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치 않다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다시 듣는 가야산 사자후]
긍정치 않다


페이지 정보

성철스님  /  1996 년 12 월 [통권 제4호]  /     /  작성일20-05-06 21:16  /   조회9,314회  /   댓글0건

본문

 


 


수시
(한 번 주장자 내려치고 말씀하시되)
一 二 三 四 五로다.
(또 한 번 내려치고)
五 四 三 二 一이로다.

(주장자를 무릎 위에 가로 얹고 말씀하였다.)

수미산 꼭대기에서 흰 물결이 하늘에 넘치고
큰바다 파도 속에서 붉은 티끌이 땅을 휩쓴다.

 

고칙

구봉(주1)스님이 석상(주2)수좌에게 물었다.
 “선사(先師)께서 말씀하시기를, ‘쉬어가고 쉬어가며, 한 생각이 만년까지 이어가며, 찬 재 마른 나무같이 가며, 한 가닥 흰 실같이 뻗쳐 간다’ 하셨으니, 말해 보라! 어떤 일을 밝히신 것인가?”
석상수좌가 대답했다.
“일색변사(一色邊事)(주3)를 밝히신 것이니라.”

 

해설

옛날에 청량산에 석상이라는 유명한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조실로 누구를 모셔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석상스님의 휘하에 수좌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부조실격이었습니다. 그 수좌스님이 덕이 높고 지견이 깊어 대중이 모두 다 이 스님을 조실로 모시자고 의논이 되었습니다. 그때 구봉이라는 스님이 석상스님의 시자로 있었는데, “아무리 대중이 그렇게 말하지마는 나는 의견이 다르다. 내가 한 번 법문을 물어보고 결정해야지 그렇지 않고는 조실로 모실 수 없다”고 하고 다음과 같이 물은 것입니다. 일색변사란, 천상․만상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다 평등하다 곧 절대 평등인 그것을 말합니다. 비유로 말하면, 겨울에 눈이 하얗게 내려서 온 천하 만물이 흰 색 하나로 통일되어 눈빛만으로 덮혀 있지 다른 빛은 볼 수 없는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칙

구봉스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선사(先師)의 뜻을 모른 것이다.”
석상수좌가 말했다.
“네가 나를 긍정치 않는단 말이냐? 그럼 향을 가져 오너라.”
수좌가 향을 피우면서 말하였다.
“내가 만약 선사의 뜻을 알지 못했다면 향 연기 일어날 때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해설

한 줄기 향이 다 타기 전에 내가 열반에 들면 내가 선사의 뜻을 아는 것이고 열반에 들지 못하면 모르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입니다.

 

고칙

이에 향 연기가 일어나자마자 바로 앉아서 숨을 거두니 구봉스님이 그 수좌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하였다.
“좌탈입망(坐脫立亡)(주4)은 없지 않지만 은사의 근본 뜻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

 

해설

향 연기가 피어오르자마자 수좌스님이 합장하고 열반에 드니 누가 보든지 그 수좌스님이 참으로 나고 죽음에 자유자재한 분이니만큼 참으로 조실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냐고 대중이 술렁거렸습니다. 그러자 구봉스님이 그 생사에 자유자재한 수좌스님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하길, “앉아서 죽고 서서 죽기는 했다. 나고 죽음에 자유자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스님의 근본 뜻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고 단언을 내어 버렸습니다.

 

깊게 갈아 얕게 심고 귀하게 사서 천하게 파니
이익이 있고 없고 간에 시장을 떠나지 않는다.

 

해설

이 송의 뜻을 바로 알면 앞의 석상스님의 법문이나 구봉스님의 법문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착어

이 공안이 지극히 알기 어려우니 옛부터 법문이 많으나 그 뜻을 바로 아는 이는 드물다.

 

해설

이 법문은 보통 피상적으로 보는 것과는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누가 보든지 앉아 죽고 서서 죽는 생사에 자유자재한 수좌도 스님의 도리는 모른다 했으니 구봉은 알고 수좌는 실제로 모르는 것이 아닌가 대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칙

천동 각선사가 송하였다.
“석상의 한 종파를 친히 구봉에게 전하니
향 연기에 숨져가도 바른 법맥을 통하기 어렵다.
달 속에 둥우리 친 학은 천년 꿈을 꾸고
눈 집 속에 사는 사람은 일색공(一色空)(주5)에 미(迷)했다.
시방(十方)을 앉아 끊어도 오히려 이마에 점이 찍히니
가만히 한 걸음 옮겨야 나는 용을 보리라.”

 

해설

중국 전설에 잉어가 용이 되려면 용문(龍門)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 용문을 지나가지 못하면 이마에 한 점 탁 찍혀 떨어져 버리고 만다고 합니다. 예전에 과거시험을 볼 때, 급제하지 못하면 그 사람을 점액용(點額龍)이라 불렀습니다. 이마에 점이 찍힌 용, 그만 낙제했다는 말입니다. 설사 시방세계를 앉아서 끊고 앉아 죽고 서서 죽는 생사에 임의자재한 대자유자재한 그런 사람이라도 불교의 근본 뜻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가만가만 한 걸음 옮겨 놓아야 나는 용을 볼 거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문에서 말하는 전신구(轉身句)라는 것입니다. 시방세계가 일색변사라고 그대로 앉았다가는 절대로 불조의 도리는 모르는 것이고 거기에서 몸을 굴려야만 나는 용을 본다는 것입니다.

 

착어

억! 이 여우새끼야! 캄캄해 모르니 옛사람을 비방하지 말아라.

 

해설

천동 각스님도 칠통 같은 견해를 가지고 공연히 석상을 비방하고 구봉도 비방하니 그래서 불법을 모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만이 이 석상의 도리를 알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석상 당시 조동종의 개조인 동산스님이 계셨는데, 한 번은 해제 때에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하셨습니다.

 

고칙

동산스님이 말하였다.
“초가을 늦여름에 형제들이 혹 동으로 가고 혹 서로 가거든 모름지기 만리 먼 길에 풀 한 포기 없는 곳으로 곧 바로 가야 하리라.”
또 말하였다.
“다만 만리 먼 길에 풀 한 포기 없는 곳으로 어떻게 가겠느냐?”
석상스님이 이 법문을 듣고 말하되
“문을 나서면 문득 다 풀이니라.”
하니, 동산스님이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이는 일천오백 선지식의 말이로다. 또 큰 당나라 안에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해설

이때는 석상스님이 고행을 할 때인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파묻혀 살았습니다. 그때 어느 스님을 만나 동산스님이 해제 때에 그렇게 법문하신 것을 전해 듣고는 석상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문을 나서면 전체가 다 풀이다”고 했습니다. 동산스님 말씀은 풀 한 포기도 없는 그런 곳으로 가라고 말했는데 석상스님은 정반대로 “문을 나서니 전체가 다 풀이다”고 했습니다. 혹 말하기를 문에 들어가고 나가고 하면 그건 풀 아니냐 이렇게 볼른지 모르지만 그것은 석상의 뜻을 근본적으로 모르는 것입니다. 그 뜻은 저 깊은 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 그 석상스님의 말씀을 동산스님에게 전했더니 “이것은 일천오백 인을 거느리고 있는 그런 큰 선지식의 법문이다”고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볼 때는 얻어먹는 거지나 남의 일이나 해주는 머슴같이 보일른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천오백 명이나 되는 큰 대중을 거느릴 수 있는 대선지식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당나라 땅덩어리가 이렇게 크고 넓지만은 이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아침에는 삼천이요 저녁에는 팔백이라
산문에서 합장하고 불전에서 향을 사룬다.

 

착어

이것은 두 큰스님의 높고 깊은 법문이니 만약 투철하여 남음이 없으면 수좌와 구봉시자의 부질없는 갈등을 알거니와 혹 그렇지 못하면 또한 옛사람의 평론을 들어보리라.

 

고칙

화엄 각선사가 말하였다.
“종사(宗師)가 행하는 곳은 불이 얼음을 녹임과 같아서 시비의 관문을 뚫고 지나가고 모든 기틀에 득실이 없다. 모두 말하되, 수좌는 일색(一色)에 머물러 있고 구봉시자는 지견(知見)이 스승을 뛰어난다 하니, 가히 체(體)는 묘하나 그 종지(宗旨)를 잃었고, 전혀 그 향배(向背)를 모른다 하리라. 참으로 수좌는 해오라기가 눈 속에 서 있으나 종류가 같지 않음과 같고 구봉시자는 봉황이 붉은 하늘에 날더라도 금 그물에 걸리지 않음과 같음을 모른다. 한 사람은 높고 높은 산꼭대기에 서 있고, 한 사람은 깊고 깊은 바다 밑을 가는 것이니, 각각 자기의 방위를 따라와서 같이 구중궁궐에 모임이로다. 이제 이 두 사람은 아는가?”
불자를 세우고 말하되
“용이 푸른 못에 누워 있으니 바람이 늠름하다.”
하고, 불자를 눕히고 말하였다.
“학이 하늘로 돌아옴에 등이 하늘을 스친다.”

 

해설

수좌는 일색변에 머물러 있으니 선사의 도리를 모르는 것이고, 시자는 스님을 뛰어나니 수좌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이렇게 다들 평하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동서남북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수좌는 해오라기가 눈 속에 서 있는 것과 같으니 흰색은 같은 흰색이지만 그 품류가 다르다. 시자는 봉황이 저 하늘에 나는 것 같고 금으로 얽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은 저 높고 높은 산마루에 서 있고 한 사람은 깊고 깊은 바닷속을 가고 있으나, 스스로 각각 자기의 방위를 따라와서 즉 한 사람은 산에서 오고 한 사람은 바다에서 와서 같이 함께 구중궁궐에 모이더라. 이제 이 두 사람을 알겠는가?

 

착어

억! 삿된 법을 부지하기 어렵다.

 

고칙

원오선사가 송하였다.
“죽음 가운데 삶을 얻는 사람은 무수하나
삶 가운데 죽음을 얻음은 예부터 드물다.
마른 나무에 봄이 일찍 돌아옴을 알고
찬 재에서 다시 불꽃 일어나는 때를 모른다.
구봉시자여, 참으로 어리석으니
비록 선사의 뜻은 알았으나
온 몸이 범의 함정에 빠짐을 면치 못하느니라.

 

해설

보지 못하였는가. 만송스님이 말하되,
‘집안의 시설은 구봉만 못하지마는
이치에 들어간 깊은 법문은
수좌가 오히려 백보나 앞섰다‘고 하였다.”

 

착어

억! 사람을 모함하는 죄는 죄로써 처벌하느니라.

대중들이여, 이러하니 이 한 얽힘의 공안의 핵심은 마침내 어느 곳에 있는가?

(한참 묵묵한 후에 읊으셨다.)

 

산호 베개 위에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이여
한 줄기는 그대를 생각함이요 한 줄기는 그대를 원망함이로다.

 

해설

베개는 산호보석으로 만든 좋은 베개를 베고 있는데 두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의 반은 그대를 생각하는 것이고 반은 그대를 원망하는 것이더라. 한 줄기 눈물은 그대를 참으로 못 잊어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그런 눈물이고 한 줄기 눈물은 그 사람을 보지 못해서 참으로 원망이 가득차서 원망하고 원망하는 눈물이더라.

 

사 자 후 원 문

 

수시
(卓柱杖一下云) 一二三四五요 又一下云 五四三二一이라 (橫按柱杖云) 須彌頂上에 白浪이 滔   天하고 大海波心에 紅塵이 括地로다

 

고칙

九峰이 問石霜首座云 先師道호대 休去歇去하며 一念萬年去하며 寒灰枯木去하며 一條白練去라하니 且道하라 明什麽邊事오 座云明一色邊事니라 峰云 恁麽則未見先師意在로다 座云你不肯我耶아 裝香來하라 座乃焚香云 我若不會先師意면 香煙起處에 脫去不得이니라 及至香煙이 才起에 座便脫去하니 峰이 乃撫其背云 坐脫立亡은 則不無어니와 先師道理는 未夢見在로다하니

 


深耕淺種하고 貴買賤賣하니 有利無利不離行市로다

 

착어
這介公案이 極甚難會하니 自古拈弄이 數多나 得其正鵠者罕稀로다

 

고칙
天童 覺이 頌云 石霜一宗을 親傳九峰하니 香煙脫去하야도 正脉은 難通이니라 月巢鶴作千年夢이요 雪屋人迷一色空이라 十方을 坐斷하야도 猶點額이니 密移一步하야사 看飛龍이로다하니

 

착어
喝一喝云 這野狐精이여 漆桶不會하니 莫謗古人이어다

 

고칙
洞山云 秋初夏末에 兄弟가 或東去西去어든 直須向萬里無寸草處去하라 又云 只如萬里無寸草處에 作麽生去오 石霜이 出門便是草니라 山云 此是一千五百善知識語로다 且大唐國裏에 能有幾人고하니

 


朝三千暮八百이라 山門에 合掌하고 佛殿에 裝香이로다

 

착어
此是二大老의 向上牙爪니 若透徹無餘하면 便解得侍者首座의 閑葛藤이어니와 其或未然하면 又擧古人檢評하리라

 

고칙
華嚴 覺이 云 宗師行處는 如火燒氷하야 透過是非關하고 全機亡得喪이니라 盡道호대 首座는 滯在一色하고 侍者는 知見이 超師라하니 可謂體妙失宗이요 全迷向背로다 殊不知首座는 如鷺鶿立雪에 品類不齊요 侍者는 似鳳翥丹霄에 不縈金剛이로다 一人은 高高山頂立하고 一人은 深深海底行이니 各自隨方而來하야 同會九重宮闕이로다 而今에 識此二人麽아 竪起拂子云 龍臥碧潭에 風凜凜이요 垂下拂子云 鶴歸霄漢에 背磨天이라하니

 

착어
喝一喝云 邪法은 難扶로다

 

고칙
圓悟 頌云 死中得活人無數나 活中得死는 古來稀로다 只知枯木에 回春早하고 蹉過寒灰再焰時로다 虔侍者여 也是痴니 雖然會得先師意나 未免全身陷虎機로다하니

 

해설
不見가 萬松이 道호대 門庭施設은 不如九峰이나 入理深談은 猶較座元百步라하니

 

착어
喝一喝云 誣人之罪는 以罪加之로다
大衆아 恁麽則這一絡索公案이 畢竟落在甚處오(良久)

 

珊湖枕上兩行淚여 半是思君半恨君이로다

(卓柱杖一下하고 下座하시다)

 

1) 구봉 도건(九峰道虔 ; 당말 오대) : 석상 경제의 제자, 청원스님의 5세 손.
2) 석상 경제(石霜慶諸 ; 807~888) : 도오 원지(道悟圓智)의 제자, 청원스님의 4세 손
3) 일색변사(一色邊事) : 일색(一色)은 눈이 온 세계를 덮은 것같이 순일무잡(純一無雜), 절대의 뜻, 차별상대(差別相對)를 초월한 평등세계를 뜻한다.
4) 좌탈입망 : 앉아서 죽거나 선 채로 죽는 일.
5) 일색공(一色空) : 완전한 공에 빠져서 거기서 살아나지 못하는 것.
6) 선사(先師) : 석상스님의 스승 도오 원지를 지칭함.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성철스님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