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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애정·비판 섞인 조선불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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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1 년 8 월 [통권 제100호]  /     /  작성일21-08-04 15:42  /   조회4,26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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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8. 에다 도시오江田俊雄 1898-1957

 

에다 도시오江田俊雄(1898-1957)는 호가 금강산인이며,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수학교와 중앙불교전문학교, 혜화전문학교의 교수를 역임한 식민지기의 대표적 한국불교 연구자이다. 그는 조선시대 불교 서적의 간행 및 유통 문제 등을 연구했고, 권상로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에서 불교 관계 기사를 뽑아 정리한 『이조실록불교초존』(1937) 20권을 펴내기도 했다. 그가 평생 연구한 실적은 사후 『조선불교사의 연구朝鮮佛敎史の硏究』(1977, 사진 1)로 묶여 간행되었다. 중앙불전 1기 졸업생이자 경성제대를 나온 조명기 전 동국대 총장이 책의 서문을, 같은 경성제대 출신으로 한국 불교미술을 연구한 나카기리 이사오中吉功가 후기를 썼다.  

 

에다 도시오는 1898년 일본 혼슈 중부의 동해 연안에 있는 니가타에서 태어났고 1922년 도쿄의 조동종 대학(현재의 고마자와 대학)을 나온 후 1926년 센다이에 있는 동북제국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동북제대에서 우이 하쿠주宇井伯壽에게 수학했는데 우이는 『인도철학연구』 등을 펴냈고 1930년 이후 도쿄제대 인도철학과 교수를 지낸 저명한 인도철학 불교학자였다. 에다는 1928년에 개교한 경성의 불교전수학교(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개칭, 2년제에서 3년제로 승격)의 교수가 되어 한국에 왔다. 그는 이곳에서 인도철학사, 불교개론, 일본불교사, 불교서지학과 함께 불교미술, 일본어를 가르쳤다.

 


사진 1. 『조선불교사의 연구』, 東京: 國書刊行會, 1977. 


 

에다 도시오는 중앙불전 시절인 1930년대에 일본학술진흥회, 계명구락부 등의 지원을 받아 각지의 사찰을 답사하면서 자료조사와 고서 수집에 힘을 기울였다. 1935년에는 서북 지방에 조사를 갔다가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쓴 부처의 일대기 『석보상절』, 세종이 붓다의 공덕을 찬양하며 지은 노래를 담은 『월인천강지곡』의 옛 판본을 구했고 다음 해에 이에 대한 논문이 나왔다. 이처럼 자료 집성의 성과를 바탕으로 활발히 연구를 수행하여 1930년대에 15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신라불교에 관한 논문도 몇 편 썼지만,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불전과 언해 불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불서 판각과 유통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그는 또한 한국무속을 연구하여 『조선무속의 연구朝鮮巫俗の硏究』(1937)를 펴낸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 당시 한국 고대사 연구의 대표주자이자 도쿄제대 출신의 경성제대 교수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조동종 대학과 도쿄제대를 졸업하고 고마자와 대학의 교수를 거쳐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한 불교학자 사토 다이슌佐藤泰舜 등과 함께 경성제대 법문학부 종교학연구실이 중심이 된 조선불교사학회에 참여했다. 에다는 이때 한국불교 연구서의 출판을 기획했다고 하는데, 다만 그의 연구 성과는 사후에 나카기리에 의해 모아져 단행본으로 나왔다.

 

에다의 일생이나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기록이나 그 자신의 소회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다만 중앙불전의 교우회지인 《일광》의 몇몇 글에서 그 편린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일광》은 1928년부터 1940년까지 모두 10호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중앙불전 교수와 학생들의 글과 활동 내용이 실려 있다. 창간호에는 에다를 ‘본교 교수, 문학사’라고 적고 있고 교수였던 김영수의 이름도 보인다. 에다는 불교에 대한 신앙이 깊었고 한국불교에 대한 애정도 남달라 교육과 연구에서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고 있었다. 《일광》 창간호에 실린 다음의 글에서 그의 생각과 기대를 엿볼 수 있다.

 

“불교를 부활시키는 것은 문화를 부흥하고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다. 불교가 성행한 삼국시대에는 문화가 난숙했고, 불교가 쇠미해지면 문화 또한 퇴보했음은 역사가 보여주는 바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교를 부흥시키고 불법을 일으킬 것인가? 그 답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요체는 인재 양성에 있다. 불교계에 많은 인재가 생겨나면 불교의 포교 및 선전이 활발해지고 정법이 드러나 떨쳐질 것이다. 불교가 사회 인심에 보탬이 되고 유익함을 주며 불교도가 사회 진보에 공헌이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승니의 사회적 지위도 향상되어 세상을 구하고 이끄는 스승이 될 수 있다. 종교는 뛰어난 인재, 유능한 포교자에 의해 성대하게 되니, 조선의 각 본산 거찰들이 연합기관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을 통해 본교를 설립하여 능력 있는 불교적 인재를 양성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교의 학생들은 이 취지를 알고 오로지 배우고 정진하여 불교에 대한 굳은 신념과 깊은 학식을 얻어서 뒷날 조선불교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각오로 분투하고 활약해야 할 것이다. 조선불교의 앞날이 희망차고 밝음은 분명하니 본교에서 배우는 여러분들의 책임은 무겁고 본교의 사명 또한 매우 큰 것이다.”

 

뒤에 《일광》이 폐간된 1940년은 중앙불전이 혜화전문으로 개명된 때로서, 당시 일제는 전시체제를 강화하면서 전문학교를 개편하고 교명을 바꾸게 했다. 1940년 6월 19일 혜화전문학교가 출범하면서 경성제대 교수를 지냈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가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때의 학제 개편은 총독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고 이를 반영하여 기존의 불교과, 문과와 함께 대동아 공영권을 떠올리게 하는 흥아과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박한영, 권상로, 김영수 등 한국인 교수와 강사 상당수가 파면되고 경성제대 출신 및 일본인 교수들로 채워졌다. 다카하시는 1941년 4월 교장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권상로 등이 복직되었다. 에다는 혜화전문 시절에도 계속 재직했지만 《일광》의 폐간으로 이 무렵 그의 구체적 활동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혜화전문은 전시체제가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9월에 강제로 폐교되었고,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1946년 9월에는 학제 변경에 의해 교명을 동국으로 바꾸고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에다 도시오는 해방이 되고 바로 일본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이는데, 출신 학교인 고마자와 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그간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조선시대 불서 간행과 한국불교의 특성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고마자와 대학 도서관에는 에다문고가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한국에서 모은 불서 및 한적본 65부 70책의 기증도서가 비치되어 있다. 이 중 불전과 논소는 19부, 언해류 불서가 5부이며, 선종 서책, 의례서, 승려 문집 등을 포함한 한국 찬술서도 28부가 있다. 그 밖에도 경소, 선서, 어록 등 중국 찬술 불서도 9부가 있으며, 시기별로는 17세기 간본이 가장 많다. 이들 책은 그가 연구에 활용한 것으로서, 고려후기에 간행된 『대보적경』, 19세기 선禪 논쟁의 대미를 장식한 『선문재정록』,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서악집』, 중국의 『숭복선원 자각선사 어록』, 간경도감 중수본인 『오삼련약신학비용』 등 문헌학적 가치가 있는 자료가 적지 않다.

 

에다는 조선시대를 비롯해 한국불교의 역사적 특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다. 그는 조선시대를 공인기, 점쇠기, 쇠퇴기의 세 시기로 구분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 불교는 산림에 있으면서 여성과 서민층의 기도 대상이 된 은둔적·여성적 성격을 띤 의식 위주의 불교였고, 다른 한편 국가에 이용되면서 민족적·국가적 특성도 가진다고 보았다. 이는 다카하시 도루의 3시기 구분론에서 조선후기를 교세가 몰락하고 승려가 경멸을 받으며 불법이 없어진 시기로 규정하고 여성과 서민 위주 신앙으로서 그나마 의미를 갖는다고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에다는 주석서인 논소가 많이 나온 사실에서 조선후기에 교학이 성행했음을 볼 수 있다고 했고, 한글 불서의 간행을 통해 불교가 민간신앙에서 높은 위상을 가졌다고 하며 긍정적 의미를 부여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에다는 한국불교가 동아시아에서 문화적·역사적으로 독특한 특색을 가지며 한국사에서도 중요한 사상과 신앙 전통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불교에 대해 선종과 교종이 합쳐져 교리나 종파가 단일하면서도 민간신앙과 혼합하는 등 조화적·통일적 특징을 지닌다고 보았다. 한편 국가의 종교정책 등 정치적 측면에서 한국불교의 시기를 나누었는데, 삼국시대는 준비기로 ‘잡신雜信적’, 통일신라는 흥륭기로서 ‘교학적/잡신성’, 고려시대는 난숙기로 ‘기도적/전적성典籍性’, 조선시대는 쇠퇴기로 ‘노복적奴僕的/군사성’으로 구분하며 각 시기의 특징을 정리했다. 

 

《일광》 3호에 실린 한국불교의 과제에 대한 글에서 에다는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포부를 드러냈다.

 

“조선불교는 이제 인습과 조락이 아닌 혁신과 비약의 길로 나가야 한다. 당장 비관할 것은 아니지만 또한 쉽게 낙관할 상황도 아니기에, 새로운 불교 교학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는 불교가 시대사조와 사회현실을 지도하고 또 적응하는 조직 구성과 새 교리체계를 말한다. 불교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붓다의 진정한 정신을 이 시대에 되살리고 불교의 본연의 모습과 책무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불교는 세계에서 유일한 이성적 종교이며 붓다의 비판과 인식이 체험과 융합해서 성립된 반야 중도의 지혜의 종교이다. 불교 교리는 훌륭한 종교철학으로서 인간의 지혜가 발달하고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와 전혀 모순되지 않는 합리적인 사유체계이다. 혁신과 비약의 도상에 있는 우리 조선불교는 갱생과 발전을 위해 현대적 신교학을 수립해야 하며 자신의 개성과 특징을 발휘하고 시대사조에 적응하여 지도하고 조선의 신문화 건설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에다 도시오는 식민지기의 다른 일본인 학자들처럼 근대학문의 전도사였고 한국불교 연구에서도 나름의 연구 성과를 냈다. 그런데 그는 다카하시 도루 등이 한국불교를 타자화他者化하여 독자성이 없고 발전도 없는 퇴보의 역사라고 부정적으로 본 것과는 달리, 한국불교에 대한 나름의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중앙불전의 유일한 일본인 교수로서 그는 한국인 학생들을 지도하고 한국불교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진정성 있는 애정을 표출한 이였다. 7년 후인 2028년은 그가 한국에 와서 불교전수학교의 교편을 잡은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동국대학교의 역사와 한국불교 연구의 계보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으며 그렇기에 비록 일본인 연구자이지만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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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서울대 국사학과 문학박사 학위 취득(2008). 저서로 『韓國佛敎史』(2017, 東京:春秋社), 『토픽 한국사12』(2016, 여문책),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 법통과 교학전통』(2010, 신구문화사) 등이 있고,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및 한문불전 번역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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