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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및 특별기고]
퇴옹은 왜 돈오점수를 비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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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  2023 년 11 월 [통권 제127호]  /     /  작성일23-11-04 21:39  /   조회1,79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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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성철 대종사 열반 30주기 추모 학술대회 : 제1주제

 

퇴옹은 왜 돈오점수를 비판했을까?✽) -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차이와 관계 -


박태원•울산대 명예교수

 

돈점 담론과 성철 

‘한꺼번에 깨닫는다’는 돈오頓悟는 붓다 이래 불교적 통찰의 보편적 핵심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 동북아시아 불교인들은 돈오를 통해 붓다 사상의 생명력을 새롭게 확인하고 전승시켰다. 그런 점에서 ‘돈오’라는 문제를 선택하여 발전시킨 동북아시아 불교인들의 천재성과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사진 1. 첫 번째 주제 발표자 박태원 울산대 명예교수.

 

동북아시아 돈점 담론 속에서 돋보이는 두 분의 한국 구도자가 있다. 보조지눌普照知訥(1158〜1210)과 퇴옹성철退翁性徹(1912〜1993)이다. 지눌은, 선종의 돈점론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 즉 ‘한꺼번에 깨닫고 점차 닦음’을 깨달음[悟]과 닦음[修]의 선불교적 표준으로 확립한 분이다. 그리고 성철은, 한국 선불교의 수행 표준으로 널리 수용되어 온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하면서 ‘간화선 돈오돈수頓悟頓修’, 즉 ‘간화선 화두 참구를 통해 한꺼번에 깨닫고 한꺼번에 닦음’을 천명한 분이다. 두 분의 대조적 사유로 인해 물꼬가 트인 현대 한국불교에서의 돈점 담론은 한국사상계가 자부할 만한 진리 담론이다.

 

‘이해와 마음’ 그리고 ‘이해수행과 마음수행’

 

‘현상의 법칙·질서·이치에 대한 포착 능력’인 이해理解(understanding)는 ‘비교된 차이들의 질서와 법칙에 대한 경험’이다. 그런데 이해 현상을 발생시킨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생명 현상의 조건 인과적 전개 과정에서 작동하는 ‘원초적 창발력’이 있다고 본다. ‘이해 현상’은 인간 생명 현상의 진화적 전개에서의 조건 인과적 계열에서 그 원초적 창발력에 의해 발생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언어인간이 된 이후, 이 ‘원초적 창발력’은 ‘인지적 경험의 모든 것을 대상화시켜 재인지하면서 재구성하는 마음능력’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관점·견해·이해를 평가하여 수정하기도 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도 하며, 새로운 이해를 수립하기도 하는 창발적 현상의 근거로 작용하는 것은 이 ‘재인지하면서 재구성하는 마음능력’이다. ‘이해 사유’의 강력한 규정력에 갇히지 않고 이해 내용을 보완·수정해 가고 새로운 이해로 바꾸어 가는 것은 ‘재인지 사유의 창발적 구성력’이다. 

 

이 ‘재인지 사유의 창발적 구성력’을 주목하여, 그것을 ‘선先 이해체계/문법에서 풀어나가는 능력’ 및 ‘이해를 이로운 것으로 수정하거나 수립하는 능력’으로 포착한 후, 그 능력을 의도적으로 계발하여 고도화시켜 가는 길을 마련한 분이 붓다였다. 그리고 ‘육근수호 및 정념에서 설하는 알아차림[正知, sampajānāti]’에 초점을 두는 붓다의 선禪,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유식관唯識觀과 원효의 일심一心, 선종의 돈오견성頓悟見性 선관禪觀은 이 ‘재인지 능력을 펼치는 마음’에 의거하여 <주객 대상을 붙들지 않아 새로운 관점과 이해를 수립하고, 기존 관점과 이해를 수정·대체하는 능력>을 계발하고 완성하는 길에 관한 이정표라고 본다.

 

이해수행은, <‘변화·관계의 차이 현상’과 접속을 유지한 채, ‘동일성·불변성·독자성·절대성 관념에 의거한 환각적 행복의 무지와 허구에 대한 이해’[苦觀]와 ‘변함·무본질·무실체·관계·조건 인과적 발생에 대한 이해’(무상관無常觀·무아관無我觀·공관空觀·연기관緣起觀)를 수립하여 내면화시킴으로써, ‘차이 현상의 사실 그대로[如實相, 眞如相]’를 이해하여 ‘사실 그대로의 이해로 인한 개인과 세상의 이로움’을 누리려는 것에 초점을 두는 수행>이다. 그리고 마음수행은, <‘변화·관계의 차이 현상’과 접속을 유지한 채, ‘재인지 사유로서의 마음 작용’에 의거하여 ‘차이 현상들에 대한 기존의 느낌·이해·인식·경험을 붙들지 않는 마음 국면’을 열어, ‘기존의 느낌·이해·인식·경험 계열에서 빠져나오는 마음 국면’에서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느낌·이해·인식·경험’으로 바꾸고 내면화시켜,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느낌·이해·인식·경험’에서 발생하는 개인과 세상의 이로움을 누리려는 것에 초점을 두는 수행>이다.

 

이해는 ‘재인지 사유의 창발적 구성력’에 의해 바뀐다. 그리고 ‘재인지 사유의 창발적 구성력’을 촉발하는 것은 ‘이해’이다. 이해와 재인지 사유의 이러한 상호 작용은 ‘이해 사유’와 ‘재인지 사유’가 맺고 있는 ‘별개의 것은 아니지만 같은 것도 아닌 관계[不二而不一]’ 때문이다. 붓다는 ‘잘못된 이해’를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이해’로 바꾸는 데 필요한 재인지 사유의 역할을 주목하여 그의 법설에 반영하고 있다. 육근수호 및 정념수행의 알아차림[正知, sampajānāti]이 설하는 ‘붙들지 않아 거리를 확보하는 마음 국면’ ‘기존의 이해 계열에서 빠져나오는 마음 국면’이 그것이다. 이 정지正知의 마음 국면은 ‘괄호 치듯 대상화시켜 놓고 재검토할 수 있는 좌표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듯 옮겨가는 재인지 사유의 작동 양상’이다. 이해수행은 마음수행과 함께해야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이해’를 향해 머물지 않고 나아갈 수 있고, 마음수행은 이해수행과 함께해야 그 창발적 구성력이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이해’라는 구체적 내용으로 구현된다.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분리될 수 없는 상호 의존’은 양자의 융합이 고도화되는 단계에서 ‘상호 관계의 정점’에 이른다.

 

이해수행과 마음수행 그리고 지눌과 성철

 

지눌은 화엄적 해오解悟가 돈오와 통한다고 보고 이에 의거하여 돈오점수를 설명한다. <화엄의 사상과 수행론에 돈오점수의 근거가 있다면 선종의 돈오점수와 통한다. 따라서 화엄종과 선종의 반목反目은 해소될 수 있다.>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눌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화엄의 십신十信 초위初位에서 ‘자기 마음의 근본보광명지[自心根本普光明智]’를 깨닫는 것은 돈오이지만 ‘이해가 드러낸 것[理智現]’이므로 ‘이해를 통한 돈오’이다. 그리고 ‘지적知的 이해로 인한 돈오’는 분별 사유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기에 ‘분별 사유로 인한 번뇌 망상을 다스리려는 지속적 수행[漸修]’이 필요하다. 그래서 돈오점수가 수행의 준칙準則이 된다는 것이다. 

 

사진 2. 대구 동화사 보조국사 지눌 진영(보물 제1639호).

 

성철은 지눌 사유의 이 대목이 지닌 문제점을 꿰뚫어 본다. 성철이 ‘화엄적 해오에 의거한 돈오점수’의 문제점을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불교 교학과 수행론을 관통하고 있는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차이’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차이’에 대한 성철 안목의 수립에는, 그의 선문禪門 탐구와 간화선 수행 체험이 결정적 조건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불교사상사에 대한 탐구에서 얻어진 교학적 안목과 선종사상 탐구 및 화두 참구에서의 체득이 결합되어 수립된 것이, ‘이해수행의 길’과 ‘마음수행의 길’을 식별하는 그의 안목이었다. 

 

성철은 두 수행 길의 구분에 그치지 않는다.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종의 선문에서는 ‘마음수행의 길’이 종요宗要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해수행의 길’과 ‘마음수행의 길’을 뒤섞어 버리면 선종의 생명력이 훼손된다.>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선문禪門의 마음수행은 불교 교학뿐 아니라 선종 내부에서도 제대로 간수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해수행을 선문禪門의 마음수행과 섞어 버리면, 마음수행의 길이 혼탁하고 어지러워져 더욱 제 길을 보전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마음수행의 길이 드러난다. 그런데 지눌이 역설하는 돈오점수는 화엄의 ‘이해수행에 의한 깨달음[解悟]’을 선문의 돈오에 연결시키려는 시도이다. ‘이해수행에 의한 돈오점수’가 선문 안에 득세하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면, 선종이 소중히 복원하여 간수해 온 ‘마음수행의 길’이 다시 막힌다.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을 결합시키려는 해오점수解悟漸修는 선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일 수 있다. 차이를 분명히 가려내어 마음수행의 길을 보존해야 하겠다.

 

필자가 헤아려 보는 성철의 의중이다.

 

지눌과 성철이 함께 열어주는 길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차이를 기준으로 보면,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을 뒤섞으면 마음수행에 대한 왜곡이 지속되어 마음수행의 길이 혼란해지고, 그것은 마음수행의 본령을 애써 복원하여 간수해 온 선종의 생명력 훼손을 의미한다.>는 의미에서, 성철의 비판은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눌의 시도는, <선종 구성원으로서 이해수행의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선문禪門 안에 품으려 했다.>는 점에서 각별하고 유의미有意味하다. 

 

지눌의 문제 의식과 대안은 타당한 맥락이 있다. 또한 성철의 지눌 비판과 대안도 타당한 맥락이 있다. 문제 의식 등 ‘각자의 관점과 견해를 발생시킨 조건들의 인과 계열[門]’을 구분하여 성찰하면, 두 경우 모두 간과해서는 안 될 ‘나름의 타당성[一理]’을 지닌다. 이 ‘나름의 타당성’들은 모두 현대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적실한 해법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외견상 대립하고 충돌하는 내용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지눌과 성철은 합세하여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사진 3.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며 해인총림의 수행가풍을 진작하고 간화선풍을 드날린 성철 대종사.

 

지눌이 가리키는 길은, ‘이해와 마음의 관계’가 선 수행의 길에서 활발하게 상호작용하는 전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해의 의미 규정력’이 없다면 마음이 비게 되고, 마음의 ‘이해 구성력’이 없다면 이해의 물이 썩는다. 지눌의 시도는,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서로에게 힘을 보태는 길을 전망하게 해 준다. 

 

이에 비해 성철이 가리키는 길은, ‘마음이 차지하는 근원적 상위上位의 역할’이 선 수행의 길에서 제대로 작용하는 전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마음은 ‘모든 이해 현상을 가능케 하는 근거로서 이해를 포괄하고 있는 상위의 지위’이기에, 마음수행은 이해수행으로는 이르지 못하는 상위 범주에서의 성취를 가능케 한다. 성철의 길은 굴절되고 묻혀 온 마음수행의 길에 눈뜨게 한다. 오염되고 가려진 마음수행의 길을 다시 드러내고 보전해 가게 한다.

 

지눌과 성철이 합세하여 열어주는 길은,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이 각자의 구분되는 역할을 제대로 보전하면서도 상호관계와 상호작용이 고도화되는 길>이다.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은 각자의 구분되는 역할을 제대로 드러내면서 활발하게 상호작용해야 한다. 그래야 이해수행은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이해’를 향해 머물지 않고 나아갈 수 있고, 마음수행은 그 창발적 이해 구성력을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이해’라는 구체적 내용으로 실현할 수 있다.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이 이렇게 상호작용하면, 양자兩者의 차이가 통섭通攝되고 고도화되면서 정점을 향한다. 그리고 정점의 융합 단계에서는, <그 어떤 이해도 붙들거나 그에 머물러 제한받지 않으면서 이해를 굴리는 인지능력 지평>,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이해’에도 갇히거나 붙들어 집착하지 않는 좌표에 역동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이해’를 운용하는 인지능력 지평>, <모든 유형의 관념·느낌·욕망·행위·의지·심리·이해 양상에서 끝없이 풀려나면서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이로운 관념·느낌·욕망·행위·의지·심리·이해 양상’을 역동적으로 조정하면서 펼치는 인지능력 지평>이 밝아진다. 지눌과 성철이 함께 열어주는 길에서 피어나는 만다라曼陀羅의 장관壯觀이다. 오래전 붓다가 열어준 중도中道의 길이면서 지금 우리가 넓혀 가야 할 길, - 그 ‘오래된 새길’의 풍경이다.

 

(✽) 사람들은 대개 중요한 일이 생길 때는 미리 그 조짐이 꿈으로 나타나곤 한다. 둔한 필자도 그런 경우가 가끔 있다. 이 글을 쓰기 전에도 그랬다. 2023년 1월 20일쯤인가. 꿈에 느닷없이 성철스님이 휘적휘적 오셔서 몇 마디 하시고는 다시 뒤돌아 휘적휘적 가셨다. 하도 생생하여 깨어나 “웬일로 성철스님이 꿈에 보이나?” 하였다. 며칠 뒤 성철사상연구원으로부터 전화를 받고서는 “아하!” 하였다. 2023년이 성철스님 열반 30주기라서 10월에 추모학술대회를 개최하려고 하니 발표를 준비해 달라는 전화였다. 전화 받기 전에는 성철스님 30주기인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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