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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조건에 따라 구분되는 ‘두 가지 의도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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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4 년 11 월 [통권 제139호]  /     /  작성일24-11-04 16:53  /   조회13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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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는 상반된 두 맥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 문헌의 언어를 비롯하여 모든 언어를 음미할 때 언제나 적용해야 할 두 가지 원칙(주1) 가운데, <모든 언어는 그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포착하여 그 조건들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라는 원칙을 적용하면, 12연기의 두 가지 맥락이 지닌 의미가 잘 포착된다.

 

12연기의 두 가지 맥락이 지닌 의미

 

12연기를 형성하는 ‘조건들의 인과적 연관’은 두 가지 상반되는 맥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무명을 조건으로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行]이,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行]을 조건으로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삼는) 알음알이[識]가 발생하고 …”라는 맥락이다(생연기生緣起, 순관順觀).

 

다른 하나는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行]이 소멸하고,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行]이 소멸하기 때문에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삼는) 알음알이[識]가 소멸하고 …”라는 맥락이다(멸연기滅緣起, 역관逆觀).(주2) ‘무명에 매인 고통의 발생 연기’와 ‘소멸 연기’라는 상반된 두 가지 연기 맥락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12연기 탐구의 핵심이다.

 

그런데 12연기 이해를 대변해 온 부파불교 유부有部의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과거생·현재생·미래생에 걸친 두 겹의 인과설)과 그 영향 아래에 전개되는 학인들의 12연기 이해는 근본적으로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전자의 맥락을 ‘무명 연기無明緣起’, 후자의 맥락을 ‘지혜 연기明緣起’라 부르면서 두 맥락의 의미에 접근해 본다.

 

붓다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근본무지[無明]에 매여 있는 중생 인간’을 대상으로 펼친다. 따라서 붓다의 설법에서 언급되는 행[行]의 다양한 용례는, 무명 연기 맥락에서 생겨나는 ‘무명을 조건으로 삼는 의도 작용’과 연관되어 있다. 12연기의 행, ‘자아를 이루는 유형·무형의 다섯 부류 현상의 무더기’(오온五蘊, 몸色蘊·느낌受蘊·지각想蘊·의지行蘊·알음알이識蘊) 가운데 행온行蘊의 행, 제행무상諸行無常·제행개고諸行皆苦/一切皆苦에서의 행, ‘몸을 통해 펼치는 의도 작용[身行]’·‘말을 통해 펼치는 의도 작용[口行]’·‘생각을 통해 펼치는 의도 작용[意行]’에서의 행 등, 행行(saṅkhāra)에 관한 니까야·아함의 다양한 용례의 통상적 맥락은 ‘근본무지와 함께하는 의도 작용’, 즉 ‘근본무지를 조건으로 삼는 의도 작용’과 연관된다.

 

사진 1. 토끼로 태어난 전생 이야기(기원전 2세기 후반, 인도 알라하바드 박물관).

 

그러나 똑같은 행이라는 용어라도 ‘수행으로 성취하는 지혜의 역할을 드러내는 맥락’(지혜 연기 맥락)에서 사용된다면, 다른 의미와 내용을 지니게 된다. ‘지혜를 조건으로 삼는 의도 작용으로 전환되는 의미’나 ‘지혜로운 의도 작용과 통하는 내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같은 ‘이놈’이라는 말이 맥락에 따라서는 비방이 되기도 하고 애칭이 되기도 하는 것과 같다. 12연기의 ‘지혜 연기[明緣起]’ 맥락에서의 행, ‘집착에 물든 오온[五取蘊]’에서가 아니라 ‘집착에서 풀려난 오온五蘊’에서의 행, 지혜를 확보한 수행자의 ‘몸을 통해 펼치는 의도 작용[身行]’·‘말을 통해 펼치는 의도 작용[口行]’·‘생각을 통해 펼치는 의도 작용[意行]’에서의 행 등은, 모두 ‘지혜를 조건으로 삼는 의도 작용’과 관련된다. 

 

만약 맥락이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의미나 내용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의도를 그치는 것이 열반이다’라고 한다면, 붓다를 비롯한 지혜를 완성한 이들의 ‘오온五蘊 자아’에서의 의도 작용이나 몸[身]·말[口]·생각[意]을 통해 펼치는 의도 작용은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깨달음을 완성한 후 45년 동안, 붓다는 오온 자아의 의도 작용과 몸·말·생각을 통한 의도 작용을 쉼 없이 펼쳤다. 붓다의 모든 의도 작용은 분명 ‘지혜를 조건으로 삼는 의도 작용’이다. 붓다는 그런 의도 작용으로써 열반의 삶을 누리고 중생 교화를 구현했다. 붓다의 어떤 설법도 ‘의도 작용 자체의 그침’을 설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12연기의 ‘무명 연기’에서는 ‘의도 작용[行]’과 알음알이[識]의 연기적 발생을 설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무명 연기가 ‘모든 의도 작용의 발생’과 ‘모든 알음알이의 발생’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무명을 조건으로 삼는 의도 작용’과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삼는 알음알이’의 발생을 설한다는 점이다.

 

12연기의 ‘지혜 연기’에서는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의 연기적 소멸을 설한다. 여기서도 주목해야 할 점은, ‘모든 의도 작용의 소멸’과 ‘모든 알음알이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명을 조건으로 삼는 의도 작용의 소멸’과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삼는 알음알이의 소멸’을 말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무명을 조건으로 삼는 의도 작용[行]’의 소멸〉은 〈‘지혜를 조건으로 삼는 의도 작용’의 생겨남〉을,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삼는 알음알이의 소멸〉은 〈‘지혜와 함께하는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삼는 알음알이의 생겨남〉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는 조건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12연기에 대한 유부有部의 해석과 신비주의적 몽환

 

12연기를 ‘과거생·현재생·미래생에 걸친 윤회의 태생학적 인과를 설명하는 것’이라 해석하는 교학이 있다. 부파불교 유부有部의 이른바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分位緣起說)이 그것이다. 유부는,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 작용이,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알음알이[識]가, …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라는 무명 연기를, 삼세三世에 걸친 윤회 발생의 인과를 설명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그리고 무명 연기의 12항목을 과거생(無明과 行, 과거생에 지은 현재생의 원인), 현재생(識·名色·六入·觸·受/현재생에서의 결과, 愛·取·有/미래생의 원인), 미래생(生과 老死, 미래생에서의 결과)에 배분하여 삼세에 걸쳐 전개되는 12연기의 태생학적 인과를 설명한다.

 

만약 12연기에 대한 유부의 해석이, 〈‘변화[無常]와 관계[緣起]에 연루된 모든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識]’가 소멸하면 윤회가 끝나고 해탈·열반이 이루어진다〉라는 관점의 표현이라면, ‘변화·관계의 모든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 현상을 초월한 불변·절대의 신비 경지나 존재’를 해탈·열반이라 이해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열반에 대한 유부의 해석은 이런 관점을 펼치고 있다.(주3) 유부는 열반 궁극실재론의 근거를 12연기에서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유부의 이러한 12연기 해석에는 ‘변화·관계의 끈을 끊고 불변·독자·절대의 실재를 기웃거리는 신비주의적 몽환’이 어른거린다. 

 

열반 궁극실재론은 ‘변화·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관점·이해와 의도 작용 및 알음알이’와의 연緣을 아예 끊으려는 신비주의 몽환에서 생겨난 ‘허공에 핀 꽃[空華]’이다. 12연기를 ‘변화·관계의 모든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의 발생·소멸에 관한 설법’으로 읽는 것은, 그 허공 꽃을 피워내는 거름이다. 유부의 해석은 현재에도 12연기 및 초기불교 이해 전반에 걸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12연기에 대한 유부의 이해로 인해 붓다의 연기 법설 앞에는 거대한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이 장애물을 돌파하지 않는 한, 연기 법설의 본령은 계속 은폐되거나 왜곡될 것이다.

 

12연기를 ‘변화·관계의 모든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識]의 발생·소멸에 관한 설법’으로 읽으면, <‘지금 여기의 경험 현상’에서 해탈·열반을 누리게 하는 붓다 법설의 생명력>이 일시에 증발한다. ‘변화·관계의 지혜로운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를 펼쳐 세상을 이롭게 한 붓다의 삶’과도 맞지 않다. ‘변화와 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는 인간 경험의 모든 유형과 수준을 구성하는 핵심 조건이다. ‘변화·관계의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가 없다면 해탈·열반의 수행과 체득도 없고, 해탈·열반의 가르침도 불가능하다. 무명에 매이는 삶의 지속적 순환(윤회)도 그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 때문이고, 무명을 밝혀 윤회적 순환 계열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도 그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 때문에 가능하다. ‘변화와 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는 해탈의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있는 ‘언어인간 특유의 면모’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변화·관계의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 자체의 전면적 소멸’ 이후에 기대할 것은 허무의 적막과 죽음밖에 없다.

 

‘의도 작용’은 그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관점·이해)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

 

12연기의 두 맥락을 모두 고려하면, 의도 작용은 그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근본무지를 조건으로 삼는 의도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근본무지를 조건으로 삼지 않는 의도 작용’, 다시 말해 ‘지혜를 조건으로 삼는 의도 작용’이다. <지혜·해탈·열반의 삶은 행行의 지배에서 풀려난 삶이다>라고 하는 붓다의 설법에서 언급되는 ‘행’은, ‘근본무지[無明]를 조건으로 삼아 발생하는 의도 작용’이다. 이 행은 ‘모든 의도 작용’이 아니라, ‘무명을 조건으로 삼는 의도 작용’이다.

 

인간의 모든 희망과 절망은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識]’, 그리고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의 내용을 결정하는 ‘관점과 이해’에서 발원한다. 해탈·열반은, 중생적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의 발생 조건이었던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무지[無明]’를 ‘사실 그대로 이해하는 지혜[明知]’로 바꾸는 데서 이루어진다. ‘무명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에서는 속박과 고통이 발생하고, ‘지혜를 조건으로 발생하는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에서는 해탈의 풀려남과 열반의 안락을 누린다.

 

사진 2. 사리함을 옮기는 코끼리(기원전 2세기 후반, 인도 알라하바드 박물관).

 

팔정도의 정사正思(samma-saṅkappa)는 ‘지혜를 조건으로 삼아 생겨나는 의도 작용’, ‘지혜롭게 생각을 일으킴[如理作意, yoniso-manasikāra]’은 <지혜 및 ‘지혜와 함께하는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알음알이>에 해당한다. 대승 경론에 등장하는 ‘온전한 식[淨識]’·‘참된 식[眞識]’·‘온전하여 허물이 없는 식[淸淨無垢識]’ 등도 <지혜 및 ‘지혜와 함께하는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알음알이>의 맥락에서 채택되는 용어다. 이 용어들은, ‘변화·관계의 알음알이를 초월한 불변·절대의 알음알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변하는 알음알이’가 <‘근본무지 및 그에 매인 의도 작용’에서 생기는 알음알이>로부터 <‘지혜 및 그와 함께하는 의도 작용’에서 일으키는 알음알이>로 바뀐 국면을 지칭한다.

 

<같은 용어라도 발생 조건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라는 연기적 사유를 적용하여 ‘지혜 연기’의 ‘연기 항項’들을 읽으면,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의 긍정적 의미가 포착된다.(주4)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行]이 소멸하고,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行]이 소멸하기 때문에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삼는) 알음알이[識]가 소멸하며 …”라는 ‘지혜 연기’의 구절은,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지혜와 함께하는 의도 작용’이 생겨나고, ‘지혜와 함께하는 의도 작용’이 생겨나기 때문에 ‘지혜와 함께하는 의도 작용에 따르는 알음알이[識]’가 생겨나며 …”라고 바꾸어 읽을 수 있다. <무명이 소멸한다>라는 것은 <지혜가 생겨난다>라는 말의 부정형 서술이기 때문이다.

 

붓다가 ‘근본무지에 매인 의도 작용[行, saṅkhāra]’을 문제 삼는 이유는 ‘지혜와 함께하는 의도 작용’, 다시 말해 ‘지혜를 조건으로 삼아 일으키는 의도 작용’을 일깨워 주려는 것이다. 불교가 삶과 세상에 대한 허무와 염세의 길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변화와 관계로 펼치는 지혜로운 의도 작용과 알음알이’를 통해 ‘지금 여기의 삶과 세상’을 ‘더욱 좋게 만들어 함께 누리는 것’. - 그것이 붓다의 길이고, 해탈·열반을 향한 중도 수행이다. 

 

<각주>

(주1) 『고경』 제136호(2024년 8월호).

(주2) 『상윳따 니까야』 「연기경(Paṭiccasamuppāda-sutta)(S12:1)/각묵 번역 『상윳따 니까야』 제2권, pp.85〜91; 「분석경(Vibhaṅga-sutta)」(S12:2)/각묵 번역 『상윳따 니까야』 제2권, pp.92〜103. 필자가 번역문의 ‘의도적 행위들[行]’을 ‘의도 작용들[行]’로 고치고 괄호 내용을 삽입하였다.

(주3) 유부의 이런 관점은 이후의 글에서 다시 자세히 설명한다. 

(주4) 12연기 전체에 대한 상세한 의견은 ‘붓다의 연기 법설’을 주제로 삼는 글에서 개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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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고려대에서 불교철학으로 석·박사 취득. 울산대 철학과에서 불교, 노자, 장자 강의. 주요 저서로는 『원효전서 번역』, 『대승기신론사상연구』, 『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 『돈점 진리담론』, 『원효의 화쟁철학』, 『원효의 통섭철학』,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이해수행과 마음수행』 등이 있다.
twpark@ul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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