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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속의 불교 ]
향가와 삼국유사의 설화,그리고 이야기 시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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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  2025 년 3 월 [통권 제143호]  /     /  작성일25-03-09 15:12  /   조회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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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녹아든 향가(시, 노래)에 대한 발견이 서정주의 시가 지닌 ‘현대성과 영원성’의 결합에 중요한 시원始元이 된 것은 한국 현대시사의 맥락에서 보면 하나의 ‘사건’에 해당된다. 서정주가 말한 ‘신라의 내부’를 엿보는 일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사법에서는 ‘불교적 은유’, 그리고 사상의 측면에서는 ‘불교적 인연’의 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일연의 『삼국유사』에 대한 독해를 통해 얻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진 1. 미당 서정주. 사진: 나무위키.

 

1960년에서 70년대 초반의 시기에 서정주의 시적 모색이 도달한 지점은 흔히 말하는 ‘신라 정신’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의 신라 정신은 60년대 국가주의가 추구한 ‘화랑정신’을 모태로 하는 ‘신라’나 ‘고대사 연구’와 어느 정도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결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권위적 국가주의가 원하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통합원리, 상무정신을 전면화하는 화랑정신이나 ‘신라’, ‘경주’의 발견이 고대사에 대한 ‘내셔널리즘’적 전략을 함축한 ‘동양주의(전도된 오리엔탈리즘)’의 기획을 지닌 것이었다면, 서정주의 ‘미적(시적) 발견’은 ‘근대적 합리주의’가 포용할 수 없는 ‘불교적 우주관’과 ‘설화’의 세계에 집중된 것이었다.

 

또한 서정주의 ‘신라’에 대해서는 ‘합리성이 부족한 정신주의’, ‘선禪적 역설을 통한 부정 정신의 결여’ 등의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4·19 직후 당시 우리 문단에서는 ‘현대정신’, ‘이성적 모더니티’, ‘합리주의’ 등이 한국문학의 주변부성을 넘어서 ‘한국문학의 세계화’로 나아가는 중요한 요건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찍이 1930년대부터 ‘정지용적인 것(주지주의적 모더니즘)’의 극복을 자신의 시적 세계의 한 방향으로 설정한 서정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현대성 지상주의’는 애초에 그가 극복하고자 한 ‘시적 단편’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었다.

 

『삼국유사』와 향가의 발견

 

서정주가 『신라초』의 서문에서 밝힌 ‘신라의 내부에 대한 약간의 모색’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은 ‘노래(향가)’와 ‘이야기(설화)’라는 두 요소가 서정주 시의 중심에 자리 잡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질문이다. 

 

사진 2. 고창 질마재 소재 미당 시문학관.

 

이 『질마재 신화』는 근년 현대문학지와 시문학지에 연재해 온 산문시들로 제목의 그 질마재는 내가 생겨난 고향의 이름이다. 이 마을의 동쪽에 질마재라는 산이 있어 마을에도 그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제2부를 이루는 노래들은 1973년 한 해 동안 잡지 월간 《중앙》의 권두시로 매달 연재했던 것으로, 작곡되어 노래 불리어지기를 바래 자수를 맞춘 정형시로 쓴 것들이다.(주1) 

 

서정주는 “액션이 없으니까 독자들이 떠나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에도 액션을 넣었지. 소설처럼 말이오.” 하고 『질마재 신화』의 출간에 관해 설명했다.(주2)

 

사진 3. 시집 『질마재 신화』, 일지사(1975).

 

위에 인용한 내용에서 보듯이, 시집 『질마재 신화』는 ‘산문시’와 ‘노래’를 각각 1부와 2부로 구성한 시집이다. 그러나 『질마재 신화』에 대해 거론할 때면, 보통의 경우 제2부의 ‘노래’보다는 서정주가 말한 ‘액션’과 ‘소설’의 요소를 지닌 제1부의 산문시에 주목하는데, 이 점은 ‘이야기를 가진 시’의 특별함이 70년대의 시단에서는 상당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부의 ‘노래’가 차지하는 중요성 역시 상당한 것인데, 자유시가 아닌 정형시로 쓰고, “노래 불리어지기를 바래”라고 의도를 밝힌 점에서 우선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설, 액션’과 ‘노래 불리어지기’라는 표현은 모두 ‘대중성’과 연관된 것으로 “독자들이 떠나는 것”을 의식한 결과이다. 즉, 시의 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얻고자 하는 기획이면서 또한 ‘신라의 내부’에서 그가 발견한 ‘불교적 은유’의 두 축이 발전적으로 구현된 것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서정주의 『삼국유사』 독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1958년 논문 「신라연구」를 『현대문학』에 발표할 시점을 전후로 해서 이미 『삼국유사』를 읽은 상태였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향가’와 ‘향가의 창작 설화’에 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4년부터 동국대 강사생활을 시작으로, 1959년 전임강사, 1960년 논문 「신라연구」로 동국대 부교수가 되었고, 1961년에는 시집 『신라초』를 출간하는데, 이런 일련의 행보와 당시 향가 연구의 권위자 양주동 박사가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는 점은 서정주와 『삼국유사』, 향가의 상관성에 대한 추론에 일정 정도의 신빙성을 부여해 준다.

 

사진 4. 『삼국유사』 표지.

 

향가는 ‘향찰’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연구 자체가 해석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18년 신채호의 ‘처용가 해독’을 시작으로, 1929년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의 향가 25수 해독, 그리고 1935년 양주동의 향가 해독 연구 등으로 이어졌지만 ‘향가의 현대어 해독’을 넘어서 시가로서의 율격과 형식, 음악적 성격, 노래로서의 가창의 형식 문제 등에 대한 연구는 1950년대 이후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시조가 일찌감치 현대적 정형시로 자리 잡은 것에 비해 ‘향가’가 현대적 정형시가 되지 못한 중요한 이유이다.

 

서정주에게 ‘향가’의 발견은 이런 맥락에 견주어 보면, ‘불교적 세계관’으로 기록된 ‘『삼국유사』 설화’와 향가 14수에 대한 ‘배경 설화’에 더 철저하게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내부’란 이 점에서 『삼국유사』 설화를 통한 ‘불교문학의 발견’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그의 ‘설화적 세계’에 대한 이해와 ‘향가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자각’은 상호 연관된 것으로 다른 여타의 연구자들과는 다른 점을 지니고 있었다. 

 

‘향가’라는 노래를 ‘사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설화’의 세계를 ‘영통靈通과 혼교魂交’, ‘인연’의 세계관으로 접수하면서 가능했던 것이다. 설화와 향가(노래)를 애초에 동일한 것의 두 차원으로 받아들인 것이 서정주의 입장이고 시적 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설화)가 ‘시(향가)’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당시의 ‘시적 인식’에서 보면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이단적인 것이었지만, 노래의 가능성은 ‘이야기’의 창조로부터 나온다는 그의 발상은 ‘산문시’와 ‘정형시’라는 이질성을 극복하고 포괄하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질마재 신화』의 이야기 시와 영통靈通 또는 웃음

 

질마재 상가수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갈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면 상여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 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안 하는 어느 아침에 보니까 상가수는 뒷간 똥오줌 항아리에서 똥오줌 거름을 옮겨 내고 있었는데요. 왜, 거, 있지 않아, 하늘의 별과 달도 언제나 잘 비치는 우리네 똥오줌 항아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붕도 앗세 작파해 버린 우리네 그 참 재미있는 똥오줌 항아리, 거길 명경明鏡으로 해 망건 밑에 염발질을 열심히 하고 서 있었습니다. 망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털들을 망건 속으로 보기 좋게 밀어 넣어 올리는 쇠뿔 염발질을 점잔하게 하고 있어요.

명경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져서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하던 그 노랫소리는 나온 것 아닐까요?(주3)

 

사진 5. 『삼국유사』 제5권에 수록된 월명사의 「도솔가」.

 

‘이야기’ 또는 ‘설화’의 세계에 대한 각성은 서정주의 유년 시절과 일생의 기억이 시작되는 고향 ‘질마재’에 대한 ‘설화적 공간화’를 가능하게 한다. 서정주의 시는 ‘시적 공간(이야기 공간)’의 구상과 확장을 통해서도 이야기될 수 있는데, 그의 시는 언제나 특정한 장소를 ‘시적 공간’으로 재구성하고 창조하는 데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적 마법’을 통해 일상적 삶의 공간에 새로운 이야기와 활력을 부여하는 것인데, 그는 이것을 지혜나 예지의 단계에서 터득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영통과 혼교는 시적 예지와 지혜가 만들어 내는 ‘시적 개안開眼’의 결과로서 세상을 ‘인간과 귀신, 만물’이 서로 인연으로 엉켜 있는 ‘화엄’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영통의 관점은 『삼국유사』 권제5, 「감통感通」 제7 월명사 「도솔가」 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과 서로 통한다. 

 

羅人尙鄕歌者尙矣 盖詩頌之類歟 故往往能感動天地鬼神者非一

신라인들은 향가를 숭상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대개 시와 송 같은 것이라. 그래서 때때로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감통’과 ‘감동’은 여기서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감感하고 통通하거나 동動하는 것이다. 서정주의 영통이나 혼교는 이 ‘감통’이나 ‘감동’에 가까운 말로 보이는데, 한마디로 ‘노래’로써 천지와 귀신을 감동하게 한다는 말은 그대로 서정주의 ‘시적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신라초』, 『동천』을 거쳐 『질마재 신화』에 이르면 이런 서정주의 ‘불교적 은유’에 대한 자각은 ‘불교적 우주관과 지혜’를 담은 『삼국유사』의 설화와 향가의 노래 정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질마재 신화』의 1부와 2부가 산문시와 정형시(노래)로 구성된 것은 이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사진 6.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보각국사 진영.

 

인용한 「질마재 상가수의 소리」는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일단 형식의 면에서 ‘이야기 시’라는 점, 두 번째로 ‘상가수’라는 ‘시인’에 해당하는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천지 귀신과 ‘감感’하고 ‘동動’하게 한다는 향가의 소리꾼처럼, 질마재 상가수는 ‘똥오줌 항아리’를 맑은 거울로 삼아서 ‘염발질’을 하는 사람으로 ‘성과 속’을 초탈한 인물이다. 그의 노랫소리가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하다는 것은 ‘한마디’로 ‘감통’의 경지에 그가 이르렀기 때문이다. ‘똥오줌 항아리’라는 특별나고 기름진 ‘명경’만큼 그의 노래는 ‘영통’의 경지에 이르러 천지와 이승 저승을 감동케 한다는 것이다.

 

웃음으로 승화된 해학이 동시에 보이지만, 상가수는 분명 시인의 ‘자화상’에 해당된다. 자신이 지향하는 노래의 정신에 대한 암시를 함축적인 이야기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 감통편의 핵심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월명사에 관한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그의 향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 향가와 배경 설화는 각각 별개의 텍스트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서정주는 이 부분을 이야기와 노래의 완전한 결합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세계관과 사상, 그리고 신념이 하나의 정조를 이루어 내는 경지를 그는 ‘노래’라는 말로 만들어 내는데, 이 점에서 서정주에게 시(노래)는 기본적으로 천지귀신과 만유를 서로 통하게 만드는 ‘신령스러운 언어’이다. 그리고 그런 언어가 존재할 수 있는 ‘시적 공간’에 대한 상상과 자기 확장을 통해 그는 끊임없이 ‘설화’가 가능한 장소, 공간을 새롭게 구축한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이야기 시’의 등장은 이 점에서 단순한 일상의 사실적 묘사가 시 속에 들어온 것이라기보다는, 서구적 ‘합리주의’나 ‘과학주의’를 벗어나서 또 다른 ‘우주’와 ‘세계’를 상상하는 ‘설화와 불교적 통찰’에 대한 자각이 일구어 낸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각주>

(주1) 서정주, 「자서」, 『질마재 신화』(일지사, 1975).

(주2) 김주연, 「이야기를 가진 시」, 『나의 칼은 나의 작품』(민음사, 1975). 11쪽.

(주3) 서정주, 「상가수上歌手의 소리」, 『미당 서정주 전집 2』(은행나무, 2015),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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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계간 <시작>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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