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건축 이야기]
진감 선사 탑비는 왜 대웅전 앞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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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화 / 2021 년 9 월 [통권 제101호] / / 작성일21-09-06 09:41 / 조회5,003회 / 댓글0건본문
불교건축 이야기 9
쌍계사와 단속사의 엇갈린 운명
지리산에 있는 쌍계사와 단속사는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두 사찰 입구에는 최치원이 쓴 바위글씨가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최치원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단속사는 지금 사라졌고 쌍계사는 현존한다. 무엇이 두 사찰의 운명을 갈랐을까?
사진 4. 단속사지 항공사진.
쌍계사, 최치원, 서산 대사
지리산은 유교나 불교 그리고 도교 모두에게 의미가 각별한 산이며, 최치원이 말년에 이 산에서 신선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이다. 서산西山은 40세부터 지리산 쌍계사에 주석하는데, 이보다 이른 29세인 1549년에 「지리산쌍계사중창기」를 쓴 것을 보면 지리산에 대한 관심은 주석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쌍계사에 주석하며 최치원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를 존숭하는 시를 남기고 진감 선사의 탑비를 포함한 최치원의 대표적인 문장인 낭혜화상비·지증대사비·숭복사비를 「사산비명」이라 하여 세상에 널리 알렸다.
사진 1 . 지리산 쌍계사와 단속사(다음 지도).
「지리산쌍계사중창기」에는 생몰년이 겹치지 않는 진감(774-850)과 최치원(857-?)을 마치 같은 시기의 사람처럼 등장시켜, 유불간의 융합을 쌍계사 중창의 정당성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사림士林이 국정 전반을 점차 장악해가던 시기로 불교를 이단이라며 공식적으로 배척하던 때였다. 그러나 문정 왕후와 같은 인물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불교가 중흥되는 아이러니한 시기이기도 하다.
서산이 존숭하는 최치원은 이미 고려 때부터 문묘에 배향되어 있었는데, 일부 사림들은 최치원을 ‘부처에 아부한 자’라고 하여 비판하기도 하였다.
서산이 쓴 「중창기」 내용을 보면 중창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쌍계사를 마치 ‘최치원 테마사찰’처럼 변화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 쌍계사의 전신인 옥천사 시절부터 중심 사역寺域 역할을 하던 금당영역 대신 진감비가 있는 곳에 대웅전을 새로 세우며 이곳을 새로운 중심사역으로 만든 것이다.
사진 2. 쌍계석문과 쌍계사의 다음 지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중심사역에는 최치원의 영당도 세워졌는데, 현존하는 최치원 영정은 이후에 재차 조성된 것으로, 화기畵記에 따르면 1793년 쌍계사에서 조성된 것이다. 이 영정은 1825년 화개의 금천사琴川祠로 옮겨졌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에 의해 하동향교로 옮겨졌고, 최치원 후손들이 세운 운암영당에 옮겨지게 되며 오늘에 이르렀다.
최근 영정에 대한 X선 조사를 통해 최치원 좌우에 원래 동자가 있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사찰에 봉안하는 영정이라 동자가 최치원을 시봉하는 장면을 그려 넣었으나, 쌍계사 밖으로 옮겨지며 동자를 덧칠하여 가린 것으로 보인다.
같은 듯 다른 단속사
단속사의 창건은 8세기 중반 경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선禪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9세기 중반보다 앞서 신행(704-779)과 그의 스승이 북중국에서 유행하던 선을 들여왔고, 이중 신행이 머물며 수행한 곳이 바로 단속사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들어온 선은 6조 혜능을 중심으로 하는 남중국의 선이었으며, 이것이 신라에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 단속사에 들어온 북중국의 선은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사진 3. 쌍계사에서 조성된 최치원 영정
사진3-1. 쌍계사에서 조성된 최치원 영정( X선 촬영 이미지).
단속사는 고려시대에 최씨 무신정권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 단속사의 사정은 전에 비해 많이 어려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1489년 김일손(1464-1498)의 기행문에 나오는 단속사의 현황을 보면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이 기행문에는 단속사도 쌍계사처럼 입구에 최치원의 글씨로 알려진 ‘광제암문廣濟巖門’이란 바위글씨가 있고, 사찰에는 ‘치원당致遠堂’이 있었다고 나온다.
16세기 중반의 사회적 분위기와 서산의 선택
서산의 「지리산쌍계사중창기」를 바탕으로 16세기 중반의 쌍계사 변화를 살펴보면 진감비가 있는 영역에 대웅전을 세우며 이곳을 중심사역으로 바꾼다. 이렇게 큰 변화가 도대체 왜 필요했을까?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영향력 있는 고승들은 대부분 불교가 유교처럼 군신의 도리와 세상의 이치를 아는 종교이며, 불교를 인정하는 것이 실제 나라 운영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서산 역시 이러한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서산은 쌍계사에 주석하며 종종 단속사에도 오가곤 했는데, 『삼가귀감三家龜鑑』을 쌍계사에서 쓰고, 단속사에서 판각한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삼가三家란 불佛·유儒·도道를 말하는 것으로 세 종교에서 귀감이 될 만한 글귀들을 간추려 엮은 책이다. 책이 마무리 되어 갈 때가 바로 사림士林 세력의 반대를 무시하고 불교 중흥책을 추진하던 문정왕후(1501-1565)와 보우 대사(1509-1565)가 연달아 죽거나 죽임을 당한 직후이다.
사진 5. 단속사 ‘광제암문’
사진5-1. 쌍계사 ‘쌍계석문’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서산은 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1568년 20대 초반인 성여신(1546-1623)을 비롯한 열 명의 젊은 선비들이 공부하기 위해 단속사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우연히 서산이 쓴 『삼가귀감』을 보게 된 성여신을 비롯한 젊은 선비들은 유가의 글이 가장 뒤에 편집된 것을 보고 승려들이 유가를 능멸했다고 생각했다. 이를 빌미로 책과 경판은 물론 불상까지 불태웠는데,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50세에 가까운 서산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 사건이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때부터 기울어지기 시작한 단속사의 사세는 끝내 반전되지 못한다.
운명을 가른 진짜 이유
성리학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회에서 선유先儒인 최치원을 숭모한다는 것은 마치 불교가 『부모은중경』을 판각하거나, 승군僧軍을 조직하여 전쟁에 나아가는 것만큼이나 복잡 미묘한 일일 것이다. 다만 불교 입장에서 보면, 거유巨儒이며 불자佛子였던 최치원을 존숭하는 것은 외적 명분과 내적 위안을 동시에 얻을 수 있고, 성리학 일변도 사회에서 불교의 생존 가능성까지 담보할 수 있는 방안方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최치원의 유묵과 진영을 모두 갖춘 두 사찰의 운명이 갈린 이유는 무엇일까? 성여신과 그 일행이 공부를 위해 단속사로 가지 않고 만약 쌍계사로 갔으면 결과가 바뀌었을까? 『삼가귀감』의 편집 순서가 달랐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쌍계사 중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서산이 진감비를 중심으로 쌍계사를 재편한 것은 최치원을 쌍계사의 전면에 내세운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진 6. 진감 선사 탑비.
선비들이 거유巨儒의 글씨를 대하는 것이 마치 그를 직접 대하는 것과 비슷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젊은 시절 유학을 공부했던 서산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지리산을 찾는 유자들의 유산遊山에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던 쌍계사를 최치원을 중심으로 재편하고 이곳에 들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치원을 직접 보고 느끼게 하는 것이 사찰을 보존하는 방편의 하나라고 판단했던 것은 아닐까?
이처럼 쌍계사는 최치원을 선양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사찰인데다 서산西山까지 더해졌지만, 단속사는 이와 비교해 여러모로 부족한 조건에다 서산과의 인연도 모자라 운명이 갈린 것으로 생각된다. 한 명의 인재가 사회의 운명을 바꾼 사례는 이 외에도 많다.
사족蛇足 하나. 단속사의 ‘광제암문’이라는 바위 글씨 주변을 살펴보면 ‘통화십삼년統和十三年(995)에 혜규惠.라는 스님이 쓰고 효선曉禪이라는 스님이 새겼다’는 명문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며, 신행 선사의 비도 영업靈業 스님이 썼다고 전한다. 단속사는 실제 쌍계사와 비교해 최치원과 같은 거유와의 인연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1616년 성여신이 쌍계사에 들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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