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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중·근세 순수선의 등불을 밝힌 슈호 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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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5 년 1 월 [통권 제141호]  /     /  작성일25-01-04 21:12  /   조회7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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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선 이야기 13

 

1325년 궁중에서는 고다이고 일왕의 참석 하에 대론이 행해졌다. 그 당시의 연호를 사용한 쇼추正中의 종론이다. 구불교의 대표로는 천태종의 겐에 호인玄慧法印을 필두로 9명이, 선종에서는 임제종의 츠오 교엔通翁鏡圓과 슈호 묘초宗峰妙超(1282〜1337)가 나왔다. 중세 신불교의 교선敎線 확대, 특히 선종의 활약으로 위기감에 휩싸인 구불교가 사활을 건 대론이었다. 그들이 논파할 핵심은 제불조사의 경전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위였다.

 

구불교와 신불교의 사활을 건 대론

 

겐에가 먼저 물었다. “무엇인가, 이 교외별전의 선은?” 슈호가 응수했다. “팔각의 맷돌[磨盤]이 허공을 날아다닌다.” 교리에 집착해 있던 겐에는 그 말뜻을 알지 못했다. 침묵이 흘렀다. 한 승려가 상자를 들고나왔다. 그러자 슈호가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 승려는 “이것은 건곤乾坤의 상자.”라고 대답했다. 슈호는 그것을 부숴 버리고 “건곤의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자, 그 승려는 “졌습니다.”라고 했다. 

 

사진 1. 슈호 묘초 초상. 사진: 위키피디아.

 

항복한 이 승려는 후에 슈호의 제자가 되었다. 겐에는 사량분별을 끊은 경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벽암록』 제47칙을 알지 못한 것이다. 어떤 승이 운문에게 “어떤 것이 법신인가?”라고 묻자 운문은 “여섯(육근)으로 파악할 수 없다[六不收].”고 했다. 원오는 이 대목의 착어에서 팔각의 맷돌을 이야기한 것이다. 육불수는 활구로써 오직 참구를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이는 다이토선大燈禪의 기품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다이토국사는 슈호를 말한다. 난포 조묘에서 슈호로, 슈호에서 간잔 에겐으로 3대에 걸친 오토칸應燈關의 계보야말로 일본 순수선의 보고다. 슈호는 젊은 시절 경률론 삼장을 공부했지만 한계를 느끼고 노숙들에게 참문했다. 20세 때 가마쿠라의 건장사에서 참선하고, 23세 때는 만수사의 고호 켄니치 문하에 정식으로 출가했다. 1307년 26세에 ‘운문의 관자關字’ 공안을 타파하여 난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슈호는 당시 난포에게 다음과 같은 투기投機의 게를 올렸다. 

 

한 번에 운문의 관을 투과시키니 동서남북의 활로를 통과한다.

저녁을 지나 아침에 노는 노상에는

이미 빈주濱州도 없어 다리 둘 곳 모두가 청풍을 일으킨다.

 

운문의 관을 투과시켜 보니 이미 옛길이 없어져 버렸다.

청천백일 모두가 나의 정원이다.

기륜機輪은 자유 전변하여 사람이 어디에도 이를 수 없다.

저 금색의 가섭존자도 팔짱을 끼고 물러날 수밖에 없다.

 

이로써 난포는 그를 “운문이 다시 온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난포는 슈호에게 ‘20년의 성태장양’을 명한다. 깨달음 뒤의 수행인 오후수悟後修 외에도 당시 선종의 진면목을 대중에게 드러내기 위한 노력을 요구했다. 지금의 위치와는 다소 다르지만 교토 오조五條의 다리 아래에서 45세까지 풍찬노숙을 시작했다. 저자거리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온갖 소란 속에서도 부동의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훗날 대덕사가 배출한 풍광風狂의 선사로 부르는 잇큐 소준一休宗純은 『광운집狂雲集』에서 “다이토 발분하여 온 천하에 빛난다.”며 그의 높은 기상을 읊기도 했다.

 

사진 2. 하나조노 법왕(출가한 상왕). 묘심사 소장.

 

대중들은 이구동성으로 “좌선을 한다면 사조 오조의 다리 위, 왕래하는 사람들을 심산의 나무로 보며.”라고 했다. 재색명리財色名利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잡사를 초월하여 동정 간 삼매에 들어야 진정한 수행자임을 보여준 것이다. 밀물과 썰물처럼 오가는 민중의 해조음을 들으며 중생 구제의 길을 더욱 깊고 넓게 확장했다. 

 

성태장양의 시기인 35세에 슈호의 명성을 들은 하나조노 왕은 그를 불렀다. 왕은 “불법의 부사의不思議, 왕법과 대좌한다.”고 말했다. 슈호는 “왕법의 부사의, 불법과 대좌한다.”고 응수했다. 왕의 의도는 지혜로 가득 찼다는 불법이 감히 최고의 권력인 왕법과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선수를 친 것이다. 슈호는 백성을 살리는 왕법은 그 권력을 잘 사용해야 함에도 모든 중생들을 평등하게 보는 불법과 감히 마주보는 것이 아닌가라고 힐문한 것이다.

 

왕은 그의 당당한 기개에 감복하여 제자가 되었다. 그는 후에 상당설법에서 “불법의 진리에서 보면, 이처럼 제군과 서로 마주 보고 섰을 때, 이미 수미산 5겹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다. 하물며 내가 무언가를 설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세 번 태어나 60겁이라는 긴 시간이 걸려도 헛된 일이다. 제군 가운데 이 일을 아는 자가 있는가. 한 사람이라도 나와서 청중과 함께 대결해 봄이 어떤가. 자 어떤가. 자, 어떤가.”(『다이토국사 어록』)라며 기염을 토한다.

 

중생 구제의 대열에 선 선종

 

중·근세를 통해 임제의 선맥을 지킨 다이토선이야말로 가마쿠라 막부에서 무로마치 막부로 넘어가는 치열한 정쟁 속에서도 순수선의 빛을 밝혔다. 그의 선풍은 오직 수선修禪에 전일한다는 점이다. 1326년 개창한 대덕사大德寺는 준재들이 탄생하는 못자리판이 되었다. 당시의 일왕들은 앞다투어 국가의 기원사로 지정했다.

 

사진 3. 대덕사 산문 금모각金毛閣 전경. 사진: PR TIMES 웹페이지.

 

고다이고 왕은 대덕사를 5산의 제1로 삼고자 했다. 단호히 거절했다. 슈호는 그가 머무는 사찰의 사격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한 당시 제1찰이었던 남선사 주지에 임명되었지만 즉시 사퇴했다. 구불교의 권승들은 고대의 국가 권력과 밀착하여 민중의 비참한 현실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세의 신불교들이 탄생한 배경에도 이러한 민중의 절규에 대한 불교의 대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선종 또한 그러한 중생 구제의 대열에 서 있었다.

 

슈호는 10개조의 엄격한 사규를 제정했다. 그 속에는 삼시의 근행 때 사용하는 경전과 다라니를 외지 못하는 자는 의발을 거두고 추방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절문에 들어선 소승, 초기 단계에 들어선 사미, 수행 단계에 들어선 걸승에 대한 조항에는 “삼시의 근행 외 시간에는 무용無用한 악행을 그치고, 학문을 한결같이 공부할 것. 만약 이 법을 어기면, 아프도록 5대의 곤장에 처하고 하루의 공양을 못 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수행을 위한 기본적인 경전 공부를 통해 본격적인 수행 준비를 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수행을 하더라도 그 방향을 정확히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사전 지식도 없다면 자기 점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엄격한 수행과 돈오견성의 강조

 

그는 일관되게 돈오頓悟를 주장했다. “나의 종宗은 오직 견성을 논하고 차제의 수행을 빌리지 않는다.”고 설했다. 그는 <유게>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사진 4. 대덕사 방장. 사진: 교토 사이드 웹페이지.

 

제군은 수행을 위해 이 도량에 와 있다. 생활을 위해 수행하지 말라. 어깨가 있으면 옷은 따라오며, 입이 있으면 음식은 따라온다. 24시간 깨달음을 구하라. 세월은 화살과 같다. 잡념을 갖지 말라. 간취하라. 간취하라. 노승 사후에 얼마나 이 도량이 번성하여 문도가 몰려들고, 작법이 행해져 송경하고, 오전 중에 식사한 후 하루 종일 내내 수행을 하는 생활이 설사 이뤄진다고 해도 불조의 깨달음은 말이나 문자로는 전해지지 않는다는 묘도妙道를 명심하지 않으면, 인과를 부정하고 진실은 땅에 떨어져 모두 마귀의 종족이 될 것이다.

 

노승이 세상을 떠나도 나의 제자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골에서 혼자서 근근이 생활하며, 띠 지붕의 초암에서 다리가 부러진 냄비에 야채를 끓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어도 일심으로 자기의 일을 규명하는 자는 나를 매일 대면하고 보은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을 누가 감히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근행하라, 근행하라.

- 『다이토국사 연보』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오직 일관된 수행에 투신하여 깨침을 이룰 것을 주문하고 있다. 법신에서 오고, 법신에서 가며, 법신에서 하나된 경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 5. 슈호 묘초 법어. 사진: MIHO 미술관 소장.

 

그의 제자들에게는 주로 어떠한 공안을 주었을까. 참선에는 남녀를 차별하지 않았다. 한 여성에게는 무자無字 공안을 주었다고도 한다. 그녀가 공부의 정도를 보이며 인가를 받고자 했지만 “아직은 아니다.”라며 각하했다. 그러자 이 여성은 공안 투과를 위한 방편을 원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이것저것 머리를 굴리면, 세월을 더해도 무자 공안의 투과는 어렵다.”[『다이토국사 가나(仮名) 법어』]며 깨우쳐 주었다. 오직 좌선과 공안만으로 깨달음에 이르도록 지도했다.

 

오로지 공안 탐구를 통해 견성하라

 

문하에는 하나조노 왕의 왕비도 있었다. 그녀에게 보낸 편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참선학도의 도리, 초심 때는 좌선 한길로 가야 한다. 좌선이라는 것은 결가부좌 혹은 반가부좌 하고 눈을 반쯤 뜨고 부모미생전의 본래면목을 간하라. 부모도 아직 나오지 않고, 천지도 아직 분화되지 않고, 나도 아직 사람의 형체를 받기 이전을 보라는 것이다. 본래면목은 모양도 없는 물건이다. 마치 허공과도 같고, 허공에는 모양도 없다. 따라서 불설에는 불신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설하신다.” 그리고 일념을 강조하며 모든 선악이 일념을 따라 일어난다고 한다. 일념의 본체는 없다. 본래면목은 생사윤회도 없는 불생불멸이다. “단지 일심이 즉 부처다. 마음 외에 따로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외도다.”라며 오직 견성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공안을 통한 일심의 경지에서 마침내 천지가 서로 맞부딪혀 깨지는 견성인 것이다.

 

17세기 초기 에도江戸 막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일본의 근세가 시작되었다. 중기에 이르러 임제종의 여러 파들은 거의 단절되었다. 하쿠인 에가쿠白隠慧鶴(1686〜1769)가 나와 중흥을 이루게 된다. 난포, 슈호, 간잔의 오토칸 선맥이 하쿠인에게 계승되었다. 슈호야말로 시대의 파도를 넘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6. 하쿠인 에가쿠白隠慧鶴(1686〜1769). 사진: 위키피디아.

 

그의 선풍은 묘심사의 개조가 된 간잔은 물론 대덕사의 2대인 뎃토 기코徹翁義亨, 3대 하쿠오 소운白翁宗雲, 4대 고케이 도진虎溪道壬으로 이어진다. 잇큐는 물론 그의 영향을 받아 와비차侘び茶를 창안한 무라타 주코村田珠光, 와비차의 완성자인 센노 리큐千利休, 작정가作庭家로 잘 알려진 고보리 엔슈小堀遠州 등의 예인들이 대덕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차와 관련해서는 다쿠앙 소호沢庵宗彭도 빼놓을 수 없다. 대덕사와 관계된 수많은 역사와 전설 등은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없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국보를 비롯한 유무형의 문화 예술품들 또한 일일이 소개할 수 없을 정도다. 현재의 대덕사는 24개의 탑두塔頭로 이뤄져 있다. 탑두는 조사나 개조의 탑이 있는 곳을 말하는데 일종의 암자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대덕사가 다방면의 임제종 인재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다른 파 승려들의 입사를 허락하지 않는 일류상승一流相承 제도를 운영한 것도 크다고 할 수 있다. 5산의 관찰官刹은 널리 인재를 구하는 시방주지제十方住持制를 운영해야만 했다. 인재풀이 넓지 않은 일류상승제의 한계가 있음에도 깨달음에 입각한 철저한 사자상승을 함으로써 오히려 권력과의 관계를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7당가람, 개산당, 금은누각 조영은 슈호에게는 눈곱만큼도 의미가 없었다. 성태장양은 그의 깨달음을 더욱 넓고 깊게 확립했다. 화광동진하며 긴 호흡으로 선문의 세계를 내다보았다. 그는 위없는 비로毘盧의 정상을 밟고 간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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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무, 법명 익선. 일본 교토 불교대학 석사, 문학박사. 한국불교학회 전부회장, 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원광대학교 일본어교육과 조교수. 저서로 『아시아불교 전통의 계승과 전환』(공저), 『佛教大学国際学術研究叢書: 仏教と社会』(공저)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일본불교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 교훈」 등이 있다. 현재 일본불교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wonyos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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