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불교를 만들어 낸 불교의 바닷길 ]
바다를 건넌 부처님의 진신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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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 2025 년 1 월 [통권 제141호] / / 작성일25-01-05 13:52 / 조회75회 / 댓글0건본문
불교의 바다 전파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에서 스리랑카로의 바닷길이 아닐까 한다. 이 바닷길은 벵골만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갠지스문명권역에서 성숙된 불교가 벵골만을 통하여 스리랑카에 당도한 것이다.
불교 전파의 가장 극적인 순간
『바다를 건넌 붓다』를 쓰면서 오랫동안 이 문제에 관하여 천착하였다. 벵골만 바닷길이야말로 불교 전파의 가장 극적인 여로였다. 스리랑카는 인도아대륙의 바로 아래가 아니라 약간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왼쪽으로는 아라비아해의 영향을 받고, 오른쪽으로는 벵골만 해류와 바람의 절대적 영향권에 있기 때문이다.
사진 1. 스리랑카 조프나 소재 나가디파Nagadeepa 사원의 탑. 부처님의 머리카락이 안치되어 있는 탑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Tripadvisor.
본디 스리랑카라는 이름은 고대 인도인이 부르던 ‘랑카Lanka’에서 비롯했다. 대서사시 『라마야나』에서도 ‘랑카’를 언급한다. 스리랑카는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라트나디파Ratnadeepa’는 ‘보석의 섬’이라는 뜻이고, ‘싱할라디파Shinhaladeepa’는 ‘싱할라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탐바판니Thambapanni’는 ‘스리랑카 해변의 구리 모래’라는 뜻이며, 그 외에 ‘타프로바네Taprobane’, ‘실라오Ceilao’, ‘실란Ceylan’, ‘실론Ceylon’ 등으로도 불렸다.(주1)
인도아대륙 문명이 영향을 끼치기 이전 스리랑카에는 무문자의 토착 원주민 사회가 있었다. 다수를 차지하는 싱할라족은 인도 북부의 아리안족이 내려와서 섬에 살던 선주민과 혼혈을 이룬 결과다. 언어학적으로 인도 북동부 마가다와 벵골만 칼링가 왕국의 언어인 마가히Magahi의 영향을 받았으며, 스리랑카에 상좌부불교가 전래하면서 언어의 격식이 갖추어졌다. 인도 남부 타밀어도 싱할라어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16세기부터는 포르투갈어와 네덜란드어, 영어 같은 유럽 언어가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싱할라어는 이런 모든 언어의 혼합물이 됐다.
『마하밤사』가 알려주는 비밀들
스리랑카의 고대 비밀을 비교적 정확히 알려주는 오래된 연대기는 5세기경 쓰여진 『마하밤사』다. 5세기에 정리되어 기원전의 역사도 어느 정도 충실하게 구전에 바탕을 두고 기록했으며, 현존하지는 않지만 당대에 존재하던 문헌도 아마 고증했을 것이다. 스리랑카의 첫 수도인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마하비하라 사원의 승려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다. 『마하밤사』는 인도 벵골에서 비자야 왕자가 스리랑카로 온 기원전 543년(스리랑카 최초 왕국 건설)부터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마하세나Mahasena 왕이 사망한 302년까지 스리랑카 역대 왕의 이야기를 팔리어로 읊은 서사시다.(주2)
『마하밤사』는 석가모니 붓다의 스리랑카 방문, 스리랑카 왕들의 연대기, 상가(불교 승단)의 역사, 스리랑카의 연대기 등으로 구성된다. 붓다의 스리랑카 방문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그가 스리랑카를 방문했을까. 대체로 『마하밤사』를 만들어 낸 세력들이 싱할라족의 불교와 붓다를 강력하게 연결시킬 필요가 있던 차원에서 ‘만들어진 서사’로 여겨진다. 그러나 붓다의 족적은 모를 일이다. 그가 스리랑카를 정말 방문했는지도 모를 일이라서 『마하밤사』의 실체는 미궁이다.
하여간 연대기는 붓다가 사만타쿠타Samantakuta로 간 다음, 스리랑카 동부 해안의 디가바피Deeghavapi를 방문했다고 전한다. 이후 붓다는 제타바나Jetavana(기원정사)로 돌아왔다. 붓다가 갔던 세 곳 모두 고대의 항구다. 우선 붓다의 머리털을 보관한 탑이 있는 나가디파Nagadeepa는 인도아대륙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다. 붓다가 방문한 켈라니야도 켈라니강 어귀에 자리 잡아 항구로 기능했다. 고대에 스리랑카의 주요 항구는 모두 강에 의지한 강항이었다.
뱅골만을 넘어온 진신 치아
어느 시기에 스리랑카 역사에서, 아니 세계불교사에서 중대 사건이 벌어진다. 중요한 유물이 인도대륙에서 넘어온 것이다. 바로 붓다의 진신 치아다. 『마하밤사』에 따르면 아누라다푸라의 왕 데바남피야티사가 아쇼카에게 네 명의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사절단은 스리랑카 북부의 잠부콜라Jambukola 항구에서 출항한 지 7일 후 갠지스강 하구의 벵골만에 면한 국제항 탐랄립티에 무사히 도착했다. 탐랄립티에서 다시 출발해 7일 후 마우리아 왕국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사절단은 아쇼카왕에게 선물을 바쳤다. 사절단은 다섯 달 후 스리랑카의 북부 잠부콜라 항구로 귀환했다. 귀한 선물을 지참한 사절단은 잠부콜라에서 수도 아누라다푸라로 돌아와서 왕을 알현했다. 마침내 붓다의 진신 치아가 넘어온 것이다.(주3)
잠부콜라는 스리랑카 자프나 북쪽에 위치한 오랜 항구로 인도아대륙에서 들어오는 관문이다. 아쇼카왕은 스리랑카에 직접 아들 마힌다를 보냈으며, 마힌다는 아누라다푸라 동쪽의 미힌탈레에서 싱할라 왕국의 데바남피야티사왕을 만났다. 마힌다가 사용하던 커다란 바위와 당시 승려들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 모든 역사적 사건은 아쇼카왕에서 비롯되었다. 아쇼카는 살육이 난무한 칼링가 전쟁 이후 불살생을 실천하는 불교에 의탁하면서 불교를 발전시켰다. 칼링가를 점령함으로써 마우리아 왕조의 영역은 중인도 동쪽 벵골만 방향으로 크게 확대됐다. 『마하밤사』에 따르면 칼링가는 스리랑카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비자야 왕자의 출생지다.(주4) 칼링가의 수도 단타푸라의 ‘단타’는 ‘부처님의 치아’를 뜻하니, 스리랑카 캔디에 자리한 불치사佛齒寺(Tooth Relic Temple)와 단타푸라의 상호 연관성을 암시한다. 전설에 따르면 부처님의 진신 치아가 칼링가에 보존됐고, 시리메가반나왕 때 스리랑카로 이양됐다. 즉 이는 오디샤 항구에서 스리랑카로 불교가 전래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남방 무역의 전초 기지로 기능하는 데 불교 전래가 한몫했을 것이다.
상좌부불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싱할라
스리랑카는 상좌부불교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일찍이 붓다가 세 번이나 직접 스리랑카를 방문해 설법했다는 주장은 그만큼 스리랑카가 훗날 ‘불국토의 섬’이 될 것을 예견했다는 뜻이다. 4세기 법현의 『불국기』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여래께서 이 나라에 오셔서 악룡惡龍을 제도하시고자 신통력으로 한 발은 왕성 북쪽에, 한 발은 산꼭대기를 밟으셨는데, 두 발자국 사이는 15유연이나 된다. 왕은 성 북쪽 발자국 위에 탑을 세웠는데 크기가 40장이나 되며, 금은으로 장식하고 여러 보화로써 만들었다. 탑 주변에는 다시 승가람僧伽藍을 만들고 이름을 무외산無畏山(Abhayagiri)이라 했는데, 승려 5,000명이 거주했다. 그곳에 불당을 만들었는데, 금은으로 새기고 여러 보물로 치장했다. 그 안에 높이 2장 정도 되는 청옥상靑玉像이 있는데, 전신에 칠보가 번쩍이며 위엄스러운 형상은 엄연하게 보여서 그 모습을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다.
진신 치아를 모시고 바다를 건너와 불치사를 조성한 일은 세계 불교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진신 사리와 달리 진신 치아는 지극히 희소하기 때문이다. 불치사는 싱할라어로 스리 달라다 말리가와(Sri Dalada Maligawa)라고 한다. 불치사 정착 이후 불교는 2천여 년간 스리랑카에서 중심 종교로 자리 잡았으며, 스리랑카인에게 불치사는 평생 단 한 번이라도 순례해야 할 정신적 성소가 되었다.(주5)
불치는 왕국의 옥쇄나 마찬가지라 계속해서 전란을 겪어도 여전히 새로운 왕국과 함께 이동, 전승돼 왔다. 첫 수도 아누라다푸라에 최초로 불치사가 건립됐으며,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와Polonnaruwa, 그리고 세 번째 수도 캔디로 수도가 옮겨가면서 불치사도 함께 옮겨졌다. ‘바다를 건넌 치아’는 해양을 통한 스리랑카 문명교류의 맥락을 잘 설명해 준다.
법현은 『불국기』에서 스리랑카 불교를 여러 대목으로 나누어 묘사했다. 특히 자신이 본 불치정사를 기록했다. 법현은 스리랑카의 국왕이 불법을 돈독하게 믿고 있으며 새로 정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불치는 항상 3월 중에 불치정사에서 나오는데, 행사를 하기 전에 국왕은 큰 코끼리를 장엄하고 한 사람의 말 잘하는 사람에게 왕의 복장을 입혀 코끼리 위에서 북을 치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게 했다고 한다. 고대에도 불치사가 불교의 중심으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보살은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에 걸쳐 고행하시면서 목숨조차 아끼지 않으셨다. 나라와 성과 처자식 그리고 자신의 눈조차 빼어서 남에게 보시하시며, 살점을 베어내어 비둘기의 몸값을 치르시고 자신의 머리를 잘라 보시하시며, 자신의 몸을 굶주린 호랑이에게 내주어 뇌수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중생을 위하셨기 때문에 성불하시어 세상에서 45년 동안 설법과 교화를 하시어 열반에 드셨도다. 그 이후 1497년(주6) 세상의 눈을 멸해 중생은 긴 근심 속에 있다. 이제부터 10일 후 불치 사리는 정사를 나와 무외산에 이를 것이다. 나라 안의 승속과 복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각각 도로를 편안하게 하고 아름답게 꾸며 여러 꽃과 향과 공양 기구를 준비할지어다.
<각주>
(주1) 주강현, 『해양실크로드문명사』, 바다 위의 정원(2003) 참조. Nimal de Silva, “Literary References: Ports of Historical and Spiritual Contacts,” Maritime Heritage of Lanka, The National Trust Sri Lanka, 2013, p.30.
(주2) Von Hinüber, Oskar, Handbook of Pali Literature(1st Indian ed.), New Delhi, Munishiram Manoharlal Publishers, 1997, pp.87~93.
(주3) Nimal de Silva, “Literary References: Ports of Historical and Spiritual Contacts,” Maritime Heritage of Lanka, The National Trust Sri Lanka, 2013, pp.30~39.
(주4) Thera Mahanama-sthavira, Mahavamsa: The Great Chronicle of Sri Lanka, Jain, 1999, p.196
(주5) Gerson da Cunha, J., MEMOIR on the History of the Tooth-Relic of Ceylon, Asian Educational Service, Madras, 2001.
(주6) 실제 1497년이 아니라 아직 정리되지 못한 당시의 불기佛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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