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와 불교윤리 ]
먹방의 시대 - 불교적으로 먹고, 윤리적으로 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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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 2024 년 11 월 [통권 제139호] / / 작성일24-11-04 18:46 / 조회106회 / 댓글0건본문
삶에 여유가 생기면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맛’의 이벤트에 중독성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TV와 유튜브 등에서는 음식이나 요리법을 주제로 편성된 이른바 ‘먹방(먹는 방송)’이 홍수처럼 넘쳐난다. 방송이 만든 스타 요리사도 여럿이나 등장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국회의원들과 언쟁을 벌였던 유명 요리사의 당당한 태도가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얼마 전에는 유튜브에서 100만 명 이상의 조회 수를 자랑하던 인기 먹방의 여성 진행자가 복잡한 개인사로 일간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문득 어떤 일에서든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라고 가르쳤던 불교의 음식문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채식은 시대적 요청인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고소하고 쫄깃한 식감의 고기 맛은 쉽게 거부하기 힘든 인간적 유혹일 것이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의 극히 일부분만이라도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우리들의 음식문화는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많은 동물권리·복지운동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미국에서만 1년에 100억 마리 이상의 포유류와 조류가 단지 인간들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그들의 단 하나뿐인 생명을 희생당한다.(주1) 벌써 10년도 더 지난 통계 숫자다. 그동안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우리는 ‘맛’이라는 쾌락의 일부로 고기를 소비하지만, 그들은 ‘목숨’이라는 삶의 전부를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통째로 갖다 바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자는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상대적 기호의 문제지만, 후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의 포기이다.
식용동물의 대량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위생성과 동물이 겪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 외에도 그들이 뿜어내는 엄청난 양의 메탄가스와 분뇨의 방출은 생명·생태계의 혼란과 직결되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요즘 들어 일반인들의 건강음식으로 각광받고 있는 채식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인식을 반영한 대안적 ‘음식윤리(food ethics, meal ethics)’의 모색과도 상당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먹어야 비로소 살 수 있는 인간존재에게 음식은 사회적 맥락과 윤리적 맥락의 함축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채식의 유행은 불교윤리적 담론의 주제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전 지구적 화두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윌 터틀(Will Tuttle)에 의하면 불살생계의 실천을 으뜸으로 삼아야 할 불자들 가운데서도 이른바 삼종정육三種淨肉의 비유를 들어 동물성 음식물의 섭취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아 개탄스럽다고 말한다. 붓다는 분명히 육식을 금지했지만 주어진 환경상황이 도저히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세 가지 깨끗한 고기, 즉 나를 위해 죽이는 것을 보지 못했고; 나를 위해 죽였다는 말을 듣지 못한 고기; 그리고 나를 위해 죽였다는 의심이 들지 않은 고기에 한해서는 억지로 사양하지 말고 수행의 양식으로 삼아도 좋다는, 조건부 허락을 했다.
윌 터틀은 이를 후대 사람들이 붓다가 육식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논리적 배경으로 삼는 것은 삼정육의 취지를 크게 왜곡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오늘날 대형 마트에서 구매할 수 있는 깔끔한 모양의 포장육은 그야말로 삼정육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소비하는 양만큼 재고량이 줄어들 것이 뻔하며 이는 다시 새로운 고기의 수요를 창출하게 된다. 그것의 결과는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동물들이 얼마 뒤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 한다는 비극적 사실이다. 이러한 수요와 공급의 원리는 우리가 동물들을 직접적으로 살상하는 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주2)
리어 키스(Lierre Keith). 미국 작가이자 급진적 페미니스트이자 식품 운동가(좌). 리어 키스 책 『채식의 배신』(부키, 2013).(우)
이처럼 불자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육식의 습관을 버리지 않는 한 불살생계의 위반과 환경파괴의 업보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지구공동체의 종말을 스스로 앞당기고 있는 인류의 공업共業 짓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많은 사회문제의 원인은 육식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채식으로 바꾸기만 한다면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을까?(주3) 유감스럽게도 인류는 장구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육식과 채식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동물로 자리 잡았다는, 태생적 한계 속에 살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는 데에 우리의 도덕적 고민이 있다.
불자들은 채식을 하고 있는가, 아니 해야만 하는가
붓다의 중도주의적 세계관은 음식윤리에 있어서도 육식과 채식 가운데 어느 한쪽의 선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는 도덕적 세련됨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새삼스럽게 불교의 음식윤리를 되돌아보는 이유도 음식을 대하는 인식과 태도에서 보여주고 있는 불교의 가치중립적인 경향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대인들은 불교의 중도주의적 음식윤리로부터 배울 것이 적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어쩌면 음식과 관련된 붓다의 가르침은 바람직하다고만 볼 수 없는 ‘육식현실주의’와 무턱대고 지지만 할 수 없는 ‘채식이상주의’를 넘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생태계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균형 잡힌 음식윤리를 모색하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높여 주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붓다의 중도주의는 감각기관을 즐겁게 하는 ‘세속적 쾌락주의’와 감각기관을 고통스럽게 하는 ‘종교적 고행주의’를 모두 배제했다. 이는 음식의 경우에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육식이든 채식이든 관계없이 그것을 지나치게 즐기거나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것은 둘 다 붓다의 중도주의적 가치관에 어긋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어떤 경우에도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계율은 존재하지 않는다.(주4) 다만 살아 있는 생명체를 직접 죽이거나; 남을 시켜서 죽이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뿐이다. 이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불살생계의 정신과 그것의 도덕적 함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붓다의 생전에도 ‘비린 것’에 해당하는 고기와 생선을 먹어도 좋다고 한 붓다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붓다는 ‘비린 것’이란 생선이나 고기 음식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짓는 ‘악행’이라고 역설했다. 그래서 자신은 비린 것을 먹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악행을 삼가라고 가르치는 사람임을 표방했던 것이다.(주5) 그런 붓다에게는 고기와 생선을 전혀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보다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잡식주의자 내지는 육식주의자가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사람으로 간주되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말한 삼종정육의 본래 취지는 환경에 따라 고기를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 항상 고기를 마음대로 먹어도 좋다는 것은 아니었다. 불자인 우리가 삼종정육의 오남용을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역사·사회·문화적인 배경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먹는 존재인 인간은 동물이나 생선 혹은 식물을 재료로 삼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단 하루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죽은 다른 생명을 먹이로 삼을 때 비로소 생존과 번식이 가능하다. 생존과 번식을 추구하지 않는 자연존재는 더 이상 삶의 의미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 이는 인간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생존법칙이자 자연적 존재의 숙명이기도 하다.
너의 죽음을 통해서만 내가 삶을 얻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야말로 자연의 불가사의함 그 자체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생산되고 또한 소비된다. 불교에서 음식은 자신의 몸을 유지하고 일을 하기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물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절에서 공양할 때마다 암송하는 오관게五觀偈에서도 그런 마음가짐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육식이든 채식이든 어느 한쪽에 집착하거나 다른 한쪽을 병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동시에 경계해야 할 불교적 관점의 음식윤리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불자들의 일상적 음식 습관이 간단치 않은 윤리적 선택임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겠다.
불교적으로 먹기와 윤리적 살기가 대안이다
붓다에게 음식은 말 그대로 심신을 지탱시켜 주는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비유로 든 이야기는 섬뜩할 정도이다. 새삼 음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어 갑자기 먹는 것에 대한 종교·철학적 의미와 함께 인간적으로도 숙연해짐을 느낀다. 붓다는 사막을 건너가던 도중에 양식이 떨어진 부부가 자신들의 사랑하는 외동아들을 잡아 “육포를 만들고 꼬치에 꿰어 구워서 만든 (아들의) 고기(주6)”를 먹으면서 끝까지 사막을 건넌다는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있다. 눈물을 머금고 아들의 고기를 씹는 부모의 혓바닥에 맛이나 향기가 느껴졌을 리 만무하다.
이처럼 붓다는 오직 생명을 유지하는 데만 그리고 수행에 필요한 범위 안에서만 음식의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너무 많이 먹거나 아무것도 먹지 않는 양극단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그와 같은 음식습관은 어떠한 경우에도 깨달음의 자양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주7) 과식은 졸음과 나태를 불러오고 단식은 쇠약과 혼미를 가져올 뿐임을 자신의 수행 경험상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붓다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돌이켜 보면 육식과 채식의 구분을 떠나 음식 자체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을 강조한 붓다의 음식윤리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인식을 떨칠 수 없다. 음식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심신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양과 질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붓다가 병들고 뚱뚱한 현대인들에게(주8) 던지는 그야말로 묵직한 경책이 아닌가 싶다.
불교의 중도주의적 음식윤리는 서양윤리학에서 말하는 ‘환경 덕 윤리(environmental virtue ethics)’의 입장과도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도 불교의 음식윤리는 붓다의 가르침이 흘러간 과거형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는 현재진행형임을 다시 한 번 더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렇다면 웰빙시대의 음식윤리는 ‘불교적으로 (생각하고) 먹기’와 ‘윤리적으로 (행동하고) 살기’가 서로 둘이 아니라 곧 하나의 삶으로 파악되는 불교의 중도주의적 음식윤리문화의 전통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각주>
(주1) 피터 싱어 엮음, 노승영 옮김, 『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서울:시대의 창, 2012), p.278.
(주2) 윌 터틀 지음, 김재성 옮김, 『월드피스 다이어트』(서울:황소자리, 2013), p.277.
(주3) 윤리적 채식주의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는 특히 리어 키스 지음, 김희정 옮김, 『채식의 배신』(서울: 부키, 2013), 카를로 페트리니 엮음, 김종덕, 이경남 옮김, 『슬로푸드』(서울: 나무 심는 사람, 2003) 등을 참조할 것.
(주4) 마성, “불교는 육식을 금하는 종교인가”, 『불교평론(vol.6, no.2)』(2004.06), p.219.
(주5) 전재성 역주, 『숫따니빠다』 「아마간다숫따」(서울: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13), pp.140〜14 참조.
(주6) 각묵 스님 역. 『상윳따 니카야』, 2권(울산:초기 불전연구원, 2009, pp.299〜302
(주7) 공만식, “초기불교의 음식과 수행의 관계에 대한 고찰” 『선문화연구』 제4집(2006. 08), pp.1〜35.
(주8) 이와 관련해서는 Rosalind Hursthouse, “Environmental Virtue Ethics”, in Rebecca L. Walker and P.J. Ivanoe. eds., Working Virtue: virtue ethics and contemporary moral problems, E-book, NetLibrary, Inc.(2007); Raymond Anthony, “The Ethics of Food for Tomorrow: On the viability of agrarianism- How Far can it Go? Comments on Paul Thompson’s Agrarian Vision”, Journal of Agricultural and Environmental Ethics, vol.25(2012); Paul R. Ehrlich, “Ecoethics: Now Central to All Ethics”, Bioethical Inquiry, vol.6(2009) 등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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