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쓴 선문정로]
의상조사 법성게 강설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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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5 년 3 월 [통권 제143호] / / 작성일25-03-09 15:32 / 조회10회 / 댓글0건본문
성철스님의 미공개 법문 3
번출여의부사의 繁出如意不思議
해인삼매 가운데 살면 여의주 구슬이 부사의하게 막 쏟아져. 어째서 여의如意냐 하면 무애자재한 것을 여의如意라 해요. 내 뜻대로 할 수 있다 그 말이야. 뭣이든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없어. 무애자재하고 아주 융통해서 여의주 구슬이 막 비 오듯이 쏟아지거든. 그것은 중생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망상으로도 그릴 수 없단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부사의不思議야. 중생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부사의경계야.
우보익생만허공 雨寶益生滿虛空
여의주 보배가 비 오듯이 우박 퍼붓듯이 퍼부으니까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거든. 일체중생을 이익케 한다 그 말이야.
중생수기득이익 衆生隨器得利益
능인能人 씨가 해인삼매 중에서 부사의 여의주를 자꾸 비 오듯이 퍼붓거든? 그렇게 되면 일체중생이 여의주 비를 자기 그릇 따라서 이익을 얻는단 말이야. 암만 바닷물이 많지만 바다 같은 그런 그릇이 아닐 것 같으면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없어.
‘군수음하群獸飮河 각충기복各充其服’이라 하는 것이야. 여러 중생이 강에 가서 물을 먹더라도 소는 소 대접에 먹고, 개는 개 대접에 먹고, 쥐는 쥐 대접에 먹고, 개미는 개미 대접에 먹는단 말이야. 아무리 욕심을 내도 개미가 소만큼은 못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생이 자기 그릇 따라서 이익을 받는다는 말이야.
본시 부처님의 보배나 능인의 해인삼매는 아주 넓은 바다와 같지만, 또 바다처럼 한정이 있는 게 아니에요. 비유를 해서 바다라 하는 것이지. 큰 보배를 가지고 부처님은 교화를 하지만 중생들이 자기 그릇 따라서 이익을 받을 따름이지 자기 그릇 크기 이상으로는 못 받는다는 말이야.
시고행자환본제 是故行者還本際
파식망상필부득 叵息忘想必不得
“그러므로 도를 행하는 자가 본제에 돌아오려면 망상을 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새기는데, 여기에 문제가 좀 있습니다.
보통 “시고是故로 행자가 환본제하려면 망상을 쉬지 않으면 반드시 얻지 못한다.” 이렇게 새겨 왔습니다. 본제란 우리의 본 고향이야. 진여법계거든. 진여법계로 돌아오려면 파식망상필부득叵息忘想必不得, 망상을 쉬지 않으면 반드시 얻지 못한다 말이야.

장경藏經에 수집돼 있는 법계도法界圖 주해에도 전부 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도를 행하는 자가 본제에 돌아오려면, 본제 해인삼매에 들어가려면, 법계에 들어가려면 망상을 쉬지 않으면 반드시 얻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망상을 쉰다는 것은 6식의 망상뿐만 아니라 제8근본식 즉 아뢰야식 근본까지 다 쉬어 버려야 돼. 근본식이 빠져 버려야지, 아뢰야 근본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본제에 못 돌아옵니다. 삼세육추三細六麤를 다 소탕시켜 버려야만 결국 본제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전해 오는 건데, 이렇게 새겨 놓고 보면, 저 앞 대목에서는 우리 법성으로부터 여의주 구슬이 비 오듯 우박이 쏟아지듯 탕탕무애하게 나오더니, 여기 와서는 좀 마뜩잖은 일이 생기고 있는 것이거든. 법성이 자체의 속성으로 봐서는 마뜩잖은 일이 생긴 것이야.
그래서 어떻게 또 달리 해석을 하냐면 “시고로 행자가 환본제하니, 망상을 쉰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고 새긴단 말입니다. 이제 본제에 돌아와 보니까 망상을 안 쉴래야 안 쉴 수 없어. 망상을 다 쉬어 버렸다 말이야. 이러니 이것은 단수가 좀 높습니다. 해석이 높다 말이야. ‘파식망상필부득’을 “망상 피지 않음을 반드시 얻지 못한다.”고 한 것은 망상 다 피웠단 말이야. 그러니 망상 저것을 아무리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 이 말이거든? 이렇게 하면 앞에 법성이 탕탕무애한 것과 상황이 그대로 연결이 잘 됩니다. 그래서 망상을 쉰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앞 구절의 ‘번출여의부사의 우보익생만허공’은 이미 본제에 돌아온 듯 탕탕하게 나오는데, 갑자기 ‘시고행자환본제하려면’ 하고 아직 본제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제 다시 본제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렇게 한다면 좀 움츠러들고 몸을 사리는 기세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대개가 다 이렇게 새겨 온 것은 ‘중생수기득이익’이란 말 때문이거든. 중생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중생인 우리가 본제에 돌아가려면 하는 것도 말이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야.

말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근본적으로 법성 자체의 융통무애한 면으로 봐서는 ‘시고행자환본제하였으니’ 이렇게 해야 합니다. 행자가 본제에 돌아왔으니 파식망상필부득이라. 망상 쉬지 않음을 반드시 얻지 못한다 말이야. 망상을 다 쉬어 버렸더라. 그래서 망상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으니, 망상 피지 않음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 망상을 쉰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고 새기는 것 또한 말이 안되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두 가지 다른 해석 중 탕탕무애한 법성 그 자체를 잘 살려 새긴 해석이 좀 더 수준이 높다고 봐야지.
무연선교착여의 無緣善巧捉如意
무연無緣은 아주 인연이 없다 말이야. 무연자비無緣慈悲라는 말도 있거든? 선교善巧라는 말은 선교방편善巧方便이에요. 부처님의 선교방편으로써 여의주를 잡았다는 말이야.
귀가수분득자량 歸家隨分得資糧
귀가歸家, 집에 척 돌아와서 자기 분分에 따라서 생활이 유족裕足하다 그 말이야. 그때는 현실 이대로가 극락세계지.
이것도 새기는 것을 “시고행자환본제 하면”처럼 새긴다면, “무연선교착여의 하면”, 즉 여의주를 거머쥐면 귀가수분득자량이라. 귀가수분해서 자량을 얻는다 이렇게 새기게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바로 나가 “무연선교착여의 하였으니”, 즉 무연선교로써 여의주를 거머쥐었으니라고 새기는 것이 더 높다 말이지. 이것은 다 된 것을 말하는 것이고, 아까 말한 거는 아직 미급未及한 걸 말하고 있는 것이야. ~하려면 하는 것은 아직 미치지 못해서 하는 소리이고, ~하니 하는 것은 이미 다 된 것을 얘기하는 것이거든. 다 귀가해 버렸으니 더 말할 게 없는 것이야.
이다라니무진보 以陀羅尼無盡寶
다라니陀羅尼라 하는 것은 총지摠持라는 말이야. 다 ‘총摠’, 가질 ‘지持’, 일체불법을 다 가졌다 그 말이라. 이다라니무진보는 일체 불법을 다 가진 무진한 보배라는 말이야. 다함이 없는 보배, 무진장이거든.
장엄법계실보전 莊嚴法界實寶殿
시방세계 법계를 실보전實寶殿으로 장엄한다. 시방법계가 참 보배 집으로 장엄되었다 이거야. 그런데 이것은 법계에 실보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실보전 이대로가 시방법계이고, 무진보 이대로가 시방법계라는 말이야. 그러면 결국 이 근본은 어느 곳에 서 있나 이것이거든? 저 앞에 법성을 말한 것처럼 말이야.
궁좌실제중도상 窮坐實際中道床
궁극적 최후 즉 공부를 다해 마친 실제實際는 본제本際라고도 하고, 진여라고도 하고, 법성이라고도 하는데 중도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 말이야.
구래부동명위불 舊來不動名爲佛
구래부동舊來不動은 억천만겁 전부터 한 번도 동動함이 없다는 말이야. 제법이 본래상적本來常寂이야. 한 번도 동요한 일이 없어. 그것을 부처라 한다는 것이지.
부처라 하는데, 이것도 억지로 붙인 가명假名인 걸 알아야 돼. 가호假號야. 이것도 실지로 이름이 아니라 억지로 할 수 없어서 부처라고 말하더라 말이야. 억지로 이름한 부처야. 하지만 구경각의 중도상에 앉지 않고는 절대로 부처가 될 수 없다 말이야. 그러니 앞의 말 전부를 다 실제로 살리려면 반드시 중도를 성취해야 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법성게 전체를 다시 한 번 보면, 첫 구절에 법성원융무이상 하면서 양변을 여의는 중도를 말했거든? 그리고 이렇게 중간에 여러 가지로 해설을 해 가다가, 저 끄트머리에 가서는 다시 중도를 가지고 딱 그만 회향해 버립니다. 결말을 지어 버렸다 말이야. 그래서 중도,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원리라는 것이야.
오늘까지 한 보름 동안 중도를 가지고 얘기했는데, 이것은 교리적인 면에서 한 말이야.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이라 하는 여기에서 교리 부분은 다 마칩니다.
내일부터는 선종禪宗, 즉 실천 부분으로 들어갈 것이야. 실지로 중도를 성취해야 되거든. 말로만 중도 얘기해서 무슨 소용이 있나 그 말이야.
우리 불교의 부처님이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시고 난 후, 5비구를 상대해서 한 첫 선언이 무엇이냐면 “내가 중도를 정등각했다.” 이렇게 말 안 했어요? 이러고 난 그 뒤에 여러 부파, 종파가 형성되고 이론이 조직되고, 그 종파 중에서도 화엄華嚴, 법화法華가 최고인데, 그 화엄, 법화도 근본 최고 원칙을 무엇으로 삼았느냐 하면 그것은 중도中道다 이겁니다. 부처님이 처음 선언하신 그 중도 원리가 화엄, 법화에서 조직화 이론화한 중도와 같은 것이란 말이야. 이렇게 불교 역사를 통해 쭉 수미일관하여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이나 머리와 꼬리가 똑같이 다 일관되어 있어. 그것이 중도입니다.
첫날 법문 시작할 때 우리 불교의 일관된 근본원리를 어디서 찾느냐 했거든? “일관된 근본원리는 중도에 있다.” 이렇게 얘기 안 했어? 그래 내가 한 보름 동안 중도 얘기만 했어. 예전부터 나만이 아니고 부처님이나 큰스님네 전체가 말이지 일관되게 우리 불교의 근본원리를 중도에 두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폈다 이것이라. 그래서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이거든. 그래 법성게를 끝으로 교리 이건 여기서 마칩니다. 만날 이론만, 밥 얘기만 해선 곤란해.
성철스님 육성 법성게 강의 보기
https://youtu.be/Gybh9OWMGJU?si=I6GmQGuG0 l01hh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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