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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기도]
검푸른 바다 위의 108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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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구  /  1997 년 12 월 [통권 제8호]  /     /  작성일20-05-29 10:22  /   조회11,45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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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큰스님을 한 번도 뵈온 적은 없습니다만 큰스님의 사상 속으로 깊어만 가는 것이 너무나 묘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필을 들었습니다.

경주에서 동쪽으로 40km 오다 보면 유난히 바다 빛이 아름다운 감포(甘浦) 항구가 나타납니다. 이곳이 바로 제 고향입니다. 부모님은 일찍부터 이곳에 삶의 터전을 잡고 어선 사업을 하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바다와 배와 더불어 살다 보니 자연히 부모님이 경영하시는 선박 일에 관심이 많이 쏠리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부모님께 중풍으로 몸이 불편하시게 되자 제가 직접 바다에 나가서 선장 일을 하고 선박도 경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파도 소리 가득한 바다 한가운데 선장실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푸른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선장실. 일원상이 눈에 뛴다.

 

매년 봄철이면 양산, 기장 멸치잡이, 가을에는 감포항에서 유자망 꽁치잡이 등 91년까지는 그런대로 어장이 좋아서 수입과 채산성이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92년, 부산에 대형 꽁치 봉수망 원양선박이 출어하면서부터 꽁치가 대량으로 생산되었습니다. 자연히 생선 가격은 떨어지고 선원들 수입은 적어지고, 그러다 보니 선원난으로 동해안 꽁치잡이 사업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면 안될 위기까지 도달했습니다. 어선 사업을 포기하려니 바닷가에서 마땅히 할 일도 없었고, 업을 바꾸려니 짧은 밑천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루에도 몇 채씩 기와집을 짓고 허물고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해가 바뀌어 93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매년 하는 양산, 기장 멸치 작업을 하고 감포에 돌아오니 7월 달, 친한 친구의 말이 ‘강원도에서 채낚기 선박을 운영하던 선주가 사정이 어려워 배를 판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알아보자고 하더군요. 확인을 해 보니 실제 배를 판다는군요. 그 선박을 인수하려면 부채를 많이 져야만 했습니다. 망설이고 있는 저에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중구 네 실력이면 그 정도의 부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친구와 주위 사람들은 제 어깨를 힘껏 밀어 주었습니다. 그런 성원에 힘입어 채낚기 선박을 인수하였습니다.

 

그해 가을이 오기까지 오징어 채낚기 사업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오징어 대풍이어서 가격이 떨어지고, 다른 사람이 운영하던 선박이다 보니 겉보기와 달리 기관시설이 형편없고 남들처럼 새롭게 손을 보자니 추가로 들어야 할 비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참 막막하기도 하고 담담하기도 했습니다. 몇 날 며칠을 생각해 봐도 연간 이자 적립하고 부채 갚을 생각을 하니 자신이 없더군요. ‘안 되겠다, 팔아서 빚이나 갚고 주위 분들에게 피해나 주지 말아야 겠다’고 결심하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몇 주일이 숨 가쁘게 지나가더군요. ‘파는 게 좋다’ ‘아니다,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게 좋다’ 의견이 갈리어 합의점이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중구야, 돈에 너무 신경쓰지 말아라. 가끔은 될 대로 되라는 배짱도 필요하다”고 하시며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너무 신경을 쓰니 잠도 오지 않고 나중에는 공포증까지 겹쳐버렸습니다. 하루는 막내 제수씨가 “아주버님, 경주 남산 근처에 생활불교하시는 분이 있는데 저랑 같이 가시면 어떠시겠어요”라며 어렵게 입을 떼었습니다. 마음도 달랠 겸 따라나섰지요. 그동안 혼자 속 끓이던 일들을 누군가에게 툭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그분은 저에게 경전을 한 권 권하시며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 두라고 하셨습니다. 한문 공부도 할 겸, 손에서 떼지 않고 짬이 날 때마다 읽어보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어딘가로 깊숙이 끌려가는 뜻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마침 양산수협에 계신 박국장님이 불심이 깊다는 주위의 평이 자자하기에 찾아가 뵈었습니다. 주위의 말씀처럼, 한 마디 한 마디 일러주시는 말씀마다 귀한 설법을 듣는 듯했으니까요. 박국장님은 당신이 보시던 두 권의 책을 건네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를 하셨습니다.

“부처님 법을 옳게 배우려면 우선 성철 큰스님의 법어집인 『자기를 바로 봅시다』와 『영원한 자유』를 읽으십시오. 가다가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그냥 넘어가셔도 됩니다. 가능하면 반복하여 애독(愛讀)하십시오. 그렇게 하다 보면 저절로 부처님의 말씀이 눈에 보이실 겝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열반하셨을 때, 연일 큰스님의 이름과 다비식 준비 장면들이 신문과 방송을 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큰스님을 조문하기 위해 해인사로 발걸음을 옮겼었죠. 그때 저는 ‘큰스님이긴 꽤나 큰스님인가 보다’하고 그저 평범하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박국장님이 건네 준 두 권의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후회도 많이 하고 더 늦기 전에 책을 통해서나마 성철 큰스님을 만나게 된 인연에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왜 큰스님 생전에 친견하지 못했던고!’

박국장님과의 인연으로 저는 큰스님을 제 마음속에 품게 되는 행운의 인연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진정한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허깨비 탈을 쓰고 헛꽃을 쫓아다녔을지도 모릅니다. 이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큰스님의 법어집은 모두 11권이었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마음 같아서는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책 읽는 일로만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지요. 책을 읽어 나가면서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급해하거나 안달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에서나 집에서나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펴 보고, 직접 차를 운전하여 장거리를 가게 될 때는 큰스님 법문 테이프를 항상 틀어 놓았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출렁이는 배와 함께 불을 환히 밝히고 바다 한가운데서 오징어 채낚기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순간 ‘이 5억, 6억 하는 선박이 부처님의 경전 한 권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구나’하는 생각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스러지더군요. 그 날 저는 다시금 결심을 했습니다. ‘내 남은 생은 큰스님의 제자로 살아야겠다’라구요.

한 번은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어느 절인지 알 수는 없고, 많은 불자님들이 법당 앞을 오고 가고 있더군요. 저도 그 무리에 끼어 있는데, 큰스님께서 뒷짐을 지고 지나가시면서 “공부를 하려면 안에서 해야지”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를 쳐다보고 하신 말씀은 아니었지만 꼭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씀일까’. 마치 꿈에서 화두를 받은 기분으로 그 소리를 가슴에 담고서 생활하다 보니 점점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96년 7월 17일 경, 선박을 수리하기 위해 목포에 들렀다가 구마고속도로를 타고 감포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해인사로 가는 이정표가 눈에 띄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큰스님께서 계셨다는 해인사 백련암에 들러 부처님께 인사나 하고 가야겠다 싶어 차를 돌렸습니다. 도착하여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한 스님에게 큰스님 상좌스님을 뵙고 싶다고 하자 다각실로 안내를 하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조금은 긴장되고 상기된 기분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마치 그동안의 공부를 점검받는 듯한 기부이었다고나 할까요. 잠시 후 한 스님이 들어오셨습니다. 말이 필요 없이 큰스님의 상좌스님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손수 따라 주시는 차를 한 잔 하고 나니 감회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스님은 제 얘기를 들이시고는 ‘예불대참회문’을 주시면서 큰스님께서도 매일 108배를 하셨다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저는 108배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바다에 나갈 때는 선장실 안에서, 집에 있을 때는 방에서, 비록 시간을 정해놓고 하지는 못하지만 일과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적절하게 합리화해 가며 그 안에서 편안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의도한 대로 일이 안되면 네 탓이니 조상탓이니 하며 온갖 불평을 쏟아내게 되지요.

막상 발등의 불이 떨어지고 나면 그때서야 부처님, 하느님 나 좀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빌지 않습니까. 종교를 믿는 마음이 이래서야 될까 싶습니다.

나이 만한 지혜도 없고, 역경만한 학문도 없는 듯합니다. 뒤돌아보니 바다와 함께 동고동락한 세월이 벌써 50여 년, 그동안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 배는 그냥 오징어잡이 배가 아닙니다. 선장실 벽에는 일원상이 걸려있고, 제가 탐독하고 있는 불서들과 큰스님의 법문집 등이 촘촘히 꽂혀 있습니다. 망망대해로 오징어잡이를 나온 날, 잠시 틈을 내서 이곳에 앉아서 책을 읽고 절을 하다 보면 마치 큰스님을 따르는 유치원생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학생이라야 나 하나뿐, 그래도 저는 즐겁습니다.

 

갑판 위로 올라와 검푸른 바다 위에 일렁이는 불빛들을 바라봅니다. 불빛을 따라온 오징어들이 낚싯줄에 걸려 한 마리씩 올라옵니다. 생명을 잡는 이 직업이 괴로울 때도 있지만, 아마도 이생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이제 저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 부처님의 법을 그대로 실행하는 불제자가 되는 나와 인연 있는 모든 분들에게 웃음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모두 성불하시기 바랍니다.

 

1997년 11월 18일 동해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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