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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큰스님 추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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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수  /  1998 년 9 월 [통권 제11호]  /     /  작성일20-07-13 12:44  /   조회14,91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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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석의 「그날의 화엄」에 관한 단상들  

김형수(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면서

 

기억난다. 간혹 백련암 풍경이 재현되기도 했다.

그 상황을 나는 이렇게 추측해 두고 있다. 때는 마땅히 5년 전이어야 옳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유난히 죽음이 흔했다. 횡사(橫死), 횡사! 언론은 연일 갑작스런 사고에 의한 참혹한 죽음들로 목청이 높았는데, 그 즈막엔 이미 모든 죽음이 전혀 ‘깊지 않은 강’이 되어 있었다. 방송매체를 통해 일상화되거나 영안실을 농성장으로 삼으면서 영결의 절박성을 잃어버린 저 초라한 육신의 소멸들. 이제 인간의 생멸(生滅)에 더는 신성함도 마력도 없어진 듯싶었는데, 이 비루한 시대가 어쩌다가 제대로 된 죽음(?)을 하나 만난다. 한 스님이 열반의 때를 알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준 뒤, 자신의 깨달음을 함축한 최후의 시를 남기는 것이다.

 

 

"가없는 저 허공은 가는 끝이 있을망정 크나큰 나의 원력 다함이 없아와서 기는 벌레 섯는 바위 함께 성불하여지이다."

 

 

고행으로 점철된 수도생활의 끝이었다. 당자는 ‘여로(旅路)의 변경’에 든 셈이었으나 보내는 이들은 그러지 못했으니 별리(別離)의 감정이 무딜 수 없었다. 옛 시의 여운이 당연히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헛되고 헛되도다! 오늘 아침 내가 보았던 그의 형체가 저녁에는 하늘에 떠도는 연기구름이 되었나니.”

 

화폭은 그 순간의 상황을 토막극처럼 요약하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두 여인은 산문(山門) 너머에서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내쳐온 신도임에 분명하다. 한 사람은 두 손을 모아 지극정성으로 왕생을 빌고, 한 사람은 그럴 겨를마저도 없이 그냥 선 채로 우는데, 슬픔을 누르느라 낯을 가린 손, 손가락 틈새로 드러나는 눈주름, 저 깊은 내면으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펌프질해 올라오는 속울음에 내맡겨져 흔들리는 몸채…….

 

그것이 아래층 입구에 걸려 있었다. 팜플렛 판매대 안쪽이어서 대개는 화랑 여직원의 머리에 얼마쯤 가려져 있기가 십상인 이 그림은 전시회에서의 기능은 장식에 불과했지만, 관람객의 태도를 일거에 바꿔 놓기가 일쑤였다. 그것을 기점으로 한 작품도 빠트리지 않고 연신 합장을 해대는 할머니에게 있어서 전시된 형상들은 그림이 아니라 부처요,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러나 법당 같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불자(佛者)들의 경배가 작품감상에 방해가 된다는 화랑가의 나그네도 있었고, 역으로 나그네들의 완물상지(玩物喪志, 물건을 즐기다가 뜻을 잃는)가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불심도 있었다. 이 독특한 전시회를 나는 도합 일곱 차례나 들러 원작과 대면했다.

 

화랑 입구에서 두 발짝을 떼면 ‘퇴옹당 성철’의 낙관이 찍힌 ‘佛’자, 사면을 빙 둘러서는 다시 스물 네 점의 장면화(場面畵, 화랑 측은 이를 밑그림이라고 했다). 관람객은 그곳을 거쳐 2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는데, 대작(?) 「그날의 화엄」은 바로 거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로 1.6미터 세로 3.65미터!

동산방 화랑의 2층 벽면에는 맞지 않는 크기였다. 1만2천의 군중을 내리닫이로 실사한 이 장쾌한 화폭은 삶의 공간에서는 키가 안 맞아 화랑 측에서 고안한 특수 받침틀에 의탁해서 45°각도로 경사진 바다처럼 비스듬히 파도치고 있었다. 위로부터 해인사 전경, 성철 스님의 위패를 든 운구행렬, 생전의 법어록을 망라한 만장의 글씨들, 연꽃처럼 타오르는 다비의 불꽃……. 침침한 실내에서 광도 1천5백 와트의 불빛을 받으며 그 나름의 규율과 질서를 가진 한 마리의 다족 생물처럼 엎드려 있는, 그건 흡사 반쯤 누운 미이라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 곁에서 재미있는 대화를 하나 엿들은 건 고의가 아니었다.

 

문; 이 사람들이 정말 1만2천 명이나 될까요?

답; 아닐 수도 있지. 1만2천이라는 숫자는 옛 사람들이 12진법을 쓸 때 사용한 최대 단위의 숫자거든. 더 이상 셀 수 없을 때 이 숫자를 썼어.

이 광경이 내게 일깨워 준 게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서로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졌을 때 겪게 되는 ‘다름’과 ‘충돌’에 관한 것인데,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하는 게 좋을 성싶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이것은 성철스님이 법랍 59년, 세수 82세만에 얻은 열반게송인데, 낱말 하나하나에 일체의 기만을 용납치 않으려는 칼날이 서 있다. 이 서슬 푸른 언도(言刀)가 오늘날 우리들이 항용 쓰는 말과 얼마만큼 다른가를 설명하기란 어렵지 않다. 지금은 이미 놀부의 시대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부모가 자식을 낳아 간절히 이르기를 착한 흥부가 되지 말고 능력 있는 놀부가 되라고 강조한다. 인간의 선함보다 경쟁력이 훨씬 중요해진 사회에서 일상인들의 언어가 정치인들의 것처럼 전략화 되었다손 놀랄 일은 아니다. 말도 어느덧 ‘장삿속’으로 하지 않으면 엄청난 손실을 입는 시대가 돼버린 것이다. 다음 촌극은 어쩌면 그래서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스님의 열반게송을 들은 어느 기독교 목자가 대중목회에서 말했더란다. “봐라, 그도 결국 자기의 거짓을 회개하고 떠나지 않느냐?”

 

 

그림 속의 인물 모습과 만장 글씨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는 관람자들

 

 

이는 얼핏 목전의 전도사업을 위해 찰나를 현혹해 가는 한 설교자의 조급성으로 쳐서 웃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 액면이 설교자의 진심이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기독교 문명이 이성 중심주의, 로고스주의를 발전시킨 것을 근거도 없이 나무라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들에게도 은유가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이성 너머의 것에 대한 추구가 없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성의 문화를 살았고 어필하는 정신을 높이 샀다. 잘못을 드러내어 실체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잘한 점을 앞세워 의견을 발설하는 문화가 그래서 형성된 것이다. 고로 그들에게 열반게송의 어법이 받아들여질 여지는 클 턱이 없다. 비평언어로 말해서 행간에서 번져나는 의중을 읽는 데 어두울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또한 그렇다고 해서 목자의 오해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성철스님의 열반게송을 시적 감흥으로 논한다면 목자에게는 진정성을 읽지 못한 오류가 있다. 문맥에 흐르는 건 회개의 감정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한 올까지 놓치지 않는 한 인간의 치열성이다. 시적 화자는 마음의 길을 닦고 닦아도, 또 깨우치고 깨우쳐도 그래도 아직 길이 먼, 머나먼 여로의 끝자리에 서 있다. 막상 이승을 떠나자니 저무는 삶이 너무도 통렬했을까? 의도한 건 아니련만 뼈아픈 자기 채찍을 남기다 보니 뒤따르는 도반들을 더욱 숨 막히는 구도의 길로 내몬 셈이 된다. 그 결과가 어찌되든 나 같은 독자야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눈부셔하며 목도하는 바, 어느 시인이 노래했던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와 같은, 저물면서 더욱 찬란한 노승의 황혼 풍경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적 칸막이에 막혀 차단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인식의 코드가 달라지면 이 열반게송은 얼마든지 음각이 양각으로 판독될 수 있다. 이 곡해를 굳이 막자면 시의 의미망을 재구성해서 문맥의 패턴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일생동안 기도하고 싸웠지만

아직도 중생제도의 길은 멀기만 하다

그렇다고 나에 대한 깨우침도 다 마치지 못했나니

천당이 멀어 마음이 무겁도다

이승을 넘어야 할 순간에도 넘지 못하고

빛을 잃은 해처럼 산언덕에 걸려 있구나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이는 이미 불교적 태도가 아닌 다른 것이 되고 만다. 여기에 두 세계의 ‘다름’이 있다. 이 ‘다름’에 의해서 빚어지는 오해와 각축, 나는 이를 문명의 충돌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본다. 이것은 문명과 문명의 격돌이요, 기독교적 세계관과 불교적 세계관의 혼선이며, 유럽적 어필과 아시아적 감춤의 일대 갈등이다. 한국은 이 갈등의 최전선이라 할 만큼 두 격돌이 혼융된 곳이다.

 

나는 이번 김호석의 작품도 얼마간 그런 혼선의 자리에 내던져졌다고 본다. 생각해 보자. 익명의 인격체에게 자꾸 악역을 맡겨서 안 됐지만, 만일 앞에서 언급한 목자가 와서 이 작품을 본다면 1만 명을 그려낸 재주가 아까워서 한심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우상을 숭배한 죄는 고사하고 우선 이야기 가닥이 잡히지 않기가 십상이니, 위에서 아래까지 시간의 순서가 뒤죽박죽인 것도 눈에 거슬릴 테고, 전통적인 구성전략을 ‘컨닝한 잘못’ 하며, 시작도 끝도, 입구도 출구도 없이 어디에나 무수히 존재하는 인파를 그냥 묘사한 자연주의적 한계도 지적될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악담은 허구가 아니다. 실제로, 이 화가는 아직 원근법에 대한 학습도 안 됐는가?라고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다. 그야말로 문명의 충돌이자 미적 가치관의 혼선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밝힌다. 여기에 나의 주제가 있다. 이 글의 초점은 그 ‘혼선의 해체’에 맞춰질 것이다.

 

2. 역사기록화에 대하여

 

먼저 묻자. 한 사람의 관람자가 전시회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은 입이 없으니, 얕은 뜻 그대로 말이 없다. 그러나 혹자는 스스로의 귀를 열어 말없는 화폭에서 화가의 고민과 도전과 모험의 외침을 듣는다. 세상 모두가 그런 주체적인 관람자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그것은 상호 교감이 가능한 언어의 습득을 전제로 한다. 화가와 관람자의 언어가 다르면 미학적 접속이 안 되어 깜깜하게 불통되는 수도 있다. 개개의 심미안이 문제되는 것은 이 때이다.

 

성급한 화가들은 그림을 그 자체로서만 보아줄 것을 원한다. 작품이 굳이 무슨 이론이나 주석(註釋) 따위를 달고 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원칙적으로는 맞지만 현실에는 안 맞는 말이다. 모든 학문적 탐색이 그렇듯이 예술작품의 감식에도 역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 달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사실’을 관찰하려면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어떤 안경, 즉 ‘가치를 읽어내는 틀’을 필요로 한다. 안경이 없는 심미안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밑그림 중에서

 

내가 보기에 「그날의 화엄」이야말로 안경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그림에 속한다. 관람자의 안경에 따라 주제파악이 되고 안 되는 점도 그렇지만, 화가 스스로 절반의 의도를 관람자의 안경을 교체시키려는 데 둔 것처럼 보이는 도전적 자세도 그렇다. 그 점은 더러 이 작품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김호석의 전시회는 매번 열반게송을 목자에게 읽히는 것 같은 불안을 준다. 오늘 내가 우회의 길을 택하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날의 화엄」을 논할 때 이 작품이 어떤 목적성을 띈 점은 먼저 감안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종종 한 편의 작품이면서도, 전시장에서 유통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소장되는 그런 류의 순수회화는 아닌 그림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겸재 정선이 부채에 금강산을 그릴 때는 선경의 시원함을 고려했을 테고, 단원 김홍도가 정조의 화성행렬을 그릴 때는 역사를 기록하는 의미를 감안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형상이 들어앉은 장소(부채나 역사 따위)에 의해 제약당하기도 하고 보조를 받기도 한다. 김호석의 「그날의 화엄」도 역사적 기록성과 종교적 경배성을 배려한 그림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소재 선택에서 이미 드러난 것이다.

 

화가가 성철스님의 다비식 장면을 포착했을 때는 그 의미를 전달하려는 의지가 무엇보다도 강했을 것이다. 이후에 얼마나 또 그런 이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수행의 길을 간, 우리가 알고 있는 교과서적인, 혹은 전통적인 의미의 구도자는 스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흔히들 말한다. 조계종 총무원장 선출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작금의 소요들은 그런 위엄 있는 선승(禪僧)의 부재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의 이름과 더불어 이야기되던 8년간의 장좌불와, 절을 찾는 이들에게 주문되었던 권력을 초월한 3천배 요구, 종정이 되어서도 산문을 벗어나지 않은 점, 극한까지 치달아간 수행, 끝없는 학습과 정진 등 성철스님이 우리 시대의 불교를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었던 모든 족적들이 열반과 함께 곧바로 신화의 길을 밟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 작품은 그의 열반 5주기를 앞두고 전시장에 걸렸다.

 

나는 그 점에 과히 불만이 없다. 세월은 역사를 무르익히기도 하지만 반대로 지워가기도 한다. 시간의 덧없는 흐름은 미개민족이나 사회가 체험한 중대한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도 하지만 저 어두운 기억 속의 일로 ‘과거화’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은 동일한 역사를 반복해서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기념비적인 사건이라도 영원히 ‘오늘의 공간’ 속에 묶어두지 못한다. 여기에 중요 사건에 대한 ‘예술적 기록’의 필요가 자리해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이 그런 ‘필요의 부응’을 저변에 깔고 있다는 것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미학적 성패 여부를 유보시킬 만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역사기록화가 굳이 미학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많다. 예술이 언제나 이미 떠내려간 체험을 되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로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말이 고해진 사물도 예술이 되면 미적 고찰의 대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전쟁을 위해 필요로 했던 옛 성터도 오늘날에는 심미적 대상이 되어 그 예술성을 평가받는다. 이 심미적 감동의 크기가 후세들의 보존욕 혹은 애정의 크기를 결정짓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마치 지금 우리가 고려 불화를 보존하는 까닭이 종교적 거룩함이 아니라 그 시대 미의식의 장엄함에 있는 것처럼! 이 말은 똑같이 다비식에도 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고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면 다비식 자체는 더 이상 역사적 기념이나 종교적 경배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 그때는 예술이라는 보호막이 훼손을 막아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역사기록화적 특성은 고려되어야 할 점이지만 예술성을 대치하지 아니한다. 사실 그 점에 대한 화가의 태도는 이미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단 한 점의 작품을 굳이 전시장으로 끄집어낸 것도 그렇고, 또 절반의 의도를 종교성에 두더라도 화가가 작품양식을 불화적인 형식이나 기법이 아닌 전통회화 양식을 선택한 것에서도 그것은 드러난다. 당연히 우리는 이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논란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정녕 어디서부터 가닥이 잡혀야 하나?

 

3. 한국화의 자질

 

일부의 화가들에게 있어서 그가 연이어 발표하는 작품들은 크게 보면 단 하나의 ‘사상’ 혹은 단 하나의 지점을 향하는 일련의 과정처럼 보인다. 김호석도 바로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데, 그의 작품들은 데뷔 이래 산업화된 사회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맛보게 되는 꿈과 상처와 분노로부터 출발하여 빼앗겼지만 아직 훼손되지 않고 있는 정신적 고향의 넉넉함을 찾아가는 궤적을 그린다. 그의 이러한 특성은 주제의식뿐만 아니라 미학적 형식에도 작동되어 선행작품과 후행작품 사이에 있는 행간은 매우 의미 있는 ‘한국미의 탐색’으로 채워져 있다. 인물화에서 배채법, 실경 회화에서 부감법 등 우리 민족과 100여 년 전에 결별했던 전통화론들이 20년 남짓한 그의 작품 연보 안에서 생환(生還)되고 있다는 것은 실로 경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태호 교수 등 주로 조선 후기의 미학을 천착해 온 분들이 그에게 애정을 보여온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 점 이번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 아니할 수 없다. 「그날의 화엄」은 장르의 성격상 역사기록화이자 종교화요 한국화이자 현대화(現代畵)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이 같은 성격의 그림을 그린 것은 처음이 아니다. 첫 번째는 「고부에서 백산까지」인데 갑오농민전쟁을 시간순으로 그린 서정적 그림이었다. 두 번째는 시위학생의 죽음을 그린 「역사의 행렬」도인데 ‘화성능행도’를 연상케 하는 갈之자 구도였고, 세 번째는 쌀수입개방 반대시위를 하는 농민들을 그린 「고부에서 서울까지」로서 갑오농민과 1990년대의 농민을 연결시켜 보는 수직대열의 구도였다. 그에게서 이렇게 전통형식에 대한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주목될 필요가 있다. 이번 작품이 네 번째고 보면 그가 이번에 시도한 거대 군중 묘사와 서사성의 획득은 그가 이제까지 탐구한 바를 결산하는, 그 나름대로 한국적 역사기록화가 갈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의 결정판이 되는 셈인지 모른다.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이 ‘단일 화면에 구성된 거대 군중의 서사화’를 그는 우리의 오랜 전통회화에서 사용되던 미학적 기제들을 응용함으로써 가능케 했다. 내 생각에는 서양미학에는 없는 세 가지쯤의 전통형식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 같다. 첫째, 전통 서사구조의 계승, 둘째 역원근법의 전개, 셋째, 부감법의 사용. 이 세 요소가 보여주는 한국적 질서와 규율이야말로 ‘유효한 전통’인지 ‘버려야 할 구습’인지를 갈파하는 시금석이요 또한 이 작품의 회화적 전략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나침반이다.

 

하나. 전통 서사구조의 계승

 

 「그날의 화엄」에서 첫눈에 도드라지는 것은 작품의 중앙을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종단해간 갈之자 구도이다. 이것이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화성능행도’에서 보여지는 구도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언젠가 김호석의 「역사의 행렬도」를 이야기하면서 단원 시대와 우리 시대의 대열을 비교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대열이 단일조직화된 융합집합이라면 우리 시대의 대열은 뿔뿔이 모여든 수열집합이다. 이 작품에서 김호석이 다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여지는 계단식 구성을 활용한 점은 바로 그 점을 위한 효율적 응용이 필요해서였던 것 같다.

  여기서 물어둘 것이 하나 있다. 이러한 옛 기제에 대한 활용을 어떻게 보아야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오늘날의 미의식을 크게 동양과 서양으로 대별한다면, 서양 미의식의 근저에 있는 것은 ‘어필’의 정신이다. 그들이 끝없이 ‘남이 해보지 않았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의 전략은 새로움에 있었다. 즉 기존에 없었던 것을 과연 창조했는가에 집착하며, 예술가의 미덕으로서 ‘참신성’을 우위에 두고자 했던 것은 그 어필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에 반해 동양에서는 ‘숙성’의 정신을 제일로 삼았다. 인간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은 내면의 숙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제나 ‘참신한가?’ 보다 ‘곰삭혔는가?’가 중요했다. 그것의 전략은 자연합일에 있으며 은일에 있다. 잘난 체 톡톡 불거지지 않는데 정작 안을 들여다보면 가득 차 있는 것을 추구하는 정신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선행 세대와 후행 세대의 관계, 혁신과 계승의 관계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서양의 미학이 끝없이 ‘탈주’를 감행해 왔다면 동양의 미학은 ‘계주’에 몰두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김호석의 전략은 말할 것도 없이 후자에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깜짝쇼’와 같은, 당장의 어떤 놀라운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예컨대 그의 공력이 집중되고 있는 곳은 ‘전혀 낯선 방식의 화면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 역원근법

 

 「그날의 화엄」에서 활용되고 있는 또 하나의 미학적 기제는 ‘역원근법’이다. 원근법이 화면으로부터 독자 쪽으로 확장되어 오면서 시각을 빨아들이는 역할을 한다면 역원근법은 축소되면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시선이 한 곳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는 그림들만 보아온, 즉 일제침략 이후의 교육제도에서 미술수업을 받은 이라면 누구나 이 그림이 상식에서 벗어나는 감을 주게 되어 있다. 한술 더 떠서, 이 그림은 관전자의 시선을 그냥(한 곳 소실점에서) 밀어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산시키면서 밀어낸다. 이 역시 서양미학의 안경을 무시한 처사인데, 그런 경향은 옛 선조들의 고민으로부터 시발되어 계속되는 우리 회화사의 흐름 속에서 면면히 형성돼 온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역원근법’은 이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반복 출현해 왔다.

 

고구려시대의 고분벽화 중 ‘미천왕릉’은 푸줏간 풍경을 담고 있다. 푸줏간 및 떡시루가 있는 부엌풍경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후미를 넓어지게(좁아지게가 아니라) 그리고 있다. 단원 김홍도의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역시 ‘역원근법’을 보인다. 중국 송의 왕진경이 서원에서 선비․도사․스님 등과 더불어 아회(雅會)를 갖는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그린 ‘고사인물’인데, 화면 한 켠의 기와지붕 옆 담이 갈수록 조금씩 넓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옛 그림에서 궁궐을 그렸던 그림들은 전부 역원근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미적 균형을 깨뜨리고 있다는 지적은 아직 없다.

 

이런 경우 그림의 ‘깊이감’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논의를 필요로 하게 된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원근법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등 그래야 할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0세기까지의 ‘과학의 눈’이 포착한 세계와 인간에게 체험된 세계가 동일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근대를 지배했던 소실점 작도법이라는 원근법적 회화관은 ‘예술에 잠입해온 과학의 침투’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예술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은 현실에서 얼마든지 찾아질 수 있다. 실제로 탁구 중계를 할 때 TV카메라가 45°각도에서 포착하면 뒤가 넓어 보이는 현상이 일어난다. 물론 사진으로 찍어서 인화해 보면 앞이 더 넓다. 따라서 이는 일종의 착시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는, 이 착시현상이 같은 상황에서는 일관되게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과학이 원근법을 증거시키고 있는 동안에도 사람의 ‘눈’은 오랫동안 ‘역원근법’을 버리지 못해 왔다. 그것을 버린 것은 근대의 미의식이요, 그 속에서 살았던 화가들의 심미적 인습이다.

 

김호석이 역원근법을 선택한 1차적인 원인은 대열의 진면목을 시선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보여주자는 데 있는 것 같다. 왜? 그것은 뒤에 가서 작품의 주제와 더불어서 이야기할 사안이지만, 여기서는 일단 그것이 한 화면에 들어설 수 있는 인파의 숫자를 대량으로 늘려놓는 역할을 했다고 해둘 수 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덤비자면 「그날의 화엄」의 경우 그보다 더욱 중요한 원인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그가 화면을 중심으로 사고한 게 아니라 수용자의 눈을 중심으로 사고했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주목을 요하는 문제이다. 원근법적 사고에 의존했을 경우와 저항했을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화면의 내재적 통일감(추구)’과 ‘일시적 결합력과 조화(추구)’의 차이에 불과하지만 물 밑에 있는 것은 작품을 끝없이 대상화해서 사고하기 때문에 반드시 작품 스스로의 중심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경우와 작품을 어디엔가 실재하는 세계로 사고하기 때문에 체험되는 것만을 수용하려는 예술관의 차이이다. 이 양대 미학의 모순은 어떻게 정리되어야 옳은가? 나는 이것을 매개 민족이나 집단에게 고유한 미적 인습의 문제로 본다. 전자의 성과를 우리는 세뇌될 만큼 배워왔거니와 후자의 예술관이 서양의 근대미학을 경탄시킨 예 역시 우리에게는 있다. 바로 석굴암 같은 것들이다. 석굴암은 눕혀 두면 가분수이지만 세워 두면 정상이 된다. ‘그날의 화엄’도 앉은 자세의 눈높이를 기준으로 하여 위로 갈수록 조금씩 커져 마침내 모든 작중인물의 크기가 수용자의 눈높이에서 통일이 되게 되어 있다.

 

셋. 솔개의 눈

 

그러나 ‘거대 군중의 서사화’가 이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했다고 볼 수 없다. 사실 이 같은 ‘군중의 운집’을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 장편만화나 서구의 ‘퍼즐그림’은 많은 사례를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들의 원근법 문제만 거꾸로 돌려놓으면 같아지는 셈인가? 아니다. 여기에는 어린이들이 즐기는 ‘월리를 찾아라’ 식의 퍼즐 그림과 전혀 다르게 만들어 놓는 회화적 요소가 있다. 그것은 부감법이다.

 

부감법은 어쩌면 한국적 인식구조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인지 모른다. 예를 들어 유럽인이 서울에 왔을 때 곧바로 들이닥칠 곳은 인사동이다. 그들은 가장 한국적인 장소를 먼저 찾으며, 그로부터 서울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골에서만 살았던 할아버지를 서울에 데리고 오면 사정이 다르다. 유럽인의 방식대로 하자면 시골에 대비한 서울의 정체성이 가장 잘 살아나는 명동을 선택해야 하겠지만 그럴 경우 시골 할아버지는 반드시 헤매게 되어 있다. 왜? 인식구조의 차이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남산’으로 안내해야 된다. 그곳에서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부감을 시켜준 다음이라면 이제 골목골목을 끌고 다녀도 상관이 없다. 할아버지는 내내 남산에서 내려다보았던 기억을 기초로 해서 서울을 보게 될 테니까.

 

이런 특성을 혹자는 산업사회적 인식구조와 농경문화적 인식구조의 차이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아니다. 사막지대나 혹은 베트남의 몇몇 도시들처럼 평지만 있는 고장에서 자라난 사람에게는 ‘부감’이 세계인식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부감법이 고개문화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것은 ‘아리랑’처럼 조선에서의 삶에 조응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처음 발견하는 자리는 대개가 고장을 빠져나가면서 넘는 고갯마루에서이다. 세계를 발견하는 ‘인식의 경이(驚異)’가 언제나 고갯마루에서 경험되는 것을 반복 체험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이는 인식의 지층이 되어 있다.

 

이 부감법은 「그날의 화엄」이 서사적인 구도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그 역시 우리 전통회화에서 배워 온 것인데, 화가는 이 그림에서 그냥 부감하지 않고 이동해 다니면서 부감한다. 그것을 혹자는 ‘헬리곱터에서 그린 것처럼’이라고 말하고, 혹자는 ‘새가 날아다니면서 내려다본 것 같은 조감도식’이라고 쓰며, 이번 전시회를 소개하는 신문기사들은 ‘솔개기법’(아마도 이것은 화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만약 이것이 개념화된다면 나는 ‘솔개기법’이 옳다고 본다. 헬리곱터가 이동하면서, 혹은 새가 날아가면서 스치듯이 내려다보는 것과 솔개가 내려다보는 것은 서로 다르다. 솔개는 이동해 다니기 위해서 나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난다. 솔개는 매우 천천히 그러나 샅샅이(벼낱가리 아래 종종거리고 있는 병아리를 찾아내듯이) 낚아채기 위해서 난다. 세계와의 대결자세인 것이다. 그 동작은 단순히 대지와 평행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하면서 유지되는 정면’의 상태인데 이 그림이 바로 그렇다. 고정된 시점이 화면을 통일시키고 있는 게 아니라 솔개의 눈이 이동해 가면서 가능한 많은 장면들을 보여주기 위해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 것이다.

 

4. 눈에 보이는 이야기와 숨은 이야기

 

이제 작품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자, 여기 솔개가 한 마리 떠간다. 솔개의 눈높이는 당일 취재를 나온 헬리곱터보다 약간 상단의 어디이어야 옳다. 그것은 해인사가 내려다보이는 높이에서〔深遠〕, 또 가야산 봉우리가 올려다보이는 높이에서〔高遠〕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추출된 사실이다. 그리고 대열은 전체적으로 내려다보이는 위치인데, 그 내려다본 곳이 바로 이 그림의 시점(視點)이다. 솔개가 한 곳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혼란스러울 필요는 없다. 수용자는 솔개의 눈을 따라 작품의 세부(細部)도 역시 이동해 다니면서 감상하면 된다.

 

관람자가 만일 시선을 옮겨가는 경로를 좌에서 우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잡는다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해인사 전경이다. 진경산수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해인사 전경은 그러나 다비식 취재를 나온 최신형 헬리곱터와 해인사에서 백련암에 이르는 소로를 따라 성철스님이 걷는 것을 담고 있다. 아래 그림이 없다면 이것은 모순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성철스님과 성철스님의 다비식을 취재하는 헬리곱터가 같은 시공을 차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히 이야기는 아래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나서 화폭은 과감히 칼질을 하듯 잘려있다. 생략되거나 점점 약해져서 여운을 두고 희미한 것이 아니라 싹둑 잘려있는 것이다. 흡사 칼질이 된 것 같은 이 단절은 여러 가지 해석을 유도한다. 쉽게 연상되는 것은 지평선의 개념이다. 수평선이나 지평선은 지구의 둥근 모양에 의해서 육안으로 보면 언제나 (생략되는 게 아니라) 잘려서 존재한다. 예컨대 먼 바다에서 배가 들어올 때 돛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는 지구가 평평하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도 화가가 요구하는 눈높이(다비의 불꽃)에서 대열이 끊겨 있는 셈이다. 이 점이 전체 작품에서 순기능을 하는지 역기능을 하는지는 아직 말할 계제가 아니다.

 

하여튼 작품의 본체라 할 수 있는 대열 속에서 포인트라 할 만한 곳은 붉은 빛을 띠고 있다. 다비의 불꽃과 대열의 만장, 날름거리는 불꽃의 빛과 만장 선두의 붉은 빛이 그림을 하나의 생물로 보아 곧 두 개의 눈동자일 것이다. 이 작품의 표정이 거기에 드러나 있다. 머리와 꼬리는 없다고 봐도 좋다. 왜냐하면 대열의 시작과 끝이 맞물려 순환구조를 하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하면 대열은 사실 눈높이 우측에서 시작해서 좌측에서 끝난다. 불교 제의에서 다비식 행렬은 맨 앞에 인로왕번(그림에서는 붉은 바탕에 검정 띠의 음각 글씨가 있는 기)이 서고, 다음이 명정, 그리고 동방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서방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 등의 오방번이 따른다. 그 뒤를 태극기와 불교기가 잇고, 연이어 만장행렬, 영정, 위패, 운구의 순으로 이 대열은 늘어서 있다. 그리고 행렬이 끝나면 이제 다비식인데, 그림의 좌측 불꽃은 다비가 진행된 10시간째의 상태이다. 흐트러져 있는 그 주변의 만장들은, 이 화폭에서 유일하게 반복 출현한 사물들로써 만장대열이 대오를 흐트러뜨린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 산만한 대오가 하나의 질서를 형성하게 만든 힘은 따로 있다.

 

태풍에 눈이 있듯이 만일 이 작품에 핵이 있다면 그것은 연꽃처럼 아름다운 산화를 열 시간째 지속하고 있는 이 불꽃이다. 이것이 화면 안에서 가장 강렬한 채색을 하고 있으면서 1만2천 개의 동작들을 휘어잡아 성철 입적이라는 파문과 자장 안으로 흡수해 들이고 있다. 따라서 이 안에 있는 어떤 동작도 궁극적으로는 다 여기에 복속된다.

 

그렇게 보면 인파들은 분명히 하나의 집단이다. 좌측 하단에 짜 끼운 흔적이 있는데, 그에 대해서 화가는 동일 인물이 두 번 반복해서 등장했기 때문에 고쳤다고 고백한다. 따라서 4만~5만 명 중에서 그의 화폭이 감싸 안을 수 있는 인물 1만 2천 명, 이는 한 대열이면서 또한 30시간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 속의 사람들이기도 하다. 당일 참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구술하는 바, 우측 상단의 엎드린 모습은 다비식 전날 밤 해인사 마당에서 있었던 3천 배의 장면이고, 잘린 부위에서부터 갈之자를 그리고 있는 만장까지의 대열은 운구행렬을, 그리고 하단부는 다비식이 시작된 10시간 후의 풍경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 그림이 얻어낸 절묘한 ‘비(非)동시적 동시성’을 보게 된다. 그는 마술처럼 한 대열을 그리면서 그 대열 안에서 30시간이 경과해 가는 과정을 함께 그린 것이다. 여기에 이 서사구조의 생명이 있다.

 

이 굵직한 서사구조는 그러나 그림의 뼈대로만 작용하고 있을 뿐 살은 숱한 에피소드들로 채우고 있다. 거기에서도 이른바 우리 고유의 형식미는 다시 살아난다.

우리 고유의 형식적 특징으로서의 대비와 대조는 이 서사적 전개에 시종 날줄로 엮여진다. 문장에서도 조선투는 그랬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길은 멀고 해는 짧다.” ‘날자’ ‘떨어지’고, ‘멀’면 ‘짧’은 것을 들이대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은 한 화폭에서 인물의 대열을 우에서 좌로, 좌에서 우로, 또 하에서 상으로, 상에서 하로 움직이게 함으로써 그 움직임에 따라 겹겹이 인물의 앞 얼굴을 보이기도 하고 뒷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역시 ‘비동시적인 것’들을 ‘동시화(化)’시킨 흔적이다. 그런 작가의 의도는 곳곳에 숨겨져 있다. 우측 상단 바위에 한 스님은 바위 위로 올라가고 있고, 한 스님은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 바위를 삶 혹은 세월로 보면 매 순간 지나쳐야 하는 생과 사의 대비가 된다. 대열은 온통 종교적 의식 제례에 몰두해 있지만 작가의 눈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한눈을 팔고 있다. 예컨대 하단 비구니의 대열에 바람난 듯이 방정맞은 동작을 한 개 한 마리가 간섭해 들어가는데, 포즈인 즉 코를 끌며 뭔가를 찾아내려고 냄새를 맡는 형국이다. 도대체 개가 비구니의 대열에 그런 동작으로 따라붙어 코를 끌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구태여 해석한다면 그날 비구니 스님 중 생리 중인 이가 있어 개는 그 냄새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성(聖)과 속(俗)의 대비이다.

 

이렇게 죽은 자 산 자, 오줌 싸는 사람 뛰는 사람, 엎드린 자 일어선 자, 우는 자 웃는 자, 행사에 임하는 자 취재하는 자가 한데 어울려 평면 화폭 안에서 대열은 뱅뱅 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삶의 동작들이 성철스님의 다비라고 하는 하나의 불길 아래 화음을 맞추고 있다는 데 묘미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화엄’이 아닐 수 없다.

 

김호석은 그 ‘화엄’의 구석구석에 우리 시대와 통하는 ‘연상’의 통로들을 무수히 많이 숨겨 놓았다. 그 통로들은 끔찍하리만치 정교하고 복합적이다. 맨 아래켠 신발을 벗어놓고 이제 막 큰절을 시작하려는 아낙네나 그 곁에 이미 머리를 조아린 여인은 현대 한국인들의 무의식의 지층을 드러내는 표지들이다. 옆에서는 좌판이 벌어져 있고, 컵라면을 먹는 순간에도 ‘이 시대의 부처’가 화염 속에서 다 사그러져 버리기 전에 지복(至福)을 빌어보는, 그 내면이 기복으로 얼룩진 한국현대사의 민초들인 것이다.

 

이렇게 행사 주체로서 참여된 스님들의 대열은 30시간의 진행시간을 반영하는 서사적 씨줄로써, 또 구경나온 인파는 그 뼈대에 살을 붙이며 당일의 분위기와 시대상을 반영하는 날줄로써 기능하면서, 관람자에게는 성철 다비식의 전모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는 역사기록화로서의 충실성을 이 그림은 일차적으로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이형사신(以形寫神, 겉을 그려서 정신을 표현한다)’의 미학을 추구하는 한국화가가 아무 생각 없이 겉모양만을 그렸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화가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비평가들에게는 없는) 이성적 고려와 회화적 감수성의 불일치, 생각과 표현의 불일치에서 오는 스트레스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 전체의 구도를 어떻게 하고, 배치와 디테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이를테면 작품에서 드러난 모든 형상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말씀’은 있는 법이다. 이를 굳이 주제라고 해도 좋다. 리얼리스트일수록 때로는 주제의식을 속보일 만큼 많이 드러내어 ‘계몽주의’의 혐의를 받기가 십상인데, 그렇다면 이 작품에 감춰져 있는 그런 ‘말씀’은 무엇일까? 단지 많은 수의 사람을 그리겠다는 것이 화가의 미적 전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스님의 열반을 화가가 어떻게 이해하고 또 표현하고자 했는지를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주는 것은 연꽃 모양을 한 다비의 불꽃이다. 이 불꽃 속에서 성철이라고 하는 ‘지고의 선승’ 하나가 적멸에 들고 있다. 불꽃은 바로 그 법체가 타오르면서 내뿜는 연기요 빛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없어졌는가? 그런데 상단에 보면 해인사 전경이 있고, 그 우측 상단으로 평소에 성철스님이 수행하던 암자 백련암이 있다. 해인사에서 백련암에 이르는 길가에 스님은 걸어가고 있다.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감쪽같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장난기라면 장난기가 보이기조차 하는 광경이다. 바로 이것이다. 화가는 한 개의 죽음과 1만 개의 삶의 장면을 그렸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살아서도 결국은 이 죽음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1만 개의 죽음과 죽어서도 자유로운 한 개의 영원한 삶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5. 얻은 것과 잃은 것

 

이 큰 작품을 한마디로 정리하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나는 우선 이 작품에서 몇 가지의 압권과 아쉬움이 크게 교차하는 느낌이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박지원의 산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인의 고개 숙인 모습에서 그녀가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보고, 턱을 괸 모습에서 그녀가 원망하고 있음을 보고, 혼자 서 있는 모습에서 그녀가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고, 눈썹을 찡그린 모습에서 그녀가 수심에 차 있음을 보고,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파초 잎사귀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박지원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18쪽

 

인간의 동작을 읽는 내면의 통찰이야말로 김호석에게서 정말 유감없이 드러나는 요소이다. 멀리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사람이 손가락을 가리키게 하여 말하는 자임을 느끼게 하고, 맞은 편 사람이 팔짱을 끼게 하여 듣는 사람임을 알게 함(박지원)으로써 대화를 표현하는 것, 이 점에 대해 김호석은 가히 대가(大家)라 부름직하다. 그리하여 장면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레이션이 깔리고 대사가 드리워져 있는, 그래서 이야기거리가 한 보따리씩은 되는…… 이 치밀한 디테일의 힘은 관전자를 압도한다.

 

사실 이 작품이 확보하고 있는 표정이며 얼굴, 동작이면 어떤 장편만화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장면 연출은 김호석의 예민한 시대감각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인물화가로서의 장인적 솜씨와 비범한 회화적 기량에 의해 놀라운 설득력을 얻는다. 흔히 볼 수 있는 헬리곱터와 수많은 카메라, 떡 장사, 사진 찍는 여자의 복장, 여대생이 등에 맨 쌕, 신발 따위 등 작중 인물들에 부착된 일상문화 속의 모든 시각적 기호들이 김호석에게는 하찮은 요소가 아니다. 그는 이 기호들을 끄집어들여 자기시대의 삶의 양상들을 조직해 낸다. 그것은 ‘1993년’이라고 하는 한 시대의 분위기의 드러냄이자 그 시대의 분위기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이어서 나는 또 하나의 압권을 다비식의 화염에서도 본다. 붉은 불기둥 주변으로 공기의 입자가 산화되면서 발생된 아지랑이 층이 형성되어 있다. 그 아지랑이에 의해 주변의 일부는 희미해지고 굴절되어 있다. 특히 불꽃의 중앙에서 태극기에 이르는 부위의 인파는 형체 자체가 지우개로 뭉개진 것처럼 되어 있다. 과연 이것을 포착할 수 있는 사진기술이 있는지 모르겠다. 현기증이 인다.

아마도 이 같은 천착 역시 동양화론에서 습득된 것일 것이다. 중국 <회남자>에 나온다는 말이 이렇다.

 

“밝은 달빛은 멀리 바라볼 수는 있어도 잔 글씨를 쓸 수 없으며, 안개 자욱한 아침은 잔 글씨를 쓸 수는 있어도 멀리 바라볼 수 없다.”

 

화가가 머리카락 하나에 신경 쓰다가 오히려 참모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근모실모론’(槿毛失貌論)을 전하기 위한 이 문구에서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놀라는 것은 시계(視界)에 민감했던 옛사람들의 감각이다. 광도(光度)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과 보여지지 않는 것을 식별하고 이용하는 기술은 서구의 근대적 이성에서 도드라지게 융성했지만, 시계(視界)에서 체험되는 것과 체험되지 않는 것을 감응하는 역량은 동양의 형상적 감성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세계와 접촉하는 감응력은, 칠흑 같은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공포의 감정 따위 등 몇몇 원초적 체험과 함께 서구의 근대 이성이 오늘날 상실해 버린 것의 하나이다.

 

그로 인해 가능해진 또 하나의 압권이 있다. ‘날씨’를 제대로 그려낸 점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인왕산을 그린 풍경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비가 갠 직후의 앞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일기를 예측했다)을 그렸다고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다시 작품 속으로 돌아오자면, 그날 날씨가 궂었다. 그 점은 「그날의 화엄」에서 배경음악처럼 시종 흐르고 있다. 무슨 일인가가 이미 엎질러진 상태에 들어 있는 것처럼 수많은 인파와 동작들이 온통 자성(自省)의 분위기에 잠겨 있다. 화가는 이를 위해 재료를 300년 묵은 먹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무리 고급 먹이라도 아교에 있는 윤기가 번들거려 옛 사람들이 쓰던 관솔을 태워 만든 소나무 먹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서사적 구도의 순환성이다. 언젠가 조세희의 소설에서도 이야기된 바 있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 날의 화엄」에서 잘린 부분의 상단을 그림의 지붕 혹은 하늘로 쳐두고, 남은 화면을 오그려 잘린 부분을 맨 아랫 부분에 잇는다면 이 그림의 스토리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순환구조를 갖게 된다. 평면 회화 안에서 그러나 스토리를 구성하는 대열은 돌고 또 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적 형식인지 아니면 대열의 양적 확산을 전취하려는 의도인지 모르지만 이런 감쪽같은 구성이야말로 우주체험을 해가는 시대가 요구하는 정서적 파노라마를 감당할 수 있는, 수묵의 영토확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또한 이 작품에서 김호석의 그림에서 예전에 띄지 않던(같은 전시장에 있는 장면화들에게서도 띄지 않던) 허술함도 함께 본다.

  우선 한 화면에서 미적 균형이 깨어진 대목이 있었다. 우측 상단의 3천배 주변은 좌측 하단에 비추어 너무 널널하다. 이 부분이 전체의 균형을 깨뜨린다. 또 그 뒤켠의 짐을 가득 실은 화물차가 우회전을 했을 때 내용물이 좌측으로 쏠리는 것처럼 이 그림은 좌측으로 쏠려 있다. 원인에 대한 추측 하나는 창작 기간이 4년이었다니 후반에 긴장이 해이되거나 시간에 쫓겼으리라는 점이다. 긴 글을 쓸 때 가끔 긴장이 와해 되는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규모를 감당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단일작품으로 4년이라는 기간을 견디기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또 하나 이 작품은 자연환경이 빈곤하다. 크고 장엄한 행사를 좁은 화폭에 담다 보니 대담한 축도법이 불가피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아쉬움이다. 마치 운동장처럼 요철이 없는 공간에서 있었던 행사 같은 느낌도 들고, 역동성도 죽는다. 만일 자연환경만을 따로 떼어 잘린 부분 위켠으로 독립시키고자 했다면 이는 산수화와 역사기록화가 병렬적으로 합해지는 형국이 되는데, 글쎄? 만장대열의 좌측에서 자연이 등장하는 것처럼 바위 아랫켠으로 숲을 가득 채웠다면(그게 오히려 미적 균형을 흐트러 놓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그래서 그림이 되는 건지 모르는 자신 없는 견해이기는 하지만) 보다 꽉 찬 느낌이 들었을지 모른다.

 

또 하나, 규모에 대한 불만도 가져볼 수 있다. 육안으로 감상하기에는 부적절한 크기가 아닐까 싶게 멀면 안 보이고 가까우면 화면이 망막을 넘쳐 현기증을 일으키는……. 그랬다. 나는 앞에서 전시장 풍경을 스케치하면서 이 그림이 ‘경사진 파도’처럼 반쯤 누워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전시장에서 본 모습이 전신(全身)은 전신이되 물결처럼 구겨진 전신이어서 마치 의자에 앉은 사람을 대면하는 격이었다. 그럴 경우 막상 일어섰을 때 허리나 다리가 길어서 인상이 달라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고 벽면을 탓하거나 아니면 벽면에 맞지 않음을 탓하자는 것은 아니다. 규모를 회의해보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전시형식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내용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채워 넣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나는 일말의 과욕의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솔개기법’이 화면의 내적 구심점이 없이도 수용자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솔개처럼 이동해 다니면서 정면을 응시하는 대결의 긴장에 있을 것이다. 이 긴장감의 결여를 나는 지적하고 싶다.

 

6. 전시장을 나서며

 

이제 전시회에 대한 총괄적인 소견을 피력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김호석은 이 작품 「그날의 화엄」에서 한 개의 죽음과 1만 개의 삶을 그려 1만 개의 죽음과 한 개의 삶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거대 군중의 서사적 묘사를 시도했으며, 또한 그를 위해 전통 회화의 미학적 기제들을 현대적으로 응용하는 형식실험을 해낸다. 그것은 이 작품을 한 점의 역사기록화이자 종교화로서, 또 한국화이자 현대화로서의 정체성을 유감없이 얻게 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보여진다. 그것의 의미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초기에 모더니즘으로부터 출발하여 「거스를 수 없는 삶의 이름」(1993년, 샘터 화랑),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1996년, 동산방), 「함께 가는 길」(1998년, 동산방) 등을 거치면서 해방 후 이제까지 심각한 도전 없이 항해해 온 기존 화단의 흐름에 강력한 저항의 길을 만들어 낸다. 돌이켜보면 그 과정은 우리 미학이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하려는 하나의 투쟁처럼 보인다. 그것은 주로 두 방향의 안일과 나태에 찬물을 끼얹는 도전욕을 드러내는 양상이었는데, 하나는 서구적 미의식의 전횡에 맞서서이고, 다른 하나는 끝없는 복고의 늪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전통’이라는 이름의 현실도피에 대해서이다. 여기서 그가 한국화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투해 왔다는 것은 이번 전시회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아니 이번 작품이야말로 성취의 최대치를 그곳에 두고자 했다는 게 더 맞을지 모른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순진하게 받아들여도 좋을 만한 투명한 의미에서의 한국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남아버린 동양화의 흔적과 재료를 빼놓고는 서양화가 되어버린 ‘입양 예술’들 즉 각국의 정치․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정서에 물든 다양한 빛깔의 한국화일 뿐이다. 그것들은 복수(複數)로 존재하면서 상호 간에 그 어떤 아이덴티티에 의한 공통점도 없다. 단지 회화에 동원된 재료를 변별점으로 삼는다면 그건 지나친 형식논리가 될 것이다. 서양화가 언제 재료를 가려본 적이 있는가? 서양화가 수묵을 동원하면 그것은 빌려 쓴 것인가 그냥 쓴 것인가? 따라서 우리가 지금 유통되고 있는 한국화들을 단일한 ‘양식’인 양 승인하고 그 이면에 담긴 이념적 함의를 찾지 못했을 때 한국화는 더 이상의 ‘자생력’을 갖기는 어렵다. 한국화가들이 이미 ‘화론’이 없는 그림을 그리는 상태가 돼버리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한국화는 서양화 혹은 ‘한국화 아닌 것’과의 변별력을 어디에서 얻어야 하는가?

 

바로 이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김호석을 미술사적 선상에서 주목해야 된다면 그의 이름이 필요해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일 것이다. 그간 나는 그가 펼치는 일련의 작업들에서 실로 ‘퇴화된 신체기관’처럼 지금은 사라진 저 조선 후기의 화론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아왔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그가 보여주는 한국화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서 나는 한껏 고무된다. 그에게 있어서 조선후기 회화의 전통은 ‘받아들여야 할 모범이자, 또 벗어나야 할 형식적 제약으로서 지속적인 힘을 발휘하는 그 무엇’이 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전폭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로 들자면 이는 우리에게 식민지체험이 시작된 이래 1백년 만에 한국화가 자기 근거지를 확보하는 사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정작 규모에 압도당하는 만큼의 감동은 주지 못하고 있다. 기세가 눅어져 있는 것도 같고, 예전의 서릿발 같은 기상이 가라앉은 자리에 세련미가 가미되면서 뭔가 솟구쳐오르는 힘이 쇠진되는 느낌도 감돈다. 그래서 만일 이 작품이 규모에 어울리는 만큼의 내실은 채워내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이번에는 결국 ‘도전에서 실패’했다고 평하는 셈이 되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이 전시회가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도전과 모험’의 의미를 다 살리는 어떤 만족할 만한 성취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소재와 대상에 대해서는 충실했지만 예술적 내면이 전달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편집자의 말

김호석 화백의 「그날의 화엄」전은 성철 큰스님의 열반 5주기를 즈음하여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동산방화랑에서 10월 14일부터 시작하여 예정했던 기간에서 4일을 연장하여 28일까지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았고, 5년 전 연화대에서 큰스님의 다비식을 지켜보았던 보살님들은 끝내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습니다. 전시 기간 내내 전시장을 지키며 관람하러 오신 분들에게 아낌없는 설명을해 주신 박홍우 사장님, 원당스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그림을 통해 다시 한번 큰스님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신 김호석 화백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혹여 시간이 없어서, 지방에 계시는 관계로 전시장을 찾지 못해 아쉬움이 크신 고경 독자분께서는 본 사무실로 연락을 주시거나 백련암에 가시면 포스터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가격은 1장 당 2,000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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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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