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불교]
고려의 화려한 차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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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 2020 년 5 월 [통권 제85호] / / 작성일20-06-01 16:49 / 조회8,307회 / 댓글0건본문
박동춘
고려 왕실이 주관하는 불교 의례에서 가장 귀하게 여겼던 공양물은 차였다. 그러기에 고려 초기 왕이 몸소 차를 갈아 부처님께 올렸던 것이며, 중기까지도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품으로, 공이 있는 신하나 승려에게 차를 하사했던 것이니 이는 『고려사』, 혹은 『고려사절요』 같은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문종 21년(1067), 왕사王師를 하직하고 돌아가는 해린(海麟, 984-1067)에게 차를 하사했는데, 그가 법안종 승려로,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인물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를 살펴보니 그 내용은 이랬다.
“9월 정유에 국사 해린이 연로하기에 산으로 돌아가길 청하였다. 왕이 현화사에 납시어 친히 전송하면서 차와 약, 금은 그릇, 비단과 보물을 하사하였다[九月丁酉, 國師海麟, 請老還山. 王親餞于玄化寺, 賜茶藥金銀器皿綵緞寶物].”
윗글은 문종이 해린에게 차, 약, 금은 그릇, 비단과 보물을 하사했다는 것인데, 이는 왕의 전별 예품禮品이다. 해린이 왕사 직을 사양하고 절로 돌아가기를 청한 것은 그만큼 그의 건강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추정되는데, 이는 그가 열반했던 해가 1067년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왕은 몸소 현화사까지 전송할 정도로 그에게 보인 지극한 예를 보였다. 그 연유는 무엇이며 그와 문종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이는 현종(재위 1009-1031) 때 법상종의 대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현종은 어린 시절이 불우하여 고아처럼 자라야했다. 현종의 어려운 처지를 보살펴 준 것은 성종(재위 981-997)이었다.
그런데 목종(재위 998-1009)이 즉위하자, 현종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목종의 모후인 천추 태후의 박해로 인해 강제로 삭발되어, 승교사로 출가하는 처지가 된다. 그런데도 현종을 암살하려는 천추 태후의 음모가 지속됨에 따라 위기를 느낀 현종은 삼각산 등지의 사찰로 피해 다녀야 했다. 이런 어려움을 겪던 그가 국왕으로 즉위한 후, 부모의 원찰로 현화사를 개창하여 초대 주지에 법상종 스님 법경을 임명한다. 그리고 현화사를 법상종 사찰로 지정한다. 현종이 법상종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배경에는 그가 천추 황후를 피해 절을 전전할 때 그를 보호해 준 사찰이 법상종이었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법상종은 고려 불교의 중심 종파로 부상하여 문벌 귀족들의 출가가 이어짐에 따라 교단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문종은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니 현종이 그의 증조曾祖이다. 그러므로 문종이 법상종 스님 해린을 왕사로 삼았던 것이나 그가 절로 돌아갈 때 후한 대접을 했던 것은 이와 같은 배경 때문이다. 더구나 해린에게 출가한 소현(韶顯, 1038-1096)은 문벌 귀족인 이자연(인주 이씨)의 아들이며 문종의 처남이다. 후일 소현은 법상종을 이끈 교단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고, 문종의 5째 아들 탱을 법상종에 출가시켜 교단을 장악했던 것은 인주이씨의 현화사에 대한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다. 그러므로 문종이 현화사로 돌아가는 해린을 위해 극진한 예를 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왕의 예품으로 차와 금은으로 만든 기명器皿을 하사했다는 점이다. 이는 왕실과 법상종, 승원 등에서 주도했던 차 문화가 정치적인 함수 관계와 연관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기명에 대한 정보는 서긍(徐兢, 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기명(器皿)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고려에서 사용했던 기명의 종류로는 제기종류, 향로, 물병, 술 잔류인 반잔[酒榼], 박산로, 주합酒榼, 정병, 탕호湯壺 등이 있다고 하였다. 금은제(사진 2)로 만든 기명을 살펴보니 은으로 만들어 금칠한 반잔[酒榼]과 은으로 만든 약병 면약호面藥壺가 있고, 차를 끓일 때 사용하는 은로銀爐를 은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문종이 해린에게 하사한 금은 기명은 다구茶具일 것이라 추정된다. 왜냐하면 차와 다구는 승려의 일상용품으로, 12세기 차 문화를 주도했던 그룹이 승려였으며, 차 문화를 향유했던 장소 또한 승원이었다는 점에서다. 무엇보다 승려의 일상에서 다사茶事은 수행자의 일상사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한편 왕과 차와 관련된 현화사의 기록은 의종 13년(1159)에도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자, 승려들이 다회茶會를 열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3월 을해에 왕이 현화사로 행차했다. 동서 양원의 스님들이 각각 다정을 설치하여 왕을 모셨는데, 더욱더 사치하고 화려하게 하려고 서로 다투었다[三月乙亥, 行玄化寺. 東西兩院僧各設茶亭迎駕, 競尙華侈].”
윗글은 의종의 어가를 맞은 현화사 양원兩院에서 다회를 준비한 정황이 드러난다. 그런데 승원에서 왕을 위한 다정을 설치했다는 것인데, 다정은 차를 마시는 공간이다. 의종을 위해 명전茗戰을 베푼 것으로 짐작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주 이씨는 왕의 권세를 능가했던 문벌 거족이었다. 그러므로 인주이씨가 후원한 사찰, 현화사에서 베푼 명전은 최상의 차와 기물 등이 진설되었을 것이니 화려하고 사치한 명전의 규모는 극에 달했을 터이다. 그러니 현화사에서 벌어진 명전을 “사치하고 화려하게 하려고 서로 다투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당시 고려에서 생산한 작설이나 뇌원차는 최고급 차로, 백차白茶를 선호했던 시기이므로 단차團茶가 주류를 이뤘다. 12세기 청자 다완은 찻그릇으로 완성도나 예술성에도 극치미를 완성했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현화사 동당과 서당의 스님들이 다퉈 삼매의 경지를 드러낸 차를 선보였는데, 막 격불擊拂한 다화(茶花, 차 거품)의 아름다움은 환상적인 색감을 드러냈을 것이다. 승원에서 차를 갈아(사진3·4) 명전을 준비하던 상황은 이인로(1152-1220)의 「승원의 차 맷돌僧院茶磨」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 정황은 이랬다.
차 맷돌 천천히 돌아 風輪不管蟻行遲
월부가 돌자 옥가루가 날리네. 月斧初揮玉屑飛.
법희란 본래 진실로 자재한 것 法喜從來眞自在
맑은 하늘에 우레 치듯 (차 맷돌이)울리자 하얀 눈이 나는 듯. 晴天雷吼雪霏霏.
윗글은 승원에서 차를 준비할 때 차 맷돌에 갈아 고운 가루를 만드는 정황은 그림처럼 그려냈다. 월부는 바로 맷돌의 어처구니,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을 돌릴 수가 없다. 차 맷돌에서 날리는 옥설은 차 가루를 말한다. 차를 가는 정황이 이인로라는 문장에 의해 서사적 감수성을 한껏 드러난 것으로, 이들에 의해 고려 차 문화는 더욱더 풍요로운 예술미를 더해 나갔다.
아무튼 이 시기에 교단과 문벌 귀족, 왕실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불교와 차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법상종과 왕실의 밀착 관계를 조금 더 살펴보면 법상종은 인주 이씨가 교단을 장악했고 왕실의 후원을 받던 화엄종은 교세를 확장해 법상종과 양립하며 불교계의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갈등이 심화되었다. 의종이 현화사를 방문, 양원의 스님들에게 환대를 받은 것은 법안종 승려들이 화엄종의 교세 확산을 막기 위한 환대가 아니었을까.
의종이 다시 현화사를 찾은 것은 1167년이다. 당시 귀법사와 현화사를 찾아 다원을 방문했는데, “왕이 말을 달려 달령의 다원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왕을 따르던 신하들이 따라잡지 못하였다[馳馬到獺嶺茶園, 從臣者皆莫及].”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승원에서 벌어진 명전茗戰은 승원에서 즐기는 단순한 풍류라기보다 왕과 승단의 유대 관계를 강화한 수단일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해진다. 종파의 성쇠가 왕의 친밀도에 따라 영향을 받았다면 차가 승단과 문벌 귀족, 왕실을 이어주는 징검다리로써 그 활용 가치는 충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송나라와 내왕이 잦았던 수행승들은 새로운 차 이론을 섭렵했던 그룹이다(사진 1). 그러므로 그들은 차 전반에 해박한 정보를 가진 전문가로, 고려의 차 문화를 이끌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 명전놀이가 승원에서 주도된 배경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구나 승원의 풍부한 경제력, 불교계의 사회적인 영향력은 고려의 차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게 한 동력이고, 명전茗戰 놀이는 관료 문인들을 초청하여 벌린 일종의 품다회品茶會 같은 것이고 문회文會의 성격을 띤 문화행사였다. 물론 이 행사에서 참석한 스님이나 문인들은 시와 그림으로 문회의 격조를 나타냈을 것인데, 이는 송대 투다鬪茶와 관련한 그림 및 다시茶詩가 많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를 통해 승단에서는 우호적인 왕실 귀족이나 관료 문인들과의 다층적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명전은 이런 정치적인 이유 못지않게 차 문화의 토층을 단단하고 풍요롭게 만든 젖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다시 앞의 운자를 써서 보내다復用韻字贈之」에서 “담담한 노스님, 물건 하나 없지만/ 솥에서 물 끓는 소리 듣기 좋아라./ 차와 물을 평하는 것은 불교의 풍류이니/ 양생을 위해 천년의 복령이 필요치 않네[蕭然方丈無一物, 愛聽笙聲號鼎裏. 評茶品水是家風, 不要養生千歲虆].”라고 인정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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