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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탁  /  1997 년 9 월 [통권 제7호]  /     /  작성일20-05-06 08:36  /   조회10,47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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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이나 이론은 건전한 비판이나 논쟁이 살아 있을 때 제 기능이 발휘된다. 그렇지 않고 자기 변화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하면 그 사상이나 이론은 탄력성을 잃어 독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비판의 가능성이 자기 체계 내에 항상 열려 있어야 사상의 자기 정화 기능이 발휘된다.

 

 


 

 

비판은 상대에게 영향을 미침은 물론 비판하는 당사자의 철학 체계에도 암암리에 영향을 준다. 이런 실례를 우리는 사상사 속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중국 당나라 때는 유교, 불교, 도교가 제각기 이론 체계를 세워 가면서 상대의 입장을 비판했다. 이런 상호 비판의 과정에서 유․도․불 3교 합일이라는 또 다른 철학 사조를 만들기도 했다. 그 산물 중의 하나로 당나라 때 종밀스님의 <원인론>이나 원나라 때의 유밀스님의 <삼교평심론>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의 사상계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서로 논쟁을 벌였는가를 살펴봄으로써 불교 사상의 특징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중국 당나라 때에는 화엄학의 전성기였음은 불교사가 말해 준다. 현수 법장스님에 의해 화엄교학이 재정리되면서, 그 문하에 기라성 같은 화엄종장들이 배출되었다. 청량 징관스님이 그렇고 규봉 종밀스님이 그렇다. 이때의 화엄교학자들은 당시 유행하던 유교와 도교의 학설을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면 이 화엄교학자들은 유교나 도교의 어느 점을 비판한 것인가? 이 문제를 풀어 보면 화엄교학의 특징이 밝혀짐은 물론 당시 유교나 도교의 철학도 엿볼 수 있다. 비판하면서 닮아 가고, 남과의 대비 속에서 자신이 더 잘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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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청량 징관(738-839)스님이 당시의 도교와 유교의 어느 점을 비판했는지 살펴보자. 청량스님은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찰의 전통 강원 대교과정에서는 청량스님의 해석을 바탕으로 <화엄경>을 배운다. 게다가 청량스님의 학문을 계승한 종밀스님의 주석서가 전통 강원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상기하면 그 중요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화엄교학자들은 유교와 도교의 어느 점을 어떻게 비판하는가? 이 대답을 우리는 청량 징관의 <화엄경소>(권3)와 <화엄경수소연의초>(권14)에서 찾을 수 있다. 징관스님은 유교의 인간관은 사인설(邪因說)이라는 이름하에 비판한다. 유교에서는 구체적이고 차별적인 현상세계가 펼쳐지는 원인을 규명하는 데에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주역> 「계사전」을 기초로 태극을 만물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송대의 성리학자들은 태극을 ‘리(理)’로 재해석하여,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기(氣)’이고 ‘기’가 움직이는 원리를 ‘리’라고 하여 이기론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징관스님이 활동하던 당나라 때는 아직 성리학이 형성되기 이전이다. 이때에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태 속에 태극 내지는 ‘리’가 들어 있다는 사상은 생기기 이전이다. 개별자와 다른 위상에서 개별자를 만들어 내는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징관스님이 유교를 비판하는 표적이다. 스님은 <화엄경소>(권3)에서 이렇게 말한다. “태극이 만물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면 그것은 삿된 원인을 든 것이며, 만약 ‘한번 음이 되고 한번 양이 되는 것이 도이다’고 하여 음양이 변화하여서 만물을 낳는다고 해도 삿된 원인이다.” 이 말은, 태극이나 음양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당시의 유교의 세계 설명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느 점이 틀렸다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 징관스님은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고, 다만 삿된 원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그의 제자 종밀스님에 의해서 구체화 된다. 이 점은 뒷부분에서 밝히겠지만 간단히 미리 말하면, 태극이나 음양은 무정물인데 이 무정물에서 어떻게 사유작용을 하는 인간이 생길 수 있겠느냐는 비판이다.

 

한편 징관스님은 도교의 교리를 무인설(無因說)이라는 이름하에 비판한다. 스님은 <화엄경수소연의초>(권14)에서, 만약 무에서 유가 생긴다고 주장하면 잘못이라고 한다. 이 문제를 <화엄경소>(권3)에서는 이렇게 논술한다. “만물은 저절로[自然] 그런 것이다. 마치 학은 희고 까마귀는 검듯이. 이렇게 주장하면 이것은 원인을 부정하는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만일 제일 원인자[一]에서 (징관은 一을 無로 해석함) 허무 자연이 생겨났다고 주장하더라도 이것은 원인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교의 자연설을 지적한 것으로,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불교학의 입장에서 나온 비판이다. 있음에는 반드시 그 있음을 있게 하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도교의 인간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도교의 근본 경전인 <노자>에 의하면, ‘무(無)’에서 ‘도(道)’가 생기고, 도에서 제일 원인자[一]가 생기고, 제일 원인자에서 음양이 생기고, 음양이 결합하여 만물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나 징관스님이 보기에 도교의 그것들은 원인 노릇을 못한다는 비판이다. 그러면 어느 점이 원인 노릇을 못한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그의 제자 종밀에 의하여 상세하게 규명된다.

 

규봉 종밀(780-841)스님은 <화엄경 원인론>에서 스승 징관스님의 유교 도교 비판을 계승 발전시킨다. 이 책에서 종밀스님은 당시 유교 도교의 사상을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한다. 허무대도설, 자연설, 원기설, 천명설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부당성에 대해 이렇게 의문을 던진다. 첫째, 허무대도에서 길흉화복이 나왔다면 인간의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둘째, 만물은 모두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는 자연설을 주장한다면 인과 연이 없어도 과가 나올 수 있는가? 셋째, 원기에서 인간이 생겼고 그 원기의 흩어짐과 모임에 의해 삶과 죽음을 설명한다면, 원기는 원래 지각작용이 없는데 어떻게 원기에서 생긴 인간의 의식작용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비판은 날카롭고도 적절한 지적이다. 이 지적을 통해서 우리는 종밀이 당시의 유교와 도교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송나라의 화엄교가 정원스님은 <화엄경 원인록 발미록>에서 그 전거를 더욱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이렇게 당나라 시대 화엄교가들은 유교와 도교의 인간관을 사인설과 자연설로 각각 규정 비판하고, 화엄교학의 입장에서 대안을 이렇게 제시한다. 처음에는 ‘본래부터 깨달은 참 마음[本覺眞心]’만이 실재한다. 이것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변하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는다. 그러나 중생들이 끝없는 옛적부터 번뇌에 물들어 그것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했다. 이 ‘참 마음’과 그것을 덮어씌우고 있는 번뇌를 합하여 여래장 또는 아뢰야식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생멸변화하는 갖가지 마음이 전개된다는 설명이다.

 

이른바 불생불멸하는 ‘참 마음’이 생멸하는 망상과 화합하는데, 이 둘은 하나는 참이고 하나는 거짓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다르고, 본체는 하나라는 점에서는 둘이 아니다. 여기에는 ‘참 마음’을 자각하는 깨달음의 요소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요소가 있다.

 

다시 어리석음이 분열하여 최초의 망념으로써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미세한 망상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생긴 망념은 자신이 본래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되는 객관이 대립한다. 그러나 이 인식의 대상이 자기 마음에서 생겨난 허망한 존재인 줄 깨닫지 못하고 정말로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데, 이것을 법집이라고 한다.

 

다음으로는 법집이 점점 강해져서 드디어는 나와 남에 대한 차별과 대립이 깊어져 끝내는 ‘나’라는 존재는 실체가 있는 참 존재라고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나’를 집착하기 때문에 자기감정에 맞는 모든 대상을 탐내고 좋아하고, 욕망 때문에 아집이 더욱 불어나게 된다. 자기감정에 맞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성내고 싫어하며, 상대방이 자기에게 혹시 손해를 끼치거나 자기를 괴롭힐까 두려워하여 어리석음이 늘어간다.

 

위와 같이 되어 살생하고 도둑질 따위의 나쁜 짓을 저지르는 영혼은 그러한 나쁜 업으로 인해서 지옥․아귀․축생 같은 나쁜 곳에 태어나게 마련이다. 한편 그러한 고통을 두려워하여 나쁜 짓을 않거나 혹은 성질이 본시 착한 자로서 보시와 계행을 행하면, 그 영혼은 이 착한 업을 지은 덕택에 중음을 거쳐서 어머니 태 안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기운을 받아 몸을 이루게 되는데, 이 기운은 4대를 단박에 갖추어 차츰차츰 모든 감관이 이루어지고, 마음은 4온을 단박에 갖추어 차츰차츰 모든 식이 이루어진다. 열 달이 차서 출생해서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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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화엄교학자들은 유교의 인간관을 사인설로, 도교의 인간관을 자연설로 보아 각각 비판한다. 그리고 이런 비판은 송대의 유학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으로 전개되었다. 그 이론 중의 하나가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이다. 보편자로서의 ‘리’와 개별자 속에서 작용하는 ‘리’의 상호관계를 설정하는 이론이다. 그리하여 차별적인 개별자를 초월한 보편자의 실재를 상정하는 데에서 오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선종 문하에서 종밀스님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화엄교학자 종밀에게 맹렬한 비판을 가한 당나라 이후의 선사들은 어떤 입장에서 그렇게 했던 것인가? 이 점이 밝혀지면 화엄교가의 특징도 드러나고, 선사들이 가려는 세계가 무엇인지도 선명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 해답의 실마리를 마조 도일선사에게서 찾을 수 있다. 마조의 말 중에서 ‘作用是性’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작용하는 그 자체가 깨달음의 본성이라는 뜻이다. 이 작용성을 떠나서 보편적 실재를 초월적으로 상정할 수 없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화엄교학자들은 ‘본래부터 깨달은 참 마음’을 개별성을 떠난 초월적 실재로 상정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선사들의 비판의 표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선사들이 가려는 세계는 우리들의 구체적인 현실을 떠나서는 한치도 나아갈 수 없다. 구체성과 즉자적인 실존에서 영원을 찾으려는 것이 선사들이 지향하는 세계이다. 송대의 화엄교가들은 선사들로부터 이런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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