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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의상조사 법성게 강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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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5 년 1 월 [통권 제141호]  /     /  작성일25-01-05 13:57  /   조회9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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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미공개 법문 최초 공개   

 

이번호부터 연재되는 〈의상조사 법성게 강설〉은 최초로 공개되는 퇴옹당 성철대종사의 미공개 법문입니다. 법성게 강설 원고는 1966년 〈문경 김용사 운달산 법회〉의 녹음파일을 일덕스님이 1차 녹취하고, 일엄스님이 정리하고 교정한 것입니다. 녹음파일의 음질이 고르지 못하고, 큰스님의 말씀이 빠르고 사투리가 심해 정확히 알아듣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리하는 과정에서 큰스님의 진의가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하였지만 명백히 알아듣지 못한 부분도 있고, 잘못인 줄도 모르고 단정한 곳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진의가 명확치 않은 부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원본 녹음파일을 백련불교문화재단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육성법문 듣기 -> https://youtu.be/Gybh9OWMGJU?si=Ud0xGkXnRvCK7cT_

 

지금부터는 법성게를 하겠는데, 법성게의 법성法性을 부처님은 무엇이라 했냐면 중도中道를 법성이라 했고, 연기緣起를 법성이라 했고, 진여眞如를 법성이라 했고, 제일의공第一義空을 법성이라 했다고 앞전에 얘기를 다 안 했어?

 

우리 불교는 근본적으로 연기, 진여, 공, 법계 이런 것 전체를 말짱 다 법성이라 했거든. 법성이란 것은 법성 하나만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야. 이때까지 말한 중도中道 대의大意에서 불법을 표현한 전체 술어가 법성에 다 포함되어 있어. 법성이라 하면 법성에 포함되고, 진여라 하면 진여에 포함되고, 법계라 하면 법계에 포함되는데, 전체가 완전히 통한 것만 알면 되지 한 가지씩 각각 법성이 따로 있고, 진여가 따로 있고, 이렇게 알면 불법의 특징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이야. 

 

사진 1. 1966년 김용사에서 법성게를 강설하시던 때의 성철스님.

 

이렇게 일체가 통한 것이 법성인데, 이 법성게를 누가 썼냐면 의상義湘 스님이 썼어. 화엄종에 의지해서, 불교 전체의 근본원리를 아주 요약해서 만든 건데, 아마 한국 스님네가 만든 글로써는 아주 최고봉이라 볼 수 있어요. 우리 불교의 골수가 여기 다 들어 있는데, 핵심은 이때까지 말한 중도에 전부 입각해 있습니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이렇게 나가거든. 법성은 원융무애해서 두 상이 없어. 시비是非, 선악善惡, 유무有無, 고락苦樂이라는 일체의 상이 다 떨어졌어. 양변의 상이 다 떨어졌다 그 말이라. 양변의 상이 다 떨어지니 중中이지 딴 거 아니거든? 무이상無二相하는 것은 일체 상이 다 떨어진 경계인 거예요. 무이상無二相이라 하니, 이상二相은 없고 세 상, 네 상은 따로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말이라. 두 상이 없다 하는 것은 상대적인, 차별적인 상 전체를 총괄해서 하는 말이지. 법성이라 하는 것은 본시 절대적이고 원융무애해서 차별적인 양변이 전부 다 떨어지고 없어.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그래서 일체 만법이 본시 본래로 적적하다, 적멸하다 말이야. 제법諸法이라는 것은 이사理事를 통한 전체를 얘기한 것이야. 이변理邊이든지 사변事邊이든지, 이사理事를 통한 일체 만법 전체 이대로가 부동적멸不動寂滅이야. 그래서 『법화경』에도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라고 안 했어? 똑같은 소리입니다. 이 법성게는 화엄종에서 하는 소리이지만은 『법화경』과도 통하는 말입니다. 전체가 적멸상, 열반상이고 해탈상입니다.

 

그리고 이 제법諸法은 오직 불법에 대한 제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모든 세간 출세간을 망라해서 일체 만법 전체가 말짱 다 부동不動해서 적멸상 아닌 게 없더라, 이리되어야 하거든? 이렇게 나오면 여기 가서는 경계境界랄 것이 하나도 없어. 결국은 머리 깎고 있는 사람은 실지로 제법을 대변하고, 상투 틀고 있는 사람은 제법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야. 상투를 틀었든 머리를 깎았든, 치마를 입었든 양복을 입었든 간에 전체 이대로가 부동이고 적멸상 아닌 게 없다 이 말이야. 그리되면 불교고, 예수교고, 유교고, 노자고, 장자고 경계가 하나도 없어. 빨갱이고 검둥이고, 우右이고 좌左이고, 이런 것도 없다 말이여. 여기까지 오면 그만 큰 바다와 같아. 큰 바다가 안 그래요? 갖가지 강에서 흙물도 내려오고 똥물도 내려오고 온갖 물이 다 내려오지만 바다에 들어가면 말짱 다 짠 바닷물, 한 물이 되어 버리거든.

 

그와 마찬가지로, 대해와 같은 이 제법은 일체를 전부 다 포함하는데, 본시 자성이 원융무애하고, 두 상이 아니라 말이야. 상이 다 떨어지고 본래로 적멸해서, 적멸상 아닌 게 하나도 없다 이것이라. 그것은 즉 생사 이대로, 현실 이대로가 절대란 말이야. 천태에서 하는 이야기인데, 불법은 제법실상諸法實相, 연기실상緣起實相이라 현실 이대로가 절대라고 해.(주1)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원융무애한 그것을 무엇으로 나타내야 되겠나 이건데, 그것은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어서 일체를 다 끊어내 버렸어. 그것은 형용할 수 없다 말이야. 명부득名不得 상부득相不得이야. 형용할 수도 없고, 모양을 낼 수도 없고, 뭐라고 규정을 할 수도 없다 말이야.

 

사진 2. 목판본 화엄일승법계도.

 

그런데 왜 법성이라 했냐? 이것도 할 수 없어서 법성이라 한 거라. 원효스님 말마따나 뭐라고 형언할 수 없으니 달을 가져와 이언진여離言眞如로 가리키는 것같이 말이지. 뭐라고 형언은 해 놔야 되거든. 딱지를 붙여야지만 부를 수가 있지,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법성法性이다, 법계法界다, 진여眞如다 이렇게 할 뿐, 이건 가명假名이야. 임시적인 것이란 말이야. 실지는 이것에 이름을 지을래야 지을 수 없고, 모양을 낼래야 낼 수 없어. 그런 것이 법성 그 자체야. 그런데, 그거는 어떻게 알 수 있나 이것이야.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증지證智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야. 부처님의 지혜로써 알 바요, 남은 경계, 딴 경계는 모른다 이것입니다. 실지는, 부처님을 제외한 십지十地, 등각等覺까지도 다 남은 경계야. 저 꼭대기 등각부터 저 밑에 지옥 중생까지 전부 합해서 구법계九法界거든. 그런데, 십법계 저 꼭대기 부처님이나 알 일이지, 십지 등각부터 지옥 중생까지 구법계 중생들은 이걸 모른다 말이야. 그것이 『법화경』에서 말하는 ‘유불여불唯佛與佛이 내능구진乃能究盡’이라 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예요. 오직 부처라야 알 수 있지, 그 외에는 참말로 어찌나 그 뜻이 깊은지 알기 어렵다 이것이라.

 

증지소지證智所知를 어떤 사람은 능소能所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전부터 내가 더러 말을 들었는데, 의상스님 법계도法界圖에 대한 상세한 주석이 장경藏經에 대개 다 수집이 되어 있습니다. 장경에 전해 내려오는 게 있는데, 거기에도 어디든지 ‘유불소지唯佛所知’, 오직 부처님만이 알 바이지 중생의 세계는 아니라고 여러 곳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전의 전통적 해석 중 혹 어떤 이가 증지소지를 능소로 놔 놓고 근본지根本智니 후득지後得智니 하며 이상하게 배대를 쓴다고 해. 그렇게 아무튼 좀 다른 말이 있는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화엄일승법계도라든지, 『법계도기총수록』, 『일승법계도원통기』 등 법성게 관련 원문에 설명이 있고 거기에 따라서 또 주해를 남겨 놓은 책이 여러 권이에요. 그것이 장경藏經에 다 수집이 되어 있어. 거기 상세한 설명을 보면 증지소지를 반드시 부처님이 알 바이지, 딴 사람 십지 등각도 모른다는 입장에서 해석하지 달리 해석하는 것은 한 군데도 없어요.

 

진성심심극미요眞性甚深極微妙

 

참된 법성 그것은 심히 깊고 또 극히 미묘하다 말이야. 어떻게나 그 이치가 깊고 미묘한지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고, 일체 중생뿐 아니라 십지 등각도 그것을 알 수 없다 이것이라. 그만치 심심미묘하다 말이라. 그래서 오직 증지證智, 성불해야만 이것을 알지, 그러기 전에는 모릅니다. 그럼 이것은 작용을 어떻게 하느냐?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증지라 하는 이 법성은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서 이룬다는 말이야. 본시 법성이라는 것은 자성이 없이 공하다 그 말이야. 자성이 공空하니 연기가 성립이 되는 것이거든. 자성이 공하지 않으면 연기가 성립 안 된다 말이야. 공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융화할 수 없어. 융화하는 근본이 어느 곳에 있냐면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야.

 

공하다는 것이 무엇이냐면 근본적으로 무아無我라 그러거든. 아我가 없다 말이야. 아我를 집執한다면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것이야. 너는 너고 나는 난데 어떻게 화합이 되겠어? 만날 싸움만 한다 말이라. 그렇지만, 이런 모든 것이 다 융화가 되고 연기緣起가 되는 것은 아我가 없기 때문이야. 지금 바로 무아無我라 말이야. 무아를 달리 공空이라 하거든.

 

사진 3. 성철스님께서 법성게를 강설하셨던 문경 김용사 전경. 사진: 서재영.

 

그것을 달리 또 뭐라고 표현하냐면 불수자성不守自性이라 합니다. ‘자성을 지키지 않는다’ 말이야. 그래서 인연 따라 이루거든. 그 연기하는 근본원리가 어느 곳에 있냐면 무아, 즉 자성이 공空한 데 있다 그거예요. 그래서 원융무애하게 쓰거든. 그렇지만, 공空하다 하니까 또 아주 다 공한 것은 아닙니다. 색성공色性空이라고 얘기 많이 안 했어요? 색성공이지 색멸공色滅空(주2)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그러면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한 그 자체는 어찌 되어 있는가? 그것은 처처에 공空해서 원융무애합니다. 그 공이라는 건 쌍융쌍조雙融雙照해서 쌍통雙通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거든. 쌍화쌍통雙和雙通입니다. 쌍화쌍통한 거기에서 보면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이라. 하나 가운데 일체가 포함되어 있고, 많은 가운데 하나가 전부에 다 포함이 되어 있다 그 말이야. 많은 가운데 하나가 있고, 하나 가운데 많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가 즉 많은 것이고, 많은 것이 하나라. 그렇게 융통무애融通無碍다 말입니다.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일중일체다중일이 되기 때문에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거든. 일이 일체고 일체가 즉 일입니다. 유무有無 즉, 있고 없고, 다소多少 즉, 많다 적다 하는 말들의 그 한계성이 다 무너졌다 말이야. 많은 것이 적은 것이고, 적은 것이 많은 것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원융무애하다 소리 늘 안 했어?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그렇게 나가면 결국 일미진중一微塵中이 함시방含十方이야. 한 티끌 가운데 시방세계가 거기 다 들어앉아 있고, 티끌 하나에 시방세계 전부가 다 있다 말이야.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또, 일체 티끌 가운데 말짱 시방세계가 다 포함이 됐다 이것이야. 근데 이전 스님네는 항상 대해大海 바닷물을 예로 들어 말했어. 대해 바닷물이 그리 많지만, 바닷물을 다 먹어 봐야 바닷물 맛을 다 아는 게 아니야. 바닷물이 어떤지 한 방울만 찍어 먹어 봐도 바닷물 맛을 다 알아. 바닷물을 꼭 다 먹어 봐야 맛을 아는 게 아니야. 그것이 일미진중一微塵中 함시방含十方, 한 미진 속에 전체가 다 포함되었다는 소리예요. 이전 스님네가 다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요새는 과학 같은 게 보통 발달한 게 아니야. 저 작년 겨울에 국립도서관에서 책을 하나 빌리려고 내가 갔거든. 그런데 도서관장이 하는 말이 요새는 기술이 하도 발달되어 어느 정도냐 하면 바늘구멍 하나 뚫을 만한 면적에 국판 200페이지 분량의 글자가 들어간대. 미국 국회도서관에 책이 4천만 권인데 말이지, 4천만 권을 그런 식으로 하면 50페이지 책 한 권에 4천만 권이 다 들어간대. 그렇게까지 발달되어 기술적으로는 할 수 있는데, 제일 문제는 나중에 찾아볼 때 곤란하다 이것이라. 목록을 못 만든다고 해. 이 이야기는 객담으로 하는 말이지, 여기에 해당되는 소리는 아니야. 

 

<각주>

(주1) 퇴옹 성철,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장경각, 2015년, p.177, 일승법과 방편.

※ 천태스님이 말하는 제법실상이란 ‘제법은 실상’이라는 것이다. 연기하는 세계 그대로가 실상이라는 연기실상이 곧 제법실상이며, 연기법 그대로 절대이다. 즉 법 그 자체가 그대로 연기이며 실상이다. 현실세계 그대로가 실상계라고 말하며, 만물 그대로가 절대이며 실재라는 것이다.

 

(주2) 【성철스님 법어집】, 『백일법문(상)』, 퇴옹 성철, 장경각, 2014년, p.231. “그런데 이 공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흔히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단멸공(斷滅空)이지 중도공(中道空)이 아닙니다. 아주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물질인 색(色)이 멸해서 아주 아무것도 없다는 색멸공(色滅空)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란, 근본불교와 대승불교는 물론 심지어 선종에 이르기까지 색의 자성이 공하다는 색성공(色性空)을 말합니다. 색 이대로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색의 자성이 본래 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색이 본래 공하므로 모든 법은 서로 연기하여 생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색의 자성이 공하지 않다면 결코 연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연기가 성립되는 것은 반드시 자성공(自性空)이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공을 바람과 같다고 비유로써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은 모양을 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이란 그 모양을 볼 수는 없지만 결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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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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