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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및 특별기고]
불교를 기반으로 과학과 철학을 아우른 김용정의 학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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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  2024 년 11 월 [통권 제139호]  /     /  작성일24-11-04 21:27  /   조회16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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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택_ 제주대 철학과 교수

 

지해智海 김용정(1930~2019) 선생이 남긴 말씀과 글을 정리하고 다듬어 장경각에서 『불교, 과학과 철학을 만나다』를 펴냈다. 지해 선생은 동국대 철학과에 26년간(1970~1996) 재직하면서 많은 논저를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불교 강의를 많이 했고, 신문과 잡지에도 불교, 철학, 과학과 관련해서 적지 않은 글을 남겼다. 

 

우리나라의 과학철학을 개척한 철학자

 

선생의 학문적 관심 분야는 참으로 광범했다. 그래서 그의 학문 영역은 고대 그리스철학, 인도철학, 중국철학에서부터 서양 근세철학뿐만 아니라 현상학, 실존철학, 심리철학, 언어철학, 과학철학, 기호논리학 등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철학들을 망라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고전음악에 대한 식견이 전문가 수준이어서 쉬는 시간에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을 즐겨 듣곤 했다. 

 

지해 선생은 1930년 황해도 해주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사서四書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동양사상을 익히고, 청소년기에는 일본에서 물리학을 배워 온 집안 어른이 들려주는 현대과학 이야기에 심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할 시기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학업을 미루고 전쟁에 참전해야 했다. 그는 1955년에야 동국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철학과 불교를 습득하고 1959년 졸업한 후 물리학과에 편입하여 현대물리학을 배웠다. 그는 동국대 대학원 철학과에 진학하여 「칸트의 공간·시간론」으로 1963년 석사학위를, 「칸트에 있어서의 자연과 자유에 관한 연구-과학철학과 연관하여」로 1976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우리나라 1세대 과학철학자이다.

 

사진 1. 김용정 교수의 강의와 글을 묶은 책 『불교, 과학과 철학을 만나다』(장경각 2024년 10월 초판 발행).

 

지해 선생은 1960년대에는 동국대, 서강대, 인하대 등에서 시간강사를 하면서 숙명여고에서 윤리와 독일어를 가르쳤고, 1970년 동국대 철학과 전임교수가 된 다음에도 대학생을 대상으로 독서 모임을 가지며 동·서양 고전과 불교 경전을 강의하면서 철학과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그는 학문의 절정기인 1980년 9월부터 1년간 연구년을 얻어서 미국 뉴욕주립대 종교학과와 컬럼비아대 철학과에서 연구하면서 뉴욕 교포를 대상으로 불교강좌를 열었고, 서독 마인츠 세계칸트철학대회에 참가하여 세계의 칸트 연구자들과 교류하였다.

 

그는 동국대에서 40여 년간 배우고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교양과정부장, 문과대학장, 기획실장, 교육대학원장, 부총장 등을 역임했고, 학내 구성원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서 학교가 어려운 시기에 초대 교수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철학계로부터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서 한국철학회장과 한국주역학회장을 역임하였고, 정년퇴직 후에는 한국선문화학회장과 한국불교발전연구원장을 맡아서 우리나라 불교발전에 기여했으며, (주)범양사에서 발행하던 계간 『과학사상』 편집인을 10년 동안 맡으면서 서양 과학기술문명과 동서양 철학사상을 접목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불교의 화엄사상과 과학을 통해 철학의 한계 극복 시도

 

지해 선생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70년대부터 불교의 세계관과 현대과학의 사고체계가 유사하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일생 동안 불교의 중도中道, 공空, 연기緣起, 화엄사상華嚴思想 등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닐스 보어의 상보성이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 겔만의 팔정도설, 강입자 상호작용과 같은 현대물리학의 이론들뿐만 아니라 생명과학과 정보과학의 성과들을 명료하게 풀어헤쳤다. 그는 현대과학과 철학을 빌려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없는 진리이자 지혜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고, 정보과학기술이 발전하여 가상현실과 인공지능이 일상화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욱 공감과 설득력을 얻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사진 2. 계간 『과학사상』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던 60대 후반의 고 김용정(1930~2019) 교수.

 

지해 선생은 눈 푸른 학자 시절에 자연의 인과법칙과 인간의 무한한 자유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를 치열하게 탐구하였다. 서양철학에서 칸트(I. Kant)는 그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계곡에 다리를 건설하려 하였다. 하지만 칸트 이후에 비유클리드기하학,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소립자물리학이 등장하면서 칸트의 인식론은 재고되어야 했다. 지해 선생은 그러한 과학사의 변천을 감안하여 칸트의 인식론을 현대과학과 불교의 화엄사상을 곁들여 비교 검토함으로써 칸트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연과 자유의 통일을 완성하려 하였다.

 

사진 3. 김용정 교수가 번역한 카프라(F. Capra)의 책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지해 선생은 1979년 카프라(F. Capra)의 The Tao of Physics(1975)를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으로 번역하여 한국의 지성계를 뒤흔들었다. 그 책은 1980년대에 우리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어 우리사회에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카프라는 현대물리학의 주요 개념과 이론들을 수식이나 전문 기호를 쓰지 않고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면서 현대물리학이 기존의 이원론적 사유방법을 넘어서 인도철학이나 중국철학의 세계관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지해 선생은 칸트와 카프라가 그랬듯이 서로 다른 철학, 과학, 사상을 잘 녹여내는 융섭融攝의 기술자요, 그것들을 연결하여 공통의 원리를 찾아내는 통섭通攝의 철학자였다. 그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고대철학과 현대철학, 합리주의와 신비주의, 철학과 신화, 과학과 종교 등이 서로 배척하고 대립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호의존적이고 상보적이어서 공생하고 상생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일찍부터 불교의 공空 사상과 중도中道 사상을 토대로 동서고금의 철학과 과학을 녹여내었다. 그리고 불교의 공空, 플라톤의 코라(chora), 실존철학의 무無, 현대물리학의 장場(field) 개념 등을 통해 물질과 정신,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이 둘이 아님을 밝히려 하였다.

 

김용정 교수의 유려한 불교강좌

 

이 책이 나오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2023년 초 안승신 사모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미국에 계신 범산 최종일 거사로부터 1981년 미국에서 있었던 불교강좌 녹음파일을 받으셨고, 40여 년이 지난 강의이긴 하나 다시 들어보니 아련한 옛 추억으로만 간직하기엔 너무 아쉬워서 녹취하여 책으로 내보자는 것이었다.

 

사모님이 정리한 녹취록을 받아 보니 단행본을 내기에는 분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발표했던 글들을 찾아보니 기존 저서에 들어 있지 않은 불교, 과학, 철학과 관련된 글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그 글들은 각기 다른 청중과 독자를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어서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내려면 글의 높낮이를 조정해야 했다. 이 책과 인연이 될 독자들이 불자, 과학도, 철학도임을 감안하여 어떤 부분은 보강하고, 어떤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면서 다듬어 글들의 성격에 맞춰서 4부로 나누었다.

 

사진 4. 1981년 독일 마인츠에서 열린 제5차 국제칸트대회에 참석했을 때.

 

1부 〈불교, 과학, 철학의 삼중주〉는 선생님이 1980년에 미국 뉴욕주립대와 컬럼비아대 방문교수로 계실 때 교수, 대학원생, 의사들을 대상으로 열었던 불교강좌를 녹취한 것으로, 불교, 과학, 철학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선생님의 아름다운 강의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2부 〈『반야바라밀다심경』 강의〉는 1995년 여름 한국불교발전연구원에서 교사들을 상대로 강의하고 월간 『불광』 255호~266호에 연재했던 것을 보완한 것으로, 『반야심경』이 어째서 고통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인지를 잘 보여준다.

 

3부 <철학, 과학과 불교를 만나다>는 한창 열정적이던 40대부터 학문이 무르익은 70대까지 글들을 정리한 것으로 다소 어려운 감이 있지만, 2,500여 년 전 탄생한 불교가 현대의 과학과 철학에 많은 영감을 주고 있고, 21세기에 가장 어울리는 종교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진 5. 볼티모어 성불사 불교강좌를 만든 범산 최종일 거사와 함께.

 

4부 〈과학, 불교와 철학을 만나다〉는 (주)범양사에서 발행했던 계간 『과학사상』에 실렸던 글들을 다듬은 것으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생명과학과 정보공학의 빛과 그림자와 인류 최대 화두인 환경문제에 대한 그의 통찰과 혜안을 보여준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짧게는 20여 년, 길게는 50여 년 전에 쓰인 것이다. 6개월이 멀다 하고 새로운 지식과 과학기술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 글들이 여전히 의미가 있고 유효한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학문에서 새로운 이론이나 학설이 탄생하여 일반 대중들이 믿고 따르는 세계관으로 정립되기까지는 수십 년, 수백 년이 걸리고, 실제로 물리학에서 상대성이론과 불확정성원리가 나온 지 100여 년이 지났고 지금은 정상과학(normal science)으로 자리 잡았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서 여전히 세계관으로까지는 되지 못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대중들이 선禪과 명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고, 현대의 과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면서 지해 선생의 글들이 더욱 설득력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게 되었다.

 

불교, 과학, 철학의 삼중주

 

오늘날 경제성장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고, 기후위기가 악화되어 지구환경이 급속도로 파괴되어 인류의 지속 가능성마저 우려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포스트모더니즘을 부르짖고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데도 여전히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와 니체(F. Nietzsche) 같은 19세기 철학자들이 소환되고 있고, 과학기술 발전과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탄생한 현상학, 실존철학, 정신분석학 같은 20세기 철학이 오늘날에 와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2,500년 전 부처님이 밝힌 중도中道와 공空 사상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과 지혜를 제공해 준다.

 

사진 6. 대한화학회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일리야 프리고진 초청 강연을 마치고 금곡 이성범 회장 자택에서.

 

지해 선생처럼 동서고금의 과학, 철학, 종교, 예술을 광범위하게 연구한 철학자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서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에 그의 학문세계는 쉽게 오를 수 없는 높은 산이요, 닿을 수 없는 깊은 바다에 비유될 수 있다. 넓은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높은 산에 올라야 한다. 불교와 과학과 철학은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그것을 한데 아우르면서 아름답게 연주하는 지해 선생의 ‘불교, 과학, 철학의 삼중주’를 들어본다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광활하고 무한한 우주와 진리의 세계를 접하는 행운을 얻게 될 것이다.

 

은사님의 지도를 받은 선배님들이 여럿 계시지만, 막내 제자다 보니 은사님과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 동국대 철학과 및 교수회 조교, 한국철학회 간사, 『과학사상』 편집주간 등으로 13년간 은사님을 모시게 되었다. 은사님께서 1996년 2월 정년퇴직하시면서 기념으로 『과학과 불교』, 『과학과 철학』, 『칸트철학』을 출간하셨는데, 그 책들을 교정보던 일이 엊그제 같다. 이제 정년퇴직을 앞둔 제자가 40여 년 전 은사님의 50대 초반의 생생한 강의를 들으며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말씀과 글들을 모으고 다듬고 엮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 세상에 와서 지해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은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은사님께서 영가가 되신 지 어언 5년이 됐지만, 남기신 말씀과 글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생생한 가르침을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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