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침묵과 비움의 성자 위僞디오니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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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5 년 3 월 [통권 제143호] / / 작성일25-03-09 14:55 / 조회58회 / 댓글0건본문
심층 종교의 길을 밝혀준 사람들 3
이번에는 불교, 특히 용수의 공空을 연상케 하는 심층 종교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 460~520년경)’라는 가명의 시리아 승려입니다. 그는 플로티노스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아름답게 결합한 저술을 통해 그리스도교 심층 종교 전통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입니다.
아테네의 첫 주교 디오니시우스
이 저자를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라는 긴 이름 대신에 보통 ‘위僞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라 부릅니다. 그리스도교 신약성경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설교로 몇 사람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였던 디오니시우스’라고 했습니다.

전통에 의하면 그가 아테네의 첫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 쓰였으리라 여겨지는 책들을 쓴 저자가 1세기 바울의 전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진짜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일 수는 없기 때문에 그의 이름 앞에 ‘위僞’라는 말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고 개종했다는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라는 가명假名 덕택으로 그의 책에 더욱 큰 무게가 실리고, 그것으로 더욱 크게 주목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그냥 ‘디오니시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합니다.
디오니시우스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그가 남긴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 『신의 이름들』(Divine Names), 『천상의 위계』(Celestial Hierarchy), 『교회의 위계』(Ecclesiastical Hierarchy) 등 네 권의 책과 약간의 편지들은 그리스도교 신비 전통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겨우 5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책 『신비신학』은 다른 어느 신학서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최고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13세기의 토머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도 디오니시우스의 저작에 주석을 붙였고,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비주의 사상가로 여겨지는 13~14세기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나 그 외에 16세기 스페인 신비주의자들 등 모두가 그의 사상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디오니시우스는 궁극 실재 혹은 신성Goodhead에 대해 논할 때 그리스어 ‘hyper’라는 접두사를 많이 씁니다. ‘너머’, ‘위에’, ‘이상以上’ 등 초월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에 의하면 궁극 실재, 혹은 신성은 ‘지성 너머’(hypernous/above intellect), ‘존재 이상’(hyperousia/above being), ‘신 너머’(hypertheotetos/above deity)의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보통의 존재와 차원을 달리한 절대적인 무엇이므로, 인간의 일상적인 감성이나 지성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무명無名이요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이런 절대적인 실재에 대해 일단 뭐라고 말했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절대적인 무엇일 수 없다는 겁니다. 『도덕경』 첫 줄에 나오는 것처럼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는 뜻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신
디오니시우스는 『신비신학』에서 “신은 보편적 원인으로서 우주의 모든 긍정적 속성을 구유具有하고 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신은 그런 것들이 없는 빔의 상태다. 그는 이 모든 속성들이 적용될 수 없는 초월적인 무엇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범주라도 신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궁극 실재에 대해 그래도 이야기하려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역설의 논리, 상징적 언어로나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나가르주나 용수龍樹의 ‘공空(śūnyatā)’사상을 연상케 하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을 좀 더 들어 봅니다.

Areopagite의 표지.
이성은 그분에게 이를 수도 없고 그분에게 이름 붙일 수도 없고, 그분을 알 수도 없다. (……) 그분에게는 긍정도 부정도 적용될 수가 없다. (……) 그분은 모든 사물의 완전하고 유일한 원인으로서 모든 긍정도 초월하고 동시에 모든 제한으로부터도 자유롭고 모든 것으로부터도 벗어난 그의 단순하고 절대적인 특성 때문에 모든 부정도 초월한다. - 『신비신학』 5장
절대적인 실재에 대해 알 수도 없고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 신학을 서양의 신학 전통에서는 ‘부정의 신학(negative theology)’ 혹은 ‘apophatic theology’라고 하는데, ‘부정’이라는 말 때문에 이런 신학을 나쁘게 보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의 신학이라 하여 절대적 실재로서의 신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디오니시우스는 오로지 상징적인 의미라는 것을 인지하는 한, 생명, 지혜, 선함, 능력, 사랑 등의 아름답고 긍정적인 속성을 신에게 붙여도 좋다고 했습니다. 이럴 경우 그것은 이른바 ‘긍정의 신학(cataphatic theology)’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인도 베단타 철학에서 절대적 브라흐만은 모든 속성을 초월하는 ‘무속성의 브라흐만(Nirguna Brahman)’이지만, 상징으로서 인격, 주님 됨 등의 속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 ‘선한 속성의 브라흐만(Saguna Brahman)’으로 섬겨도 좋다는 생각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특성을 나타내는 말들도 절대적 신의 무한성과 위대성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여기서 디오니시우스가 ‘그분’이니 ‘신’이니 하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이렇게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마저도 ‘상징적(symbolic)’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 디오니시우스는 인격성을 함의하는 ‘신’이나 ‘그분’이라는 말보다 비인격적 표현인 ‘절대자(Thearchy)’라는 말을 선호했습니다. 『신비신학』에서 처음 성부, 성자, 성령을 부르는 형식적인 기도문을 제외하고는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신’이라는 말 자체도 그 절대적인 궁극 실재에 대한 상징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디오니시우스는 힌두교 베단타 철학에서 라마누자보다 샹카라에 더욱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샹카라에게 있어서 신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neti-neti)’라고 합니다.

참고로 한 가지 덧붙이면, 20세기 가장 영향력이 큰 신학자 폴 틸리히도 ‘신 너머의 신(the God above God)’이나 ‘신의 상징으로서의 신(God as a symbol of God)’이라는 말을 쓰고, 신을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바탕(the Ground of all being)’이라 하는데, 스스로 그것이 디오니시우스의 사상에 근거를 둔 것이라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러 번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신관은 신을 ‘초월이면서 동시에 내재’라는 양면성으로 파악하는 이른바 ‘범재신론적 신관’이라 부릅니다.
합일을 너머 스스로 신이 되기
디오니시우스에게 있어서 절대자에 대한 상징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징을 상징으로 여기지 않고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대단한 지식을 얻은 것으로 착각하는 한 결코 그 상징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 실재를 보지 못하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대리석을 쪼아 조각을 할 때 그 속에 내재하고 있는 형상을 뚜렷하게 보지 못하도록 하던 모든 장애물을 쪼아 없애고 나면 거기에 숨겨져 있던 아름다운 조각상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은 우리가 그 절대적 실재를 참으로 알고, 나아가 그것과 합일하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장애물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비적인 묵상 수행을 할 때, 감각과 지성의 역할, 그리고 감각과 지성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존재와 비존재 모두를 뒤로 하라. 그러면 알지 않음을 통해 모든 존재와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그분과의 연합을 향해 도달할 수 있는 한도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이처럼 그대 자신이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절대적이고 순수한 무욕의 상태에 이를 때, 그리고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그대는 모든 것 너머에 있는 신의 광명을 향해 올라가게 될 것이다. - 『신비신학』 1장
디오니시우스는 이어서 우리가 그 광명 너머에 있는 ‘어둠’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완전한 침묵과 무지’에 이른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잡동사니 지식을 다 비워 버리고 완전한 무지에 이를 때, 혹은 황홀에 들어갈 때, 우리는 우리의 가장 숭고한 기관을 통해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그 일자와 합일하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디오니시우스에게 있어서 ‘그 일자와 하나 됨’은 곧, 나 스스로가 ‘신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디오니시우스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이 그처럼 강조하는 ‘신화神化(deification)’라는 것으로서, 그들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추구하는 최종의 목표라고 합니다.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세 가지 단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열거하는데, 그것은 자기를 정화(purification)하는 단계로 시작하여, 빛을 보는 조명(illumination)의 단계를 지나, 마지막으로 궁극 실재와 하나 되는 합일(union)의 단계에 이르러 스스로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 단계 이론이 중세 신비주의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던 ‘신비의 길(mystical path)’에서 거쳐야 할 세 단계설의 원조인 셈입니다.
디오니시우스의 사상을 살펴보면 그것이 인도 베단타 학파의 철학이나 불교의 중관론이나 노자 『도덕경』의 가르침 등 동양의 종교 사상을 연상케 한다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신비사상, 심층 종교가 서양 전통에도 면면히 흘러왔지만, 그동안 절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을 모르거나 등한시하거나 백안시했습니다. 그러다가 현재 불교 등 동양 사상과 접한 신학자들이나 의식 있는 평신도들로부터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동서양 대화를 위해 반가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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