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속의 불교 ]
서정주라는 시인, 그리고 신라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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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 2025 년 1 월 [통권 제141호] / / 작성일25-01-05 13:45 / 조회79회 / 댓글0건본문
1968년 8월 서정주는 그의 다섯 번째 시집 『동천』을 출간하면서 「시인의 말」이라는 서두의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라초』에서 시도하던 것들이 어느 만큼의 진경進境을 얻은 것인지, 하여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의 최선은 다해 온 셈이다. 특히 불교에서 배운 특수한 은유법의 매력에 크게 힘입었음을 여기 고백하여 대성大聖 석가모니께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한다.
불교적 은유법
제4시집 『신라초』에서 이미 시작된 그의 모종의 시적 모색이 『동천』을 통해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는 속내가 담긴 이 진술에서 유난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불교에서 배운 특수한 은유법의 매력에 크게 힘입었음을 고백”한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신라초』와 『동천』에서 그가 시도했고 일정한 시적 ‘진경’을 이룬 성취의 실체에는 ‘불교적 은유법’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이런 진술은 실제로 『신라초』의 「시인의 말」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암시된다.
이 시집의 제1부는 신라의 내부에 대한 약간의 모색 제2부는 그냥 근년 시작試作한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설명하는 것은 쑥이라 하여 고래古來 잘 않던 일이지만, 편의상 두어 마디 말씀하면, 이 시집의 제2부에선 그 소위 ‘인연’이란 것이 중요킨 하였다.
속내를 은근히 감추려고 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이 말을 추론해 보면, ‘신라의 내부’, ‘인연’이라는 두 개의 화두를 『신라초』에서 『동천』에 이르는 시적 ‘진경進境’의 첫 출발지점으로 보기에 특별한 무리는 없을 듯하다.
서정주 스스로 ‘진경’이라고 말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초』와 『동천』 두 시집이 발간된 1960년대는 서정주가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그 시적 매력과 완성도가 거의 정점에 이르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서정주의 뛰어난 시적 성취의 핵심에는 그가 말한 ‘불교적 은유법’이 존재하며, 그 시작은 ‘신라의 내부’, 그리고 ‘인연’이라는 화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서정주가 말하는 ‘불교적 은유법’이 무엇인지는 추측은 가능하지만, 그 실체를 말하기는 실제로는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기본적으로 ‘수사학(은유법)’의 형태로 터득되었고 그것이 고스란히 시의 형태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정신이 ‘언어도단’, ‘불립문자’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그가 진경을 이룬 시적 성취는 일반적인 언어를 벗어난 ‘은유’로써만 담아낼 수 있는 ‘어떤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첫 단추가 ‘신라의 내부’, 그리고 ‘인연’인 셈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신라의 내부’와 ‘인연’은 오직 그의 시를 통해서만 확인이 가능한 것인데, 『동천』에 이르면 어쨌든, ‘신라’와 ‘인연’이라는 두 개의 시적 화두를 넘어서 그의 은유는 좀 더 포괄적인 사상이나 정서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불립문자’라는 관념성과 이미지의 구체성
‘불교’와 ‘시’의 상관성을 얘기하거나, 선시와 시의 깊은 연관성을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의 깨달음’과 ‘시적 깨달음’을 동일시하는 것은 ‘불교와 문학’을 말하는 가장 일반적인 화법에 해당한다. 이처럼 보통의 경우, 문학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불교’는 이해와 깨달음의 대상, 언어도단의 진리, 말로 담아낼 수 없는 초월적 형이상학 같은 것으로 인식되고는 한다.
그러나,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것이 과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초월성, 고도의 진리, 형이상학을 깨달음의 핵심으로 가리키는 말일까?
불립문자의 짝은 다른 한편으로는 불리문자不離文字이기도 하다. 결국, 문자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진리의 ‘지시 혹은 재현 불가능성(불립문자)’에 대한 ‘대리보충’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나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의미를 관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즉, 의식과 물질을 여전히 이원적으로 분별하면서 이해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 대한 깊은 지식과 깨달음을 갖춘다고 해도 여전히 ‘불교적 사유’를 시로 형상화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언어의 불완전성이나 재현 불가능성이 ‘언어 자체의 숙명’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시’는 과연 그런 언어의 운명적 굴레를 넘어서 스스로 도약할 수 있을까? 사실, 언어는 ‘무상無常한 것’을 ‘재현하거나 지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초월과 실재’ 그 어느 쪽도 포착하거나 지시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시인의 고뇌와 실패의 원인도 주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많은 정신주의 시 혹은 선시적 깨달음을 지향하는 시들이 그 시적 성취 면에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정신 혹은 깨달음’은 과연 재현이 가능한 것인가? 우리가 포착하고자 하는 ‘진리’가 있다면 과연 그 진리는 영원한 것인가, 아니면 무상한 것인가? 언어가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재현한다면 그런 언어가 포착해 낸 것은 무엇인가, 진리인가, 허상인가?
서정주가 『신라초』와 『동천』에서 말한 ‘신라의 내부’나 ‘인연’, ‘불교적 은유법’은 이 점에서 한국시의 특별한 ‘위치’를 구현해 낸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 은유법’의 핵심은 어쩌면 ‘색즉시공 공즉시색’ 같은 것인데,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 없기에 수시로 ‘여기와 저기’가 바뀔 수 있어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견 ‘딜레마’나 ‘아이러니’처럼 보이는 것들이 넘쳐나는 ‘세계’에 대해 구체적인 ‘상像’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순과 무상성을 포착하는 은유는 기본적으로 ‘우주관’, ‘시간관념’, ‘세계관’의 차원에서 서구적 합리주의와는 궤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
서정주의 ‘불교’는 이 점에서 ‘경전’과 ‘교리’의 불교가 아니라 ‘고대’라는 시간, 그리고 ‘신라의 내부’를 살던 ‘사람’에서 출발한 ‘불교’이다. 현대인으로서는 이미 상실된 공간, ‘불교’가 삶의 모든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그런 공간을 ‘상상’한다면 아마도 그런 곳이 ‘신라’가 될 것이다. 서정주가 신라의 ‘설화’와 ‘향가’의 세계에서 발견한 것은 ‘불교적 은유’였지만 그것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동시에 ‘불교와 삶’이 일체가 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구현이기도 한 것이다.
신라의 내부
짐의 무덤은 푸른 영嶺 위의 욕계 제2천.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구름 엉기고, 비 터 잡는데- 그런 하늘 속.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너무들 인색치 말고
있는 사람은 병약자한테 시량도 더러 노느고
홀어미 홀아비들도 더러 찾아 위로코,
첨성대 위엔 첨성대 위엔 그중 실한 사내를 놔라.
살의 일로써 살의 일로써 미친 사내에게는
살 닿는 것 중 그중 빛나는 황금 팔찌를 그 가슴 위에,
그래도 그 어지러운 불이 다스려지지 않거든
다스리는 노래는 바다 넘어서 하늘 끝까지.
하지만 사랑이거든
그것이 참말로 사랑이거든
서라벌 천년의 지혜가 가꾼 국법보다도 국법의 불보다도
늘 항상 더 타고 있거라.
짐의 무덤은 푸른 영 위의 욕계 제2천.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구름 엉기고, 비 터 잡는데- 그런 하늘 속.
내 못 떠난다.
- 「선덕여왕의 말씀」
이 시는 신하들에게 “내가 죽으면 도리천忉利天에 장사 지내도록 하라. 이는 경주 낭산狼山 남쪽에 있다.”라고 했다는 『삼국유사』의 설화를 기초로 해서 서정주가 쓴 작품이다. “짐은 푸른 영嶺 위의 욕계 제2천”에서 욕계 제2천은 바로 ‘도리천’을 가리키는 말인데, 서정주는 도리천이라는 표현 대신 ‘욕계 제2천’이라는 말을 1연 1행과 5연 1행에서 두 번 반복해서 사용한다. 도리천이 아닌 ‘욕계 제2천’이라고 쓴 이유는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라는 말과 호응하기 위해서인데, 욕계 제2천은 말 그대로 ‘욕계’에 속하는 세계로서 육체의 욕망과 같은 것들이 여전히 남겨진 세계이다. 서정주의 시에서 ‘피’는 ‘육체의 욕망’을 상징하는 시어로서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나온다.
사진 6. 미당 서정주 전집.
선덕여왕이 ‘피 예 있으니’라는 말은 ‘어쩔 수 없이’와 함께 ‘육체의 세계, 욕망의 세계’를 떠날 수 없다는 표현으로서 2연에서는 백성의 병과 배고픔을 구제하고, 또 3연에서는 자신을 짝사랑하던 지귀志鬼에게 “살닿는 것 중 빛나는 황금 팔찌를 그 가슴 위에” 얻어주는 행동을 하는 이유가 된다.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라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하면서 선덕여왕은 죽어서도 자신이 욕계에 머무는 이유를 말하는데, 그 까닭은 “어쩔 수 없이”다. 여기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무능력이나 한계를 말한다기보다는 ‘육체’를 지닌 모든 존재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때문에 차마 떠날 수 없다는 뜻이다.
서정주는 일찍이 ‘그리스, 로마적인 육체’와 동양적인 ‘정신’의 결합을 지향해 왔는데, 그가 신라에서 발견한 첫 ‘내부’는 바로 이런 ‘육체와 정신’의 자연스러운 결합 상태에 해당된다. 특히 “내 못 떠난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피와 살로써 서로 얽혀 있는 존재들과의 깊은 인연과 그것에 대한 불가항력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못 떠난다’라는 말에 포함된 ‘안 떠난다’라는 강한 의지는 병약자, 홀어미, 홀아비, 살로써 미친 자와의 깊은 얽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신라의 내부’에서 ‘인연’으로 확장되는 그의 시적 방향을 잘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서정주의 불교가 ‘정신의 불교’가 아니라 ‘육체의 불교’인 점은 여기서 잘 나타나는데, ‘피 예 있으니’, ‘살의 일로써 미친’, ‘실한 사내’ 등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과 자비, 연민을 보여주는 표현들이다. 불교의 우주관과 설화적 이야기를 엮어서 그는 ‘색과 공’이 동시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실체를 선덕여왕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적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서정주가 보고자 하는 ‘신라의 내부’는 이 점에서 설화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불교적 우주관으로 세상을 다시 구성하는 시작점이기도 한 것이다. 설화적이면서 만화경적이고 동시에 상상력의 자유분방한 유희가 가능한 세계, 거기서 발견한 ‘불교의 세계관’은 분명 ‘시적’이고 또 ‘육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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