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빛의 말씀]
화엄의 종취와 의상대사의 깨친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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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5 년 3 월 [통권 제143호] / / 작성일25-03-09 15:36 / 조회4회 / 댓글0건본문
여러 가지 교敎 가운데 제일 높은 가르침이 화엄종華嚴宗이라는 것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화엄종은 당나라의 두순杜順(주1)화상, 두순화상 밑에 지엄智儼(주2)화상, 지엄화상 밑에 현수賢首(주3)스님으로 이어집니다. 현수스님은 지엄스님 밑에서 우리나라 의상조사와 같이 배운 사형사제간입니다.
현수대사의 화엄연기법
화엄종의 제3조인 현수스님은 두순화상과 지엄화상, 즉 제심조사帝心祖師와 운화조사雲華祖師가 개척해 놓은 화엄교리를 집대성해서 화엄종을 완전히 조직하고, 실제적인 화엄의 종조宗祖가 되었습니다. 즉, 교문敎門에서는 현수스님이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현수스님의 말이 교가敎家를 대변한다고 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엄종은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설하여서 연기법으로 근본 종취를 삼았으니, 화엄종의 연기가 교가에서는 극칙極則입니다. 그 이상의 이론 교법은 없습니다. 이것은 천하의 공론公論이고 내 개인의 의견이 아닙니다. 현수스님은 교가의 최고 권위자이고, 화엄종의 연기는 교가의 구경究竟의 원리인데, 이 연기법에 대해서 현수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큰 연기법은 본래 구족해 있으니, 반드시 마음에서 그것을 증득해야 하지,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이것을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다면 연기법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반드시 해석을 끊고 실제로 마음을 닦아야 정견正見에 이를 수 있다. 만약 마음으로 해석한 것을 증득이라고 여긴다면 평생을 헛되게 보내는 것이다. 입으로 말하는 것이 증득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입으로만 말하고 마음에 깨침이 없는 사람은 미친 사람과 같다.
- 『화엄유심법계기』
‘이 큰 연기법’이란 화엄연기법華嚴緣起法을 말합니다. 화엄종을 가지고 말하니까 화엄연기법이지, 다른 말로 하면 일체법계연기법一切法界緣起法입니다. 즉, 일체 만법이 원만 구족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마음으로 증득해야지 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화엄연기는 교敎에 의지한 법이기 때문에 『화엄경』만 자꾸 외우고 글만 자꾸 보면 연기법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수스님은 화엄연기에 있어서 가장 최고 권위자인데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경經만 봐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 연기법을 알려면 반드시 마음에서 증득해야지 말로 얘기하다가는 연기법을 영원히 모릅니다.
만약 “이 연기법을 설명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다.”라 말한다면 이는 연기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말로써 연기법을 설명할 수 없고 문자로써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연기법을 마음에서 깨치지 않고 언어와 문자로 표현하려 한다면 이는 연기법을 영원히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어와 문자의 해석으로는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에 언어와 문자의 해석은 다 버리고 실제로 닦아야 합니다. 즉, 자기 마음에서 깨쳐야 하니, 이것이 정견正見에 이르는 길입니다.
만약 언어와 문자로 해석해서 연기법을 알려 한다면, 평생을 해 봤자 헛일입니다. 그림 속의 떡을 보고 아무리 입맛을 다셔 봤자 배가 안 부릅니다. 평생 동안 『화엄경』을 외워 봤자 헛일이니, 오직 마음에서 깨쳐야만 이 대연기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연기법을 설명하려야 설명할 수 없고, 문자로 표현하려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들어가면 곧바로 연기법에 들어갑니다.
만약 입으로는 말하나 마음에 깨침이 없는 사람이라면 입으로는 『화엄경』, 현수스님의 『탐현기探玄記』, 청량스님의 『소초疏抄』 등을 다 외우더라도 그건 입뿐이고, 마음속은 연기법을 실제 깨치지 못한 것입니다. 비유하면 ‘즉여광인卽如狂人’, 즉 미친 사람과 같습니다.
왜 교가의 최고 권위자인 현수스님이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서는 화엄연기법을 모르니, 언어와 문자만 숭상하고 마음에서 이것을 깨치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고 했겠습니까? 불법은 오직 깨치는 데 있고 언어와 문자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엄연기도 부처님 법이니, 깨침을 벗어나서는 부처님 가르침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언어와 문자만 따라가고 마음에서 깨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고 평생 동안 헛일만 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80권 『화엄경』에서는 연기법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마음으로 깨쳐야만 연기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데려다 어떤 사람을 똑같이 그리게 하고 불러보아도 그림 속 사람은 대답을 할 수 없으니, 그림은 실제 사람과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언어와 문자는 안내 책자나 소개문은 될 수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금강산을 알고 서울을 알려 한다면 영원토록 서울도 못 보고 금강산도 못 보고 평생을 헛일만 한 미친 사람이 됩니다. 현수스님뿐 아니라 교가에서도 유명한 큰스님들은 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교를 바로 알려면 현수스님 말씀과 같이 반드시 마음 가운데에서 깨쳐야 하니, 깨치는 데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불교가 아닙니다. 선과 교를 말할 것 없이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의상조사의 깨친 경계
의상義湘(주4)조사는 우리 동국東國 화엄의 초조初祖로 중국의 현수스님이 숭배했고, 스승인 지엄스님도 당신보다 낫다고 의상스님을 칭찬했습니다. 다음에 조사는 우리 동국東國 화엄의 초조初祖로 중국의 현수스님이 숭배했고, 스승인 지엄스님도 당신보다 낫다고 의상스님을 칭찬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것은 현수스님이 의상스님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부처님의 광명을 더 빛나게 하고 법륜을 다시 굴려서 정법을 오래도록 머물게 할 분은 오직 스님뿐이십니다.
- 『삼국유사』 권4, 「현수여의상서」
현수스님이 의상조사를 평가하기를,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난 뒤에 불법을 다시 중흥시킬 사람은 오직 의상스님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이 편지의 마지막에는 자기가 혹 잘못되어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법사께서 불쌍히 여기고, 옛정을 생각해서 자기를 구하여 세세생생토록 선지식이 되고 도반이 되게 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주5)까지 합니다. 그만큼 의상조사가 뛰어난 스님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편지를 소개했습니다.

의상조사의 저술은 별로 남아 있지 않은데, 그중에 대표적인 저술이 바로 우리가 늘 외우는 『법성게法性偈』입니다. 이 『법성게』는 화엄연기의 골수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을 통해서 최고의 걸작입니다. 중국에서 의상조사의 『법성게』를 본떠 비슷한 것을 만들기도 했지만 비교가 안 될 만큼 뛰어난 저술입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으니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네.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끊어지니
깨친 지혜로써 알 것이고 다른 경계에서는 알 수 없네.
法性圓融無二相하니
諸法不動本來寂이라
無名無相絶一切하니
證智所知非餘境이라.
- 『華嚴一乘法界圖』
‘두 모양이 없다’는 것은 상대相對가 없다는 뜻입니다. 있다[有] 없다[無] 하는 상相도 없고, 너다[彼] 나다[我] 하는 상도 없으며, 선善과 악惡의 상도 없고, 정精과 추麤의 상도 없으며, 시是와 비非의 상도 없고, 고苦와 낙樂의 상도 없습니다. ‘두 모양[二相]’이란 전부 상대적인 생멸법이니, 즉 만법의 자성은 원융무애해서 상대적인 두 모양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경지는 구경각을 성취한 증지證智여야 알 수 있고, 다른 경계에서는 모릅니다. 일체 범부의 경계는 말할 것도 없고, 성문 연각도 알 수 없고, 십지十地 등각等覺의 대보살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구경각을 증득한 부처의 경계라야 법성法性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불법은 깨쳐야 하며 깨친다는 것은 일체 만법의 자성, 즉 법성을 깨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법성을 아는 일은 문자로는 안 되고 오직 깨쳐야 하니, 그 이유가 바로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즉 일체 언설과 이론과 문자가 전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말로 형용할 수도 없고 문자로 표현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문자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해서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법성이란 오직 증지로만 알 수 있고, 다른 경계로는 모릅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법성게』를 인용했습니다.
모든 부처님이나 모든 조사 스님이 깨친 법성은 참으로 깊고 미묘하여서 일체 언설이 다 끊어졌고, 생각하려 해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증내지난가측唯證乃知難可測’(주6), 즉 오직 증득해서만 알 수 있고 언어와 문자로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야기한 법성이 앞에서 말한 연기 자체입니다. 연기가 곧 법성이고 법성이 연기입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뒤에 “연기란 참으로 깊고 깊어 알기 어렵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불교의 근본이 깨치는 데 있다는 것은 선종에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문자를 근본으로 삼는 교가에서도 말하고 있으니, 언어와 문자를 근본으로 삼지 않았음을 짐작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각주>
(주1) 두순杜順(557~640). 당唐나라 스님. 화엄종華嚴宗의 시조. 법명은 법순法順. 제심존자帝心尊者라고도 한다. 18세 때 출가하여 선을 배우고 불법을 가르쳤다. 관법觀法에 우수하여 신승神僧이라 불렸으며, 당 태종의 귀의를 받았다. 『화엄경』에 관한 주석적인 저술은 없으나 『법계관문法界觀門』이 화엄을 실천하려고 한 저술이기 때문에 화엄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주2) 지엄智儼(602~668). 중국 화엄종 제2조. 화엄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호는 운화존자雲華尊者 또는 지상존자至相尊者이다. 12세 때에 스승인 두순스님을 만나 14세 때 계戒를 받고 수행에 전념하였으며, 법상法常스님에게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우고 지정智正스님에게 『화엄경』을 배우다가 별교일승의 종지를 깨달았다. 『화엄경』에 대한 주석서인 『수현기搜玄記』를 비롯하여 『오십요문답五十要問答』, 『공목장孔目章』, 『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 등이 남아 있다.
(주3) 현수賢首(643~712). 중국 화엄종의 제3조. 강거국康居國 출신이며, 법명은 법장法藏이다. 지엄스님이 『화엄경』을 강론하는 것을 듣고 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후에 오교십종五敎十宗의 교판을 세우고 『화엄경』을 으뜸으로 삼아 일승원교의 화엄사상을 천명하였다. 저술로 『화엄경탐현기』, 『화엄오교장』, 『화엄경지귀』, 『화엄강목華嚴綱目』,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 등이 있다.
(주4) 의상義湘(625~702). 신라 스님. 속성은 김씨. 29세에 황복사에서 출가. 당나라의 불교가 성함을 듣고 당나라에 가서 양주에 있다가 662년 종남산 지상사 지엄智儼스님에게서 현수賢首스님과 함께 『화엄경華嚴經』을 연구하였다. 귀국하여 화엄종의 10찰刹을 짓고, 『화엄경』을 널리 전하였다. 저서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 등이 있다.
(주5) “만일 남은 악업에 하루아침에 떨어지더라도 스님께서는 지난날을 잊지 마시고 모든 갈래에서도 바른 길을 보여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儻餘惡業 一朝顚墜 伏希上人不遺宿昔 在諸趣中 示以正道].” - 『삼국유사』 권4.
(주6) “淨五眼得五力은 唯證乃知難可測이라.” - 『증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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