학일은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106년(예종 1) 학일은 삼중대사가 되었으며, 가지사·귀산사 등에 머물다가 1108년(예종 3) 선사禪師의 승계를 받았다. 여기에서 학일이 머물렀던 가지사迦智寺는 장흥의 가지산에 있었던 사찰로 보인다. 다만 체징이 가지산문을 연 보림사가 이때 가지사로 이름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보림사와 더불어 가지사가 병존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후 태고보우가 가지사에 주석했다는 내용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까지 가지사는 가지산문의 중심 사찰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학일은 선사에 이어 대선사가 되었고 예종과 인종 대에 이르러 왕사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129년(인종 7)에 청도 운문사로 내려와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다. 학일이 운문사에 주석함으로써 운문사가 크게 융성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운문사는 가지산문의 중심 도량으로서 사격을 확고히 하게 된다. 이후 가지산문 소속의 보각국사 일연이 이곳에 주석하였던 사실 또한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학일의 선사상
담진과 달리 학일에게는 당시 송나라 임제종의 직접적인 영향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요나라의 세력이 약화하고 금나라의 세력이 부강하면서 중원에서는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세워지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남송과 고려 사이에 긴밀한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의천의 활약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고려 불교계에 송나라 불교의 영향 또한 자연스럽게 미치게 된다.
윤언이는 이러한 학일의 선사상 속엔 당시 형성된 남종선 5가 7종의 종지들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즉 나말여초 가지산문의 정체성을 견지하면서도 5가 7종의 종지들을 모두 포용한 선사로서 학일의 위상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 비문의 「음기」에는 학일의 문도들의 성명이 명기되어 있는데, 대선사 2명, 선사 13명, 삼중대사 9명, 중대사 57명을 포함하여 모두 229명의 구체적인 이름이 나타나 있다. 학일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청평거사 이자현
12〜13세기 선사상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거사居士이다. 이 시기 이자현·윤언이·이규보·이장용·이승휴 등 뛰어난 재가 거사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는 오대 북송 시기 문화의 주체로 떠오른 사대부들이 선사상에 심취하여 문자선·공안선의 선풍을 만들어 낸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자현李資玄(1061~1125)은 인주 이씨로 문하시중을 지낸 이자연의 손자이자 인예왕후, 인경현비, 인절현비의 조카이며, 이자겸과는 사촌지간이다. 이자현은 24세에 진사가 된 뒤 줄곧 벼슬길에 머물렀지만, 갑자기 아내를 잃은 후 29세에 춘천의 청평산으로 들어가 문수원文殊院을 수리하고 거주했다. 이자현에 대하여 『고려사절요』에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청평산 사람 이자현이 졸하였다. 자현은 부귀한 가문에서 생장하여 나라의 외척이 되었으나, 화려한 것을 싫어하며 한적한 것을 좋아하여 벼슬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성질이 인색하여 재산을 많이 축적해서 재물을 독점하며 양곡을 모아들였기 때문에 그 지방의 농민이 매우 괴롭게 여겼었다. 병이 들자 왕이 내의를 보내어 문병하고 차와 약을 주었다.(주3)
이자현은 임진강을 건너면서 “이제 가면 다시는 서울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청평산에 들어가 평생을 수도 생활로 일관하였다. 당대 최고의 금수저로 태어나서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30세를 전후하여 베옷과 나물밥을 먹으며 선수행에 전념한 극적인 삶의 반전 이유가 아내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자현은 설봉의존雪峰義存(822~908)의 어록을 읽다가 “온 천지가 다 눈[眼]인데, 그대는 어디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가[盡乾坤 是箇眼 汝向什麼處蹲坐]?”라는 구절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이자현은 『능엄경』에 심취하여 ‘능엄선’을 주창하였으며, 『능엄경』에서 수행 방법으로 제시한 25원통 가운데 관음보살이 수행한 이근원통耳根圓通을 강조하였다. 지눌의 『수심결』 가운데, “그대는 까마귀가 울고 까치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자현이 강조한 관음보살의 이근원통 수행법이다. 이자현의 영향이 지눌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각주>
(주1) 『역주 조선불교통사 1』, 707쪽.
(주2)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 비문」: 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3), 277쪽
(주3) 『고려사절요』, 인종 공효대왕 3년 4월 조.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밀라레빠의 수행식 쐐기풀 죽
일생을 설산 동굴에서 명상수행으로만 일관했던 전형적인 딴트릭 요기(Tantric Yogi)이자 전 세계적으로 널리 회자되며 사랑받고 있는 음유시인 밀라레빠(Jetsün Milarepa, 1052~1…
김규현 /
-
자연의 선물, 발효
유네스코가 우리나라 김장문화를 인류문화유산으로 인정한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습니다. 가족 구성원의 변화와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로 김장 인구가 점점 줄어들면서 인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음식문화…
박성희 /
-
12연기와 『금강경』의 사상
[질문]지난번 『쌍윳따니까야』 경전 공부 중에 아상我相은 ‘주관적 자아’, 인상人相은 ‘객관적 자아’라고 설명하시는 것을 잠깐 들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 사상四相의 아상, 인상 역시 그렇게 보고…
일행스님 /
-
돈점 논쟁은 돈문頓門 안에서의 일이다
돈頓과 점漸은 연속과 불연속의 문제 ‘돈’과 ‘점’의 대비는 ‘연속과 불연속’의 문제다. 연속은 ‘어떤 전제가 유효할 수 있는 체제·계열·범주의 지속적 유지와 연장’이고, ‘어떤 전제를 토…
박태원 /
-
왕실 비빈과 사족 여성을 위한 비구니원의 흥망
조선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수축할 때 고려의 유풍을 이어 궁궐 내에 왕실 원당으로써 내원당內願堂을 세우고, 궁궐 밖에 왕실 비빈과 사족 여성을 위한 정업원淨業院을 두었다. 정업원은 안일원安…
이종수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