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건축 이야기]
장곡사의 미스터리, 두 대웅전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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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화 / 2021 년 10 월 [통권 제102호] / / 작성일21-10-05 10:29 / 조회5,396회 / 댓글0건본문
불교건축 이야기 10
다불신앙의 영향인가, 대웅전이 둘인 사찰
대웅大雄이란 ‘위대한 영웅’이란 의미로 이 세상의 중생을 널리 교화하여 구제할 수 있는 존재이며, 역사 속에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웅전은 바로 이 영웅의 집인 것이다.
사진 1. 장곡사 항공 사진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의 인식은 공간과 시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각 세상마다 ‘깨달은 이’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부터 다불신앙多佛信仰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확장은 다양한 부처를 만들어 냈는데, 각각의 서로 다른 부처들도 결국은 그 세상마다의 석가모니불인 것이다.
사진 2. 장곡사 사유림寺有林 벌채 허가의 건(1936년, 국가기록원)
불교가 전파된 나라마다 다양한 부처를 봉안하게 되는데, 부처마다 각기 다른 특징이 강조되면서 다불신앙은 더욱 발전한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부처는 역시 역사 속에서 인간으로서 깨달음을 얻어 영축산에서 최초의 설법을 하신 석가모니불이기 때문에 그 설법이 가지는 상징성은 절대적이다.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두 대웅전의 사찰
청양 장곡사長谷寺는 불상과 대좌·건물·괘불 등 9세기 이후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재가 전해 오는 사찰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대웅전이 상·하로 두 개가 있다는 점이 더 눈길을 끄는 사찰이다.
사진 3. 상대웅전 내부
편의상 상대웅전과 하대웅전으로 구분하지만 실제 편액은 모두 그냥 대웅전大雄殿이라고 걸려 있다. 상대웅전에는 ‘아미타불(좌)-비로자나불(중)-약사불(우)’로 비로자나자나삼세불毘盧遮那三世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하대웅전에는 현재 ‘약사불’만 단독으로 봉안되어 있다.
우선 상대웅전부터 유명한 순서대로 보자면 국보로 지정된 향우측의 약사불은 9세기 말로 알려진 불상인데 상만큼이나 대좌가 유명한 작품이다. 이 불상은 건물 안에서 동쪽인 향우측에 위치해 있는데, 동방에 있다는 약사불의 정토를 고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4. 일제강점기 상대웅전(국립중앙박물관)
중앙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 초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신기하게도 대좌가 영 불안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석등의 일부를 가져다가 대좌처럼 사용한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불인 비로자나불의 좌측에 약사불과 대칭되게 아미타불이 있어야 하는데, <사진4>에서는 볼 수가 없다. 1973년 실측 조사한 평면도(사진5의 右)를 보면 아미타불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인 오가와 게이키치小天敬吉가 조사한 자료 중 상대웅전의 스케치(사진5의 左)를 보면 특이하게도 아미타삼존(세지-아미타-관음)이 좌측벽을 등지고 우측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1777년 「칠갑산장곡사금당중수기七甲山長谷寺金堂重修記」의 내용과 일치하는데, 같이 조사된 오가와의 메모에 의하면 아미타삼존은 강희 40년(1701)에 조성된 것이라고 하니, 이미 이때부터 상대웅전은 대웅전의 형식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불상의 구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오가와는 하대웅전의 스케치(사진6)도 남겼는데, 여기에는 불상 두 구가 봉안되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두 약사불로 조선 후기 약사신앙이 아무리 유행했다고 해도 한 건물에 약사불 두 분이 나란히 안치되어[二佛竝坐] 있다니 정말 독특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사진 5. 상대웅전 평면도-1930년대 후반
(左, 국립문화재연구소)과 1973년
이 중 1346년에 조성된 우측의 약사불은 하대웅전에 그대로 남고, 흙으로 빚은 좌측의 약사불은 1973년 이후 상대웅전으로 옮겨져 아미타불의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원래 상대웅전에 있던 아미타삼존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 이처럼 하대웅전은 약사불만 둘이 봉안된 건물이었는데, 어떻게 대웅전이라는 편액을 걸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정도로 봉안된 불상과 전각명이 불일치하는 경우는 혼란이라기보다는 왜곡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하다.
대웅전의 다른 주인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대웅전이면 석가모니불이어야 하지만 대웅전이면서도 석가모니불이 아닌 경우가 많은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비로자나불이 봉안된 경우이다. 사람들이 보통 이러한 불일치는 오류라기보다는 ‘응용’ 또는 ‘틀리지 않은 표현’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비로로자불과 석가모니불이 응신應身 관계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주불의 이름과 전각명이 불일치하는 것을 조선시대에는 흔히 있는 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큰 것 같다.
우리나라 사찰의 양 법당法堂 전통
어지간한 규모의 사찰을 돌아다녀 보면 법당이 두 개 이상인 경우는 수두룩 빽빽하다. 이렇게 두 개 이상인 경우는 우선 다불신앙의 영향이 가장 크지만 이전부터 이어지던 금당과 강당을 모두 짓던 전통과도 관련이 있다. 금당이야 원래 부처님을 봉안하는 곳이지만 어느 순간 강당에도 부처님을 봉안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6. 일제강점기 하대웅전 평면도
하대웅전 영역 배치도
강당에도 불상을 봉안하던 경향이 이어져 오다가 금당과 강당의 기능적 구분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양 법당으로 굳어진 것이다. 봉정사에는 「양법당중수기兩法堂重修記」(1809)가 전하며, 부석사에도 「양보전단확중수기兩寶殿丹雘重修記」(1808)가 전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옛날부터도 산중 사찰은 금당이 산을 바로 등지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강당이 금당 뒤에 배치된 사찰은 생각보다 드물다. 그래서 현존하는 전통 사찰에서 양 법당의 배치를 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금당과 강당처럼 배치된 경우보다 자유롭게 배치된 경우가 더 많다.
이런 흐름을 보면 한 사찰에 두 개 이상의 법당이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사찰에 대웅전이 두 개인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 한다.
영축산靈鷲山의 설주說主, 석가모니불
우리는 깨달아야 해탈을 한다. 그런데 스스로 깨닫는 것은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므로 깨달을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 차선인데, 그것이 바로 보제普濟의 기회인 것이다. 이렇게 널리 중생을 구제하는 장소는 주로 사찰의 문루이며 이때 꼭 필요한 것은 괘불이다.
사진 7. 이전 하대웅전 좌측 약사좌상
현 하대웅전 동등신銅等身약사불좌상
장곡사에는 국보로 지정된 괘불이 있는데, 미륵존불彌勒尊佛이라고 적혀 있으면서도 영산대회靈山大會를 위한 괘불임이라고도 적고 있어 학계에서 논란이 있던 유명한 작품이다. 영산(대)회란 석가모니가 깨달은 직후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조선후기 야외의식은 대부분 영산회를 구현하는 법화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아무래도 야외의식에서 클라이막스는 아직 깨닫지 못한 생사生死 불문의 모든 중생에게 부처님의 법문을 듣게 하고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사진 8.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그렇다면 영축산의 설법이 이루어지는 장소 즉, 상단上壇이 차려지는 안마당에 면한 법당 앞이 설주說主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법당 안에 어떤 부처님이 계시든 무조건 그 순간만큼 그 건물은 영축산이어야 하는 것이다.
사진 9. 장곡사 괘불의 화기(정명희)
지금까지는 조선 후기에 전각명과 주불의 불일치를 두고 단순한 혼란이라고 이해하였는데, 장곡사의 예에서와 같이 단순한 혼란이라기보다는 야외의식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사찰에서 영산회 설법의 장소를 구현하기 위해 야외의식이 설행되는 안마당에서 상단이 차려지는 건물은 어떤 불상이 봉안되어 있든지 간에 대웅전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장곡사도 평소에는 약사신앙으로 유명했지만 괘불을 펴는 날에는 약사불이 두 분이나 봉안된 전각임에도 대웅전이라는 편액을 걸었던 것인데, 그만큼 괘불을 내거는 야외의식은 조선후기 우리나라 사찰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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