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面石]
회광당 일각스님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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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1997 년 3 월 [통권 제5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9,710회 / 댓글0건본문
회광당 일각스님 약력
회광당 일각대종사는 1924년 평남 개천에서 출생, 47년 지리산 칠불암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탄허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55년 통도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보살계 및 비구계를 수지하셨다. 48년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안거 이래 12하안거를 성만하셨고, 68년 4월에는 한국불교의 전통계맥을 연구하기 위해 태국, 인도 동남아 등 유학길에 오르셨다가 70년 8월에 귀국하셨다. 84년 조계총림 송광사의 제3대 방장에 취임하셨고, 94년 제4대 방장을 재임하셨다. 95년에는 조계종단 단일수계산림의 증사를 맡으셨다. 96년 6월 23일 오후 9시 30분 송광사 삼일암에서 입적하시니, 세수 73세, 법랍 50세였다. 6월 27일 송광사 대도량에서 조계총림장으로 엄숙하게 영결식을 봉행, 다비를 마치고, 그 고결한 정진의 결정체인 법신사리 33과를 수습하였다.
성철 큰스님의 사상과 생애를 보다 여법하고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비디오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다짐으로 큰스님 6재를 마치고 스님의 자취를 찾아 바쁘게 발걸음을 움직였습니다. 성철스님과 인연이 두터우신 어른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옛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국불교의 근현대사가 생생하게 정리되었고, 무엇보다 본분종사로서의 치열한 정진과 구도로 일관하신 삶에 옷깃이 여미어졌습니다. 촬영을 위한 뜨거운 조명불빛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성철스님과의 인연담을 이어가시던 큰스님들, 이 자리를 빌어 삼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95년 3월, 본 문도회는 여러분의 정성어린 도움으로 비디오 5부작을 완성하였고, 화면 속에서 그 시절 그때처럼 살아계시는 성철스님의 모습과 여러 큰스님들의 법담에 눈과 귀를 모았습니다. 오늘도 비디오 테이프를 재생기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큰스님들의 모습과 법음이 생생하건만 일각스님께서 작년 9월에 입적하시니 흐르는 세월이 무상하기만 합니다. 촬영 일정에 맞추다 보니 더 여쭙고 싶은 이야기는 뒤로 미루었는데, 이제는 스님이 남기신 영롱한 사리만이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일각 큰스님 영전에 합장하고 삼배를 올립니다. 부디 도솔천에 오래 머물지 말고 다시 오셔서 저희 중생들을 제접하시옵소서.
날씨가 무척 더운데, 저희 큰스님과의 인연담을 여쭙기 위해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처음 어디서 큰스님을 뵈셨는지요?
지금의 해인총림을 가야총림이라고 할 때, 성철스님이 서옹스님과 돌아가신 대휘스님이 함께 가시는 걸 보고, 그 뒤에는 백련암에 이물 없이 찾아가 뵈었습니다.
성철스님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일화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성철스님께서 파계사 성전에 계실 때, 파계사 금당에 선방을 만들어서 방이 작으니까 한 네다섯 명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스님은 성전 주위에 철조망을 두르고 사람들의 접근을 일체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우리가 찾아뵈러 올라가면 대문밖에 나오셔서 여러 말씀을 해주시곤 했습니다. 한 번은 아주 추울 때였습니다. 성전 앞의 큰 소나무 아래에 앉아 오돌오돌 떨면서 스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 번 말씀을 시작하면, 물이 철철철 흘러가듯 워낙 말씀을 잘하시니까 두세 시간은 금방 지나기 일쑤였습니다. 한동안 말씀을 하다가 우리들이 떨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문득, “아휴, 이 솔갈비를 끌어 모아 불을 놓고 쪼이면서 얘기했으면 좋았을걸. 중생이 깨치는 것도 이와 같지” 하시면서 크게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철두철미하게 하셨던 것이 기억에 딱 남아 있습니다.
그때 들으신 이야기 가운데 저희에게 다시 들려주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어떤 이야기입니까?
공부얘기를 하나 하지요. 스님 고향이 산청인데, 이 어른이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소질이 있었던지 늘 책을 보며 살았답니다. 이씨 집안의 맏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살림살이는 동생에게 맡기고 항상 손에서 책이 떠나질 않았답니다. 그렇게 보던 책 중에 <불교>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화두하는 방법 즉 견성(見性)하는 방법이 났더랍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아하,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하고는 대원사로 가버렸답니다. 지금이야 정돈이 잘 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사람보다는 호랑이 그림자가 더 많이 나타날 때였습니다. 그래 좀 조용한 데를 찾아서 절 구석에 있는 칠성각으로 가서 앉아 있으니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거리며 왔다 갔다 하니까 무섭더라는군요. ‘무서운 마음이 나다니, 어디 한 번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더 문 앞으로 턱 하니 나앉으니 무서운 생각이 싹 없어지더래요. 이젠 호랑이가 와도 하나도 무섭지 않더랍니다. 그런 어른입니다. 그럼 어째서 무서움이 없어졌느냐 하고 얼굴이 노래지도록 생각을 하다 보니 화두일념이 되어버린거죠.
일반적으로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대원사로 요양 차 가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스님께 새로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물론 건강이 좋으신 편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타고나기를 약하게 타고난 게 아니라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안 좋아지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까 얼굴이 노래졌다고 하는 것은 상기가 나서 위는 늘 뜨겁고 아래는 늘 차갑고…. 하지만 도력으로 법력으로 완전히 다 고치셨습니다. 세수로 팔십이 넘게 사셨지 않습니까.
네, 그럼 대원사에서 해인사로 가시게 된 인연에 대해서도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당시 해인사 주지였던 최범술(효당스님) 씨가 지나가다가 웬 청년이 하나 앉아 있는데 얼굴이 노랗거든. “이 사람아, 어찌된 일인고?” “화두일념에 있습니다.” “그럼 여기 있지 말고 해인사로 갑시다” 하고 자꾸 권하니까 못 이겨서 따라갔답니다. 가서 보니 해인사 퇴설당 선방에서 참선을 하는데, 그때는 한 방에서 비구, 비구니, 처사, 보살 등이 함께 참선을 했습니다. 방선시간만 되면 특히 스님들이 모여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떠들고 야단이거든. 처사니까 말은 못하고 속으로 ‘부처님 밥을 먹으면서 공부는 안하고 뭣들 하는 게야’ 생각이 들었답니다. 동산스님께서 이 처사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이보게, 중이 되게. 이왕 이렇게 참선할 거면 중이 되어서 하게”라고 하면서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말씀을 하셨답니다. 참선합네 하고 같이 앉아 있는 저 중들 보아서는 절대 중노릇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왕이면 중이 되서 사는 게 더 확실하다고 판단하고 동산스님에게서 계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오늘 새로운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스님께서는 한국불교의 전통 계맥을 연구하기 위해 68년 태국 유학길에 오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유학을 떠나실 때, 성철스님과의 인연담은 없으신지요?
제가 태국에 간 것은 성철스님 때문이었습니다. 성철스님의 말씀을 듣고는 “내가 한국불교에 공헌해야 겠다”는 마음으로 사생결단을 하고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하루는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한국불교는 계맥이 끊어졌다. 우바리존자로부터 내려오던 이천육백년 전통이 탁 끊어졌다. 계맥이 끊어졌으니 지금 비구계를 받았다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비구가 아니다. 비구계는 대승계, 보살계와는 다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한창 젊을 때였는데, 그 말씀을 듣고 나니 ‘그럼 우리가 중이 아니란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스님,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가서 받아와야 한다.” 당장 스님을 붙잡고는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하고 결심을 하고는 겨우 갔다 올 여비만 마련해서는 용화사에서 떠났습니다. 그렇게 떠나서 만 2년을 가서 무난히 비구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특별한 인연이 있어 태국에서 붓다가야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보리수 밑에서 부처님 전통의 계 즉 비구계를 태국시민들과 함께 나 혼자 받았습니다. 그때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이 일은 다른 사람은 모르고 성철스님과 나만 아는 인연담일 겁니다.
예, 저도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그럼 2년 여 만에 돌아오셔서는 어떤 일부터 하셨습니까?
우선 조계사에서 하룻밤을 자고 당장 백련암으로 달려가서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우리나라도 수계식을 합시다. 이천 육백년 전통을 잇는 수계식을 합시다”라고 말씀드리니 “좋다”고 하시더군요. 그래도 전통 비구계를 수계하기 위해서는 삼사칠증이 있어야 하니까 태국의 고승들을 초청하고 통도사에 계단에 50여 명이 모여 비구계 수계식을 가졌습니다. 한 스님은 계를 받고 나서는 “이젠 죽어도 한이 없다”고까지 했습니다. 나는 부처님 밥을 얻어먹고 그나마 쓸 만한 일 하나 한 게 아닌가 하며 위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로서는 성철스님에 대한 생각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큰스님이 떠나시고 난 후, 저희 불교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무엇보다는 불교의 미래는 ‘중노릇’을 철저히 하는 게 가장 큰 복입니다. 형식상 제도나 개혁을 해서는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성철스님이 평생 ‘부처님 법답게’ 사셨듯이 중노릇을 잘하면 한국불교는 제 갈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철스님을 평하신다면……?
아주 철두철미한 분이셨습니다. 어름하게 “긴가민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이런 분으로는 생각이 되질 않습니다. 대쪽 같은 성품으로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했던 것만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또 항상 우리 같은 걸망쟁이에게는 혹하고 반할 수 있는 그런 어른입니다. 정말 훌륭한 도인이십니다. 좀 쉽게 말하면, 웬만한 사람은 맨발 벗고 따라갈래도 갈 수 없는 분이었다고나 할까요.
끝으로 저희 상좌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큰스님 가르치신 대로, 평생 살아오신 대로만 하면 됩니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옛 인연담 이야기에 시간을 아끼지 않으셨던 일각스님의 법음을 다시 들으니, 영산회상에서 함께 담소를 나누고 계시는 두 분의 모습을 뵙는 것만 같습니다. 다시 한 번 큰스님 영전에 삼배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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