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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面石]
좀 더 깊이 생각하는 불교로 탈바꿈해야 --성철스님을 보는 시각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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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배  /  1996 년 3 월 [통권 제1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9,18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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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배(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학교 한국학과 불교학 교수)

 

“한국적인 것이란 어떤 것인가”를 밝혀 보려는 〈한국사상 세미나〉가 지난 10월초 미국의 뉴저지 주에 있는 드루 대학 ‘한국신학사상연구소’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원효사상〉에 대해서 발표하였다. 나의 발표가 끝나자, 한국에서 온 어느 신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경력을 보니까 절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한 적이 있던데 거기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홍보용 유인물을 보고 내 약력을 안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약간 망설였다. 그런 이야기는 하기로 들면 며칠을 두고 이야기해도 다 못할 긴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그 학생은 나의 이러한 망설임을 눈치 챘던지 질문의 범위를 좀 좁혀서 다시 물었다.
 “절에서 공하는 것과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양자를 비교하여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큰 질문이었지만 나는 간단하게 1966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 큰스님을 모시고 묵언정진했던 이야기로 내 답변을 대신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나의 답변을 끝맺었다.

“요즘 대학에서 하는 공부는 한마디로 말해 책을 많이 읽는 공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절에서 하는 참선 공부는 책도 문자도 모두 버리는 공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공부가 다 애써서 열심히 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결과는 양자 간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스스로 경험했습니다. 누가 저더러 책을 언제 가장 많이 읽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을 때이었다고 답변하겠습니다. 그땐 책을 많이 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 책상 위에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불철주야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인생에 진정한 힘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저는 제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 했었는데 모든 길이 다 막혀 완전히 캄캄해지고, 있는 힘이 다 떨어져 완전히 기진맥진한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한 줄기 빛이 필요했으며,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새 힘도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책에서 얻은 지식은 힘이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책도 문자도 다 집어 던져버리고 묵언으로 일관했던 백련암 시절의 참선, 그것은 빛이 되어주고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 학생이 얼마만큼 내 말뜻에 공감했는지 알 길은 없으나 내 진정한 체험을 그에게 이야기해 준 것은 사실이다. 지금 성철 큰스님은 열반에 드시고 나는 도반들과 따로 떨어져 외국에서 살면서 불자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가 여전히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옛날 백련암에서 빛과 힘의 원천 같은 참선을 몸에 익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백련암에서 산 것은 1966년부터 1968년까지였다. 얼마 되지 않는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나는 내 인생의 많은 것을 정리할 수 있었다. 모두가 큰스님의 큰 법력에 힘입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성철스님을 처음으로 소개해 주신 분은 일타스님이었다. 나의 성철스님과의 첫 인연은 1960년대로 소급해 올라간다. 이 무렵에 나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때 지도교수 중의 한 분이 김잉석 교수님이었다. 김교수님은 나에게 〈보조사상 연구〉라는 과제를 주셨다. 나는 보조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고승과 석학을 두루두루 찾아다녔다. 삼척 영은사로 탄허스님을 찾아가〈도서〉를 다시 배우고, 해인사로 운허스님을 찾아가〈절요〉를 다시 배웠다. 그리고 서울대학으로 박종홍 교수님을 찾아가 한국철학사를 배웠다. 원래 화엄학을 전공하신 김잉석 교수님도 보조사상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었다. 이러한 은사들의 지도 덕택에 나의 보조 연구는 큰 진전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느 날 나는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때 해인사에 계셨던 일타스님께서 “성철스님은 보조국사를 비판한다”고 귀띔해 주셨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뉴스이었다. “이 세상에 보조국사를 비판하는 사람도 다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함께 왜 비판하는 것일까 하는 지적 호기심이 크게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성철스님을 친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성철스님은 깊은 산중에서 철조망을 치고 살면서 아무도 안 만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성철스님을 친히 뵙지 못한 채, 일타스님에게서 들은 ‘성철스님의 보조비판’을 나의〈보조사상 연구〉라는 논문에 소개했다. 이 논문은 다음해에 취직논문으로 동국대학교에 제출되었다. 이때 나는 큰 곤욕을 치렀다. 송광사 출신이신 김잉석 교수님이 국로(國老:보조국사를 높여서 쓰는 말)를 모독했다 하여 내가 제출한 논문의 심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김교수님은 나더러 해당 부분을 삭제하여 다시 제출하라고 종용하셨다. 나는 이를 거부했다. 필자 자신의 학설도 아니고 단지 제3자의 비판적 의견을 소개했을 뿐인데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학문의 세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사위원회는 나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취직이 되었다.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성철스님 때문에 하마터면 동국대학교의 교수자리를 놓칠 뻔하였다. 나의 성철스님과의 인연은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취직 논문으로 제출한 〈보조사상 연구〉가 통과되어 취직이 되었지만 대학에서는 나에게 보조사상 강의를 맡기지는 않았다. 내가 처음에 맡은 과목은 일반논리학, 철학개론, 인도철학사 등이었다. 그러나 정규 학사과정을 벗어나면 보조사상을 강의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대학선원’ 토요법회나 ‘대학생불교연합회’ 수련대회 같은 곳에서 나는 보조사상 강의를 수없이 많이 했다. 내 강의의 핵심은 항상 ‘돈오점수설’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청중들의 호응이 매우 좋았다. 비록 내 취직논문에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을 소개하기는 했지만, 그 당시 나는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돈오점수설’을 비판한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은 그 존재조차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엔 ‘돈오돈수설’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것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도 거의 무감각했었다. ‘돈오점수설’에 대한 나의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불교연합회’에 구도부가 생기고 내가 그 지도를 맡은 다음부터였다.

 

문제는 뚝섬 봉은사에 ‘대학생수도원’을 차리고 거기서 구도부 학생들과 합숙하는 과정에서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의 이상은 대학생활과 수도생활을 겸전한다는 것이었다. “낮에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절에 들어가 스님들과 함께 참선한다”는 우리의 구호는 그대로 우리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현실 앞에 그렇게 무력할 수가 없었다. 이상과 현실의 거리,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세운 서원과 이 서원을 실천할 수 있는 나 자신의 능력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화려한 출발 뒤에 너무나 많은 난관이 복마병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무엇 하나도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도 강조했던 조석예불과 새벽정진을 빠지는 경우가 잦아지고 학생들의 성적은 떨어지고 나의 연구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오랜 숙원을 이룬 듯한 기쁨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대학생활도 수도생활도 모두 다 실패라는 참담한 심경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어둡기만 했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석달이 지나자, 무시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대학생활과 수도생활을 겸전한다”는 것은 두 직장을 가지고 밤낮으로 뛰는 것만큼이나 힘에 겨운 중노동이었다. 그때 우리에겐 휴식이란 것이 거의 없었다. 쉬는 시간이라고는 밤에 쓰러져 자는 몇 시간의 잠, 그것뿐이었다. 이런 생활을 석달 계속하니 사람의 몸이 견디지 못했다. 지고 다닐 수 없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녔던 것이다. 여기서 나의 돈오점수적인 수도이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에서는 “먼저 깨닫고, 그 다음에 닦는다”는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사상이 매우 중요하다. 이 점은 중국의 종밀(宗密 : 780-841)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닦음은 깨달은 다음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마치 이미 깨달음의 문제는 해결된 듯이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깨달음의 문제는 제쳐놓고 닦음의 문제에만 골몰했었다. 그러다가 닦음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다시 선오(先悟)라고 말할 때의 오(悟)가 무엇이냐라는 문제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의 나의 이해로는 돈오한 다음에 점수한다고 말할 때의 ‘점수(漸修)’는 보살만행(菩薩萬行)을 의미했다. 그러나 자기가 제도 받기 이전에 남들이 먼저 제도 받도록 돕는다는 ‘자미득도 선도타(自未得度 先度他)’의 정신으로 사는 수도자가 일체 중생을 위해서 모든 일을 다한다는 보살만행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이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정말 쉽지 않았다. ‘쉽지 않다’는 정도가 아니고 정직하게 말해서 그 일은 나에게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꽉 막혔다. 진퇴양난이었다. 어떻게든 이 짐을 내려놓아야 살 것 같은데 그게 쉽지 않았다. 명분이 없었다. 너무 시작이 거창했고 너무 큰 서원을 앞세웠기 때문에 슬그머니 그만둘 수조차 없게 되어 있었다.

 

사상 체계가 근저로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니 마치 지진을 만난 건물처럼 모든 것이 함께 흔들렸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적혀 있는 불경을 너무 자기 편리한 대로 읽었던 것 같다. 우리는 화엄경의〈보현행원품〉에 나오는 ‘수순중생(隨順衆生)’이란 말을 가장 좋아했는데, 그 좋은 말이 굉장히 부담스러워졌다. 불경을 문자 그대로 읽을 때의 해독이 나타난 것이다. “일체 중생을 수순한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지금 현재의 이 육체와 정신상태를 가지고 일체중생을 하나도 차별없이 수순하려 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육체에 대한 재해석, 현재의 정신상태에 대한 보다 철저한 분석, 그리고 ‘수순(隨順)’의 의미에 대한 실천적 차원의 재해석이 불가피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다시 깨달음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었다. 내가 도달한 깨달음의 경지가 어떤 것인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리 보이고 거기에 따라 나의 능력도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난관과 번민의 와중에서 한 학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겨울방학이 되었다. 그땐 방학이 구원이었다. 나는 대학생 수도원생들과 함께 경북 문경에 있는 김용사로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성철스님과는 우리들 모두가 퍽 가깝게 느끼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이미 지난해 여름에 3000배를 하고 나서 많은 가르침을 받은 뒤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온 겨울방학을 김용사에서 보냈다. 방학 동안에 우리는 큰스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신심명〉〈증도가〉〈돈오입도요문〉〈육조단경〉을 다 배웠고, 7일간의 철야 용맹정진도 했다. 학생 중에 누군가가 무엇을 잘못했다 하여 그 벌로 모두 함께 3000배를 다시 하기도 했다. 모두가 다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다. 방학이 끝나자 학생들은 모두 서울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홀로 김용사에 남았다. 힘든 세상에 다시 돌아가기가 싫었다. 대학 교수도 싫고 ‘대학생수도원’의 지도교수 노릇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중이 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내가 하루 3000배를 21일 동안 계속하는 것을 보시고서야 큰스님은 나의 출가를 허락하셨다.

 

내가 머리를 깍은 지 얼마 안 되어 큰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물론 우리 제자들도 함께 백련암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큰스님께서 해인총림의 방장이 되시자 우리 역시 모두 큰절 퇴설당으로 자리를 다시 옮겼다. 이때에 해인사에서 큰스님은 저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門)’을 하셨다. 백일법문은 한마디로 말해서 ‘돈오돈수’의 경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법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당시의 나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이때부터 나는 ‘깨달음’과 ‘깨침’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깨달음과 깨침이 둘일 수 없지만 초보자들이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경지의 심천을 따질 줄 알아야 한다.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에서 말하는 ‘돈오’는 최초의 각이기 때문에 해오(解悟)라 부르고,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에서 말하는 ‘돈오’는 마지막의 구경각이기 때문에 증오(證悟)라 부른다. 최초의 해오는 ‘깨달음’이고, 구경각은 ‘깨침’이다. 해오인 깨달음을 증오인 깨침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수도자는 구경각인 깨침을 목표로 삼아야지 해오인 깨달음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 많은 의심이 일시에 풀리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봉은사에서 대학생수도원생들을 지도할 때 깨달음과 깨침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간과하고 ‘점수(漸修)’를 한다고 날뛰었으며 일이 제대로 풀릴 수가 없었다는 것을 그때에 깨달았다. 책을 읽다가 조금 밝아진 것을 과연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지 크게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조만간 변질되어 버릴 그런 조그만 한 깨달음에 집착하여 매사를 그것으로 요리하려 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다. 이렇게 하여 나는 돈오점수설을 청산하고 돈오돈수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큰스님의 ‘백일법문’은 한국근대 불교사에 큰 획을 긋는 사상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법문은 매일 오전에 강원 큰 방에서 있었다. 향곡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이 외지에서 오셨고 해인사의 대소 암자에서도 스님들이 많이 오셔서 항상 장소가 비좁았다. 해박하고 명석한 큰스님의 법문에 우리들 제자들은 큰 감동을 받아 신심이 나서 모두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러나 백일법문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다 큰스님의 법문에 감동된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구라고 이름을 댈 필요는 없지만 뒤에서 빈정대는 듯한 말을 하는 스님들도 있었다. 나와 함께 출가했던 원공스님은 이를 참지 못했다. 나는 그런 일에 대해서 좀 무감각한 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가 다 아름다웠던 것 같다. 그게 중생상이기 때문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면 그것은 중생상이 아니다. 중생상이 아닌 것은 진실상이 아니다. 중생상을 극복한 듯이 말하면 굉장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사실이 아닌 조작이기 쉽다. 백일법문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므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좋다. 유태인들이 만든 구약이나 사마천의 사기가 인류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는 이유는 사람으로서는 입에 못 담을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모두 정직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대로!”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이 아닐까. 모든 것을 무심으로 기록하면 되는 것이다. 역사적인 기록에 어떤 인위적인 조작을 가해서는 안 된다. 백일법문은 또한 생명을 지닌 살아있는 역사이다. 생명 현상에는 반드시 바람직하지 못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늙고 병들고 죽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란 말이다.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 생명이다. 이런 부분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생명이 아니다. 생명을 가장하고 있는 죽음이다. 생화(生花)와 조화(造花)의 차이도 바로 거기에 있다 하지 않던가. 조화(造花)에는 상하거나 병든 부분이 없다. 그러나 생화(生花)에는 상하고 병든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아니면 적어도 병들어 갈 수밖에 없는 약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현상’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한 명도 빠짐없이 전원 감동했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큰스님의 법문에 비판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을 닦아세우려는 원공스님을 말렸다. 있는 그대로가 아름다운 것 아니냐고. 조작하거나 강요하면, 바로 그 순간 생명은 죽는다. 생명이 사라진 곳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조화는 아무리 세련되게 만들어져도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한다. 썩고 상한 부분이 있어도 생화라야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생명의 힘이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북한에서 나온 보도나 요즈음 파죽지세로 일어나는 유사종교 단체에서 나온 보도들이다. 지도자가 한마디 하면 단 한 명의 반대자도 없이 전원 일치하는 장면이 눈에 띈다. 이런 보도물을 만든 사람들은 잘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그것이 사실이냐에 있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사실은 뒤에서 누군가가 대중을 조종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불란서의 작가 로망 롤랑(Romain Rolland : 1866-1944)은 인도의 간디를 존경했다. 그래서 그는 인도로 간디를 찾아갔다. 마침 그때 간디의 강연을 듣는 큰 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임의 풍경이 너무나 뜻밖이어서 롤망은 큰 충격을 받았다. 간디의 강연을 듣는 군중들의 태도가 말이 아니었다. 강연은 안 듣고 들락날락하는 사람, 뒤에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사람, 절반쯤 누워 있는 사람, 그는 너무 실망했다고 한다. 천하의 성자(聖者)이신 마하트마 간디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롤랑은 도저히 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도 중생상을 본다. 다시 말하지만 중생상은 진실상이다. 사관학교 학생들의 강의 듣는 모습은 100점일지 모른다. 그에 비해 간디의 강연을 듣는 인도 사람들의 태도는 빵점을 맞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참모습은 간디와 인도인들 사이에 있는 것이지, 사관학교 교관과 생도들 사이에 있지 않다. 나는 조작된 아름다움보다도 아름답지 못할망정 진실한 편을 택하고 싶다. 진실이라야 생명에 가깝고 그래야 거기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큰스님의 백일법문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선승(禪僧)이 왜 저렇게 말이 많으냐”는 것이었다. 말이 적어야 선승이라는 발상은 어디서 나왔을까. 불교를 처음 시작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참으로 말을 많이 하셨다.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팔만대장경을 보면 이를 금방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몇 백년 동안 불교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소위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초기에 실질적인 기초작업을 튼튼히 한 분이 다름 아닌 나가르주나(Nagarjuna : 150-250 A.D.) 즉 용수보살이었다. 그 분 또한 많은 말을 하셨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을 비롯한 그의 많은 저술들을 보면 이를 곧 알 수 있다. 그밖에도 대승불교 운동을 성공리에 완성시키기 위하여 많은 보살들이 출현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다. 이런 사실은 모두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이런 일은 중국, 한국, 일본은 물론 세계의 어디서나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논지는 결코 말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안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입을 열지 아니한 성자들도 무수히 많다, 문제는 말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왜 말을 했으며, 또 무슨 말을 했는지를 똑바로 아는 일일 것이다. 그때에 왜 백일법문이 필요했는지 그리고 백일법문의 메세지가 무엇인지 그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시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고,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고, 사람들이 갈팡질팡 어디로 가야 할 줄 모르고 있는데, 눈 밝은 사람들이 어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일단 입을 연 이상 그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바닥을 볼 때까지, 줄기차게 밝힐 것을 밝히며 그리고 한번 밝히기로 작성한 이상, 말은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명료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잘 알아들어 의심 없이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견(正見)과 정언(正言)과 정업(正業)의 길을 걷는 불제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부처님과 용수보살이 그 좋은 모델인 것이다. 불법을 투철하게 깨달아 지혜와 자비를 함께 갖춘 도인이라고 존경받는 선지식 스님들이 이렇게 하지 않고 어떻게 달리 세상을 살다가 갈 수 있을 것인가? 바른 말이 필요한 때에 소위 선승이 되기 위해서 말하지 않는 것만을 장기로 삼는다면 그런 맹목적 선승은 어디에다 써먹을 선승이며, 그런 선승들이 많을 때 그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말을 많이 하면 선승이 아니라든지, 선승이 되기 위하여 말을 않는다는 사고방식은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잘 나타내고 있다. 불행히도 이 사고방식이 지금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다.

 

“선승은 모름지기 주장자 법문을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한국불교계에 널리 퍼져 있는 고질병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법상에 올라가 대중들에게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태연히 하고 있는 선승들이 많다. 이러한 폐풍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유능한 젊은이들이 지금 불교계를 떠나고 있으며, 또한 불교계에 들어오기를 꺼리고 있는지를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오대산 월정사에 계셨던 탄허스님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람들이 보조스님의 어록을 읽고 “본분종사(本分宗師)의 법문은 아닌 것 같다”고 평하는 데 대해서 탄허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보조법어에 주장자 법문이 없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의 이러한 보조평은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듣고 “선승이 왜 저렇게 말이 많아” 하는 평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요즘 학자들이 보조스님과 성철스님을 도식적으로 대조시킬 때도 역시 비슷한 사고방식이 발견된다. “한 분은 돈오점수요, 또 한 분은 돈오돈수니까 두 분은 완전히 다르다”고들 말한다. 이러한 대조는 매우 피상적인 관찰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두 분은 다른 점보다는 같은 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첫째, 우리는 두 분이 모두 다 주장자 법문만을 장기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둘째로 두 분은 모두 시대와 사회를 그 나름대로 걱정하신 분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간혹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은 스님들이 삭발하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사회를 외면하면서 산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매우 피상적인 관찰일 뿐이다. 사실 많은 스님들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하여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저술을 읽어보면 곧 알 수 있다. 세속에서 살아야 세속을 더 잘 알고 세속을 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우상일 것이다. 셋째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두 분이 다 당신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무척 노력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들의 사상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계속해서 글을 쓰는 자세에서 곧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두 분이 선을 강조하면서도 주장자 법문에 안주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같은 병인데도 양의의 진단과 한의의 그것이 다르듯이, 시대와 사회의 병에 대한 지도자들의 처방도 그 입장에 따라 또는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다. 나 역시 어떤 종교적인 문제를 가지고 나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나의 체계에 입각한 나의 판단을 가지고 나의 처방을 쓰지, 보조스님이나 성철스님의 처방을 그대로 쓰지 않는다. 이것은 부단히 변하는 세상을 사는 사람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큰스님들은 체(體)를 주로 말씀하셨다면 나는 지금 용(用)을 말하고 있으며, 큰스님들이 불변(不變)의 면을 강조하신다면 나는 수연(隨緣)의 면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러한 태도가 조금도 큰스님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님을, 좀 더 깊이 생각하는 독자라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불교는 앞으로 “좀 더 깊이 생각하는 불교, 좀 더 정확히 자신을 표현하는 불교”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사(正思), 정언(正言)이 사라진 불교가 지금의 한국불교라고 말하면 오진(誤診)일까.

 

주장자 법문만을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본심은 무엇일까. 깨침? 그러나 불교인치고 깨침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주장자 선객들은 깨침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본분종사인 척하지만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이들 중 상당수는 학적인 것에 대한 강한 반발을 종지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문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올바로 생각하고 올바로 말하고 올바로 실천하자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니까 이를 바로잡자는 것이 학문의 근본 사명이다. 한국불교는 오랫동안 선과 교라는 도식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오류에 빠져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 불교인들은 보조스님이나 성철스님처럼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사상적으로 문제를 밝혀보려는 노력을 높이 살 줄 몰랐다. 부처님을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큰일을 하신 역대의 큰스님들이 모두 그랬건만 한국의 주장자 법문 신봉자들은 이런 가치를 알아볼 줄 몰랐다. 보조스님도 성철스님도 모두 붓을 들었다 하면 항상 말이 되게끔 말씀하셨다. 모두 학문적인 감각이 있으셨던 것이다. 말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학문의 보편적인 원칙을 지킬 줄 알았다. 모두 학문적인 자질이 탁월하신 분들이었다. 이런 공통점들 때문에 지금 두 분의 사상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어느 분의 어느 학설에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고에 앞서서, 올바로 생각하고, 올바로 말하고, 올바로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말이 되게끔 말씀하신다는 말은, 중생이 알아듣게끔 말씀하신다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다. 중생이 알아듣지 못하고서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 두 분 모두 요즘의 보통 주장자 법문 신봉자들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백일법문’이 있은 지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 대한 학적인 평가는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백일법문’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앞으로 철저한 학적인 분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큰스님에 대한 맹목적인 미화가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큰스님의 사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에서의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큰스님의 사상은 역사 속에 살아남을 수 있다. 획일적인 숭배만 있어서는 안 된다. 스위스에 칼 발트(Karl Barth : 1886-1968)라는 신학자가 있었다. 그 분의 신학체계는 비교적 보수적인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저런 사람이 어찌 발트의 제자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유롭고 혁명적인 제자도 있었고 때로는 반 발트적인 신학이론을 전개한 제자도 있었다. 이런 현상을 보고 사람들은 평한다. 발트라는 인물이 컸기 때문이라고. 사람됨이 크지 않고서는 자기와 다른 인물을 키워낼 수 없을 것이라고. 불교를 가리켜 큰 종교라고 말하는 까닭도 불교가 사람사람이 지닌 차이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부처님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불교가 가는 곳마다 “인연따라 일어난다”는 연기설(緣起說)이 계속 문제되었고, 대승불교권에서는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모든 것을 다 생성케 한다”는 공(空)의 이론이 주목을 끌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연기적인 존재이고 공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원래는 큰 인물 아닌 사람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인간관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간관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각양각색의 여러 가지 면을 다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부처님도 그렇고, 부처님 법을 이으신 역대 조사들도 그렇고, 한국의 모든 고승들이 다 그렇고, 우리 성철 큰스님도 그렇다. 내가 만나 뵌 성철 큰스님은 적어도 그런 분이었다. 보조스님을 보는 시각이 다양한 만큼 성철스님을 보는 시각도 다양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것이 중생상이고 또 진실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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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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