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옛거울古鏡’, 본래면목 그대로
페이지 정보
원택스님 / 2024 년 11 월 [통권 제139호] / / 작성일24-11-05 12:17 / 조회604회 / 댓글0건본문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불면석佛面石 옆 단풍나무 잎새도 어느새 불그스레 물이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포행을 마치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2024년 10월호 『고경』(통권 제138호)이 놓여 있었습니다. 지난달부터 편집과 제작처를 선연으로 옮기고 디자인을 바꿔 새롭게 제작을 하고 있는데, 10월호 표지가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30여 년 전인 94년 2월, 성철 종정예하의 열반과 관련된 일들이 얼추 정리되고 나서 현재 조계종 전계대화상이신 무관스님을 위시하여 당시 해인사 국장 스님들과 몇 분 보살들과 처음으로 미얀마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그 후 부산 고심정사 신도들과 두 차례 등 합하여 네 차례 미얀마 성지순례를 다녀온 저로서는 10월호를 장식한 미얀마 바간의 불탑을 보니, 틸로민로 사원을 비롯하여 1천여 년 전에 지어진 3,000여 개 이상의 사원과 불탑들이 눈에 선하게 그려져 마음에 더욱 다가왔습니다.
월간 『고경』 11월호가 통권으로는 제139호이니, 세상에 태어난 지도 어언 11년이 지나 곧 12살이 됩니다. 그런데 『고경』이 처음부터 월간지였던 것은 아닙니다. 『고경』의 탄생엔 사연이 있습니다.
월간 『고경』의 효시인 계간 『고경』
성철 종정예하께서 열반하신 후 저희 문도들은 가장 먼저 큰스님의 사리탑 불사를 논의하며 서로 간에 우의를 다지고 신심을 돈독히 하며, 큰스님의 가르침과 사상을 널리 펴고, 무엇보다 사리탑 불사에 동참하시는 분들에게 불사의 진행도 알릴 겸 소식지를 보내드리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즐겨 쓰시던 『고경古鏡』을 제호로 정하고, 계간지로 발행하기로 하였습니다.
“퇴옹당 성철 대종사 사리탑은 1996년 4월에 착공하여 열반 5주기를 맞는 1988년 11월에 완공할 계획입니다. 아무쪼록 이 크고 뜻깊은 성철 큰스님의 사리탑 건립 불사가 불자는 말할 것도 없고 온 국민의 관심과 동참 속에서 원만히 이루어지길 바라마지 않으며, 이 사리탑이 성철 종정예하의 정신을 세세토록 전하는 기념물로서 아름답고 빼어난 문화유산이 될 수 있도록 저희 문도들은 온갖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이러한 취지로 간행한 계간 『고경』은 1996년 봄호(창간호)를 시작으로 1998년 가을호(회향호)까지 열한 번을 발행하였습니다. 3개월에 한 번씩 성철 큰스님 사리탑 건립 불사의 모연募緣에 동참한 신도님들의 명단을 기록하여 불사 소식을 알려드렸고, 다시 듣는 가야산 사자후, 선의 바른길, 선어 산책,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연, 나의 삶 나의 기도 등을 주제로 여러분의 글을 실었고, 불사 회향과 더불어 계간지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유종의 미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회향호를 받아 보신 분들이 “포교지로서도 훌륭한 역할을 다하여 나름 기다려지는 잡지였는데, 사리탑 불사 회향과 더불어 회향한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라는 원성에 가까운 아쉬움을 가득 담아내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합니다. 그리하여 2021년 봄에 백련불교문화재단 사이트(www.songchol.com)를 전면 리뉴얼하면서 인터넷과 모바일에서 계간 『고경』(옛 고경)을 다시 보실 수 있도록 작업을 하였고, 월간 『고경』은 통권 제1호(2013년 5월호)부터 제137호(2024년 9월호)까지는 책 발행과 더불어 E-Book으로도 보실 수 있도록 하여 더 많은 분들이 『고경』을 만나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11년 동안 쉼 없이 달려온 월간 『고경』에 보내준 격려의 말씀
그로부터 또 세월이 훌쩍 흘러 2012년은 성철 큰스님 탄신 100주년(탄신일은 매년 음력 2월 19일)이 되는 해였습니다. 문도들은 탄신 100주년을 준비하며 2011년 4월 25일부터 2012년 2월 28까지 45주 동안 불교텔레비전(BTN)에서 매주 주제를 바꿔 가면서, 1967년 동안거 동안에 해인사 강원 큰방에서 설하신 법문과 대학생수련법회 때 하신 법문을 중심으로 ‘백일법문’을 방영하기로 하였습니다.
BTN의 특별기획에 응應하긴 했으나 큰스님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와 빠른 억양 때문에 시청률이 어떨까 걱정이 컸습니다. 그런데, BTN 담당자로부터 “원택스님, 이젠 화면 아래에 자막을 넣는 기술이 발달하였으니 걱정 마십시오. 게다가 강남 보살님들 중에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는 큰 충격에 빠지신 분들이 많으신 듯합니다. ‘정말 우리가 성철 큰스님을 너무나 모르고 살았네요. 그동안 불교 공부를 헛했나 봅니다’라며 한탄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라는 방영 후일담을 전해 주어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불교텔레비젼의 탄신 100주년 ‘백일법문’의 성공과 여러 행사를 마치고 나서 저는 문도들과 의논하여 2013년 5월에 옛 계간지 『고경』의 이름을 가져와서 월간지 『고경』을 무가지로 발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지금까지 통권 제138호(2024년 10월호)를 발행하니, 세월이 어느덧 10여 년이 흘렀습니다.
옛일을 회상하며 『고경』 10월호를 넘겨 보고 있는데, 전 백련암 신도회장인 문선희 보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회주스님, 지난 호부터 『고경』의 편집이 바뀌어 훨씬 시각적 효과가 뛰어나 책 읽기가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에는 표지 그림이 작아서 책이 작아 보이는 듯했는데, 제호 서체도 바뀌고 표지 인쇄가 책등을 넘어 뒤 1cm까지 넓어지니 책이 전보다 훨씬 크게 보입니다. 편집인들에게 고맙다고 전해 주십시오. 게다가 전에는 내용이 어려워서 머리가 아팠는데 요사이는 대중적으로 『고경』만 한 불교 월간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편집을 맡고 있는 서재영 원장님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해 주십시오.”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또한 아무 관심도 없는 듯하던 스님들로부터도 뜻밖의 격려를 받을 때가 있어서 매월 잡지를 발행한다는 게 여러모로 벅차고 힘이 드는 일이지만 그래도 꾸준히 10여 년을 해 온 보람이 있는 듯하여 마음이 놓이고 있습니다.
무욕無欲의 마음으로 살아온 세월
이 원고를 쓰고 있자니, 지난 9월 30일 해인사 보경당에서 있었던 해인총림 방장 추대의 일이 떠오릅니다. 해인사 산중을 지도하는 큰 어른 스님을 모시는 행사이니 화목하고 여유롭고, 모두가 환희하는 모습으로 밝고 밝은 표정으로 즐거워해야 하는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퇴옹당 성철 종정예하께서는 생전에 상좌들에게 엄명을 내려놓고 계셨습니다.
“내 상좌는 누구도 해인사 주지를 못 한다. 말사 주지도 못 한다.”
그러니 큰스님 상좌들은 백련암으로 출가하여 한 1년 정도 행자생활을 하면서 절 생활의 기본이 되는 후원에서 밥하는 것을 익히는 공양주나 아니면 몇 가지 반찬을 만드는 채공 소임을 살고, 그 일이 익어지면 법당이나 천태전, 영자전 소임으로 목탁 치는 법을 익힙니다. 이것을 마치면 큰스님께서 주시는 일본어로 된 불전들을 익혔습니다. 일본어로 된 불전을 읽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어 문법책을 원주 스님에게 얻어서 각자 혼자 공부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년 만에 통과되면 사미계를 받고 이어서 1년 안에 비구계를 받으면 그다음부터는 백련암에 더 있든지 아니면 각자의 인연대로 선방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백련암으로 출가해서 2~3년 있으면 대부분 백련암을 떠나게 되고, 해제를 하면 1년에 한 번 백련암에 와서 큰스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백련암의 관행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백련암에서 큰스님을 모시고 몇 년 살든지 하는 것은 자율에 맡기는 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스님들도 한 2~3년 큰스님을 모시다가 선방으로 떠나기 십상이었습니다.
해인사에 오래 살면서 제가 느낀 것은, 백련암 스님들은 대부분 해인사의 암자 스님들과는 거의 내왕이 없으니 남이나 다름없고 다만 제방 선원에서 대중으로 만나 서로 도반의 정을 다지는 정도이니 백련암 스님들 대부분은 해인사와는 깊은 정이 없는 뻣뻣한 스님들이라는 것입니다. 저 또한 큰스님께서 떠나라는 엄명이 없으셨으니 지금까지 백련암에 머물러 있고, 큰스님 생전에는 큰스님 시봉하느라 암자 스님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살아왔습니다.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큰스님께서 해인사 큰절 선원은 원융이가 맡고, 백련암은 원택이가 맡아서 살면 되지.”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긴 했지만, 직접 들은 적이 없으니 ‘그런 말씀을 하셨구나’ 하고 생각만 할 뿐입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내 상좌는 해인사 주지 못 한다’고 하신 뜻은, 공연히 상좌들끼리 나중에 서로 주지하려고 싸우는 경우가 있을까 싶어 일찍부터 권력 다툼을 자름과 동시에 정치에 관심 갖지 말고 오로지 견성즉불見性則佛에만 전념하라는 말씀일 거라 생각하고 저 또한 지금까지 무욕심無欲心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법보종찰 해인사로 우뚝 서길 바라며
2014년 12월 23일, 제11대 조계종 종정이자 해인총림 방장이셨던 법전스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해인총림은 새로 방장을 추대하게 되었습니다. 총림에서 방장스님은 다수의 뜻을 모아 추대하는 게 그간의 관례였는데, 2015년 3월에는 대원 대종사와 원각 대종사 두 분이 출마하여 전례 없이 투표를 통해 원각 대종사를 제9대 해인총림 방장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러나 제방의 총림에서는 “방장스님을 추대로 모셔야지 해인총림에서 방장 후보를 내고 경선으로 진행한다는 것이 웬 말이야?”라고 대단한 불만을 표시하고, “이제 해인사가 ‘해진사’가 되겠다.”라고 격한 실망감을 토로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되어 참담함이 그지없었습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방장 추대 건이 마무리되고 예년처럼 대중과 함께 봉암사로 대중공양을 갔다가 수좌로 계신 적명 큰스님께 단단히 꾸중을 들었습니다.
저희 문도들은 큰스님 열반 후에 “큰스님 행장에서 무엇보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에 들어가신 것이 역사적 사건이지 않겠는가? 스님께서 대중들에게 ‘봉암사의 꿈’이라는 법문을 하신 적도 있고, 또 그 내용을 손수 글로도 남겨 놓으셨으니 봉암사 대중공양은 꼭 하도록 합시다.”라고 의견을 모으고, 1994년부터 하안거는 부산팀, 동안거는 대구팀으로 나누어 매년 대중공양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해인사에서 방장 어른 스님을 추대로 모셔야지 선거가 웬 말이냐 말이오, 전례가 없잖아요. 어찌 해인총림에서 방장스님을 추대가 아닌 투표로 뽑는다고 선례를 만든단 말이오. 해인사에 사람이 그리 없는가. 너무 한심스럽고 개탄스럽소. 백련암 대중들은 뭣했소. 가서 선거판을 뒤집어 놓았어야지, 그것이 성철 큰스님 뜻 아니겠소!”
지난 9월 30일 오후 2시, 해인사 보경당에서는 제10대 해인총림 방장을 선출하기 위한 산중총회가 열렸습니다. 자격 요건을 갖춘 해인사 대중 636명 중 485명이 참석하여 원각 대종사와 대원 대종사를 후보로 모시고 또다시 방장 선출 총회를 개최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사중과 세간에서 들려오는 여러 소문도 많고 하여 방장 추대가 잘 치러질까 큰 걱정이었습니다. 단번에 만장일치로 한 분을 추대했으면 좋았겠지만 후보가 두 분이다 보니 아쉽게도 무기명 투표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간에서 보는 선거전과 달리 질서 있게 투표하고, 개표도 신중하게 진행하였고, 개표 종료 후에는 만장일치로 대원 대종사를 해인총림 방장으로 추대하였으니, 여전히 총림의 전통이 살아 있는 듯하여 천만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오늘에도 적명 큰스님의 큰 꾸중은 피하지 못한 듯하여 가신 어른 스님께 그저 죄송죄송할 뿐입니다.
그동안 해인총림 방장 일로 사중寺中은 물론 세간의 불자님들도 마음이 소란스러웠을 수도 있겠으나 이번 산중총회의 소식을 접하시면서는 “역시 1200년 역사를 품은 법보종찰이로구나.”라는 확신에 신심이 새로워지셨으리라 믿습니다. 대원 대종사께서 11월 5일 열릴 중앙종회 추대 절차를 거쳐 제10대 해인총림의 방장에 오르시게 되면, 해인총림이 법보종찰로서 다시금 우뚝 서도록 총림의 모든 대중 스님들이 힘을 합쳐 주시고, 불자님들은 불보살의 가피 아래 더욱 신심을 내주시길 바랍니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옛거울古鏡’, 본래면목 그대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불면석佛面石 옆 단풍나무 잎새도 어느새 불그스레 물이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포행을 마치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2024년 10월호 『고경』(통권 …
원택스님 /
-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다네
어렸을 때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시절에 화장실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거든요. 무덤 옆으로 지나갈 때는 대낮이라도 무서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무덤 옆으로야 좀체 지나…
서종택 /
-
구루 린뽀체를 따라서 삼예사원으로
공땅라모를 넘어 설역고원雪域高原 강짼으로 현재 네팔과 티베트 땅을 가르는 고개 중에 ‘공땅라모(Gongtang Lamo, 孔唐拉姆)’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다. ‘공땅’은 지명이니 ‘공땅…
김규현 /
-
햇살을 솜틀하여 만든 알토란 사찰음식
입동이 들어 있는 달이고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11월의 풍광은 아직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이제 우리는 야무지게 월동 준비를 해야 합니다. 풀과 나무는 성장을 멈추고 모든 것을 다 털어 냅…
박성희 /
-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없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
성철스님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