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암 노트]
불합리한 신앙은 종교의 자살
페이지 정보
편집부 / 1996 년 6 월 [통권 제2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8,438회 / 댓글0건본문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이 말은 기독교 국가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성(聖) 어거스틴(St.Augustine)의 선언으로, 신앙의 절대성을 표시한 말이다. 즉 신앙이란 어떠한 불합리한 사실이 있을지라도 오직 무조건 종조(宗祖)를 추종하여야 한다 함이니, 이야말로 종교의 지상명령이며 생명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미개한 우매시대(愚昧時代)에는 금과옥조가 될는지 모르지마는 인간의 지혜가 발달하고 문화가 풍부하여지고 공중에 인공위성이 돌고 지상에 원자탄이 폭발하는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통할지는 엄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불합리한 이론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면 합리적인 결과가 발생할 것인가?
이것은 다만 맹목적인 신앙에는 그칠지 모르나 추호도 객관적인 효과는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예로써, 태양이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진다고 억천만년 믿는다 해도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 자체에는 그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이다. 2+3=5의 합리적 사실을 2+3=6이라고 불합리한 사고방식을 세계 인류가 전부 믿는다 해도 2+3=6이 절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확실성이 없는 공리공론은 백해무익한 우맹(愚盲)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일체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면 문제의 해결은 고사하고 해결의 길 자체를 영원히 저지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는 아편이란 비난공격을 도저히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탁월하면서도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인 어거스틴 같은 지혜인(知慧人)이 어째서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는 삼척동자도 속일 수 없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말을 토하였을까.
여기에는 아주 깊은 까닭이 있다. 어거스틴 같은 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교묘한 언사가 숨어있는 것이다. 즉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의 불합리성을 엄폐하려는 일종의 수단방법으로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한마디로써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의 허위와 기만성을 여실히 폭로한 줄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로써 자기 종교의 절대성을 표현하려다가 도리어 자교(自敎)의 기만성만 고백하고 말았다. 결국 자기 구제책이 도리어 자살론이 되고 만 것이다.
만약 자기 종교에 불합리한 점이 없다면 이러한 언사는 절대로 생각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불합리한 종교는 인지(人知)가 발달함에 따라 점점 그 가면이 벗겨지고 그 진상이 드러나 마침내는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객관적 확실성을 토대로 하되 조리가 정연한 이론체계로써 조직된 종교만이 오직 인류의 영원한 태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종교계에 있어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기독교가 불합리한 허위성을 지닌 종교라면 기타의 종교는 문제 삼을 필요도 없이 배격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어디를 둘러보아도 반석 같은 합리적 체계 위에 세워진 종교가 없다면, 아마도 전 인류는 실망을 면치 못하리라.
* 이 글은 큰스님께서 성전암에 머무시는 동안 공부하신 이력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 수십 권의 노트 가운데 하나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 노트들은 큰스님께서 한국 불교의 법맥을 바로잡고 선종 정통종지를 밝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모으셨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며, 그 가운데 불교의 정수를 간명하게 밝혀 나가신 글이 있어 스님의 친필과 함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스님의 친필을 옮겨 적은 글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약간의 윤문을 가한 것입니다. - 편집부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옛거울古鏡’, 본래면목 그대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불면석佛面石 옆 단풍나무 잎새도 어느새 불그스레 물이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포행을 마치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2024년 10월호 『고경』(통권 …
원택스님 /
-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다네
어렸을 때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시절에 화장실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거든요. 무덤 옆으로 지나갈 때는 대낮이라도 무서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무덤 옆으로야 좀체 지나…
서종택 /
-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없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
성철스님 /
-
구루 린뽀체를 따라서 삼예사원으로
공땅라모를 넘어 설역고원雪域高原 강짼으로 현재 네팔과 티베트 땅을 가르는 고개 중에 ‘공땅라모(Gongtang Lamo, 孔唐拉姆)’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다. ‘공땅’은 지명이니 ‘공땅…
김규현 /
-
법등을 활용하여 자등을 밝힌다
1. 『대승기신론』의 네 가지 믿음 [질문]스님, 제가 얼마 전 어느 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글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이렇게 여쭙니다. 그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 중에 일심一心, 이문二…
일행스님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