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불교]
조선 전기의 차문화 , 차는 있어도 문화는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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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 2020 년 9 월 [통권 제89호] / / 작성일20-09-21 11:13 / 조회7,975회 / 댓글0건본문
조선 건국 이후, 불교계와 차 문화는 커다란 변화를 겪어야 했다. 출가는 억제되고, 사원전은 축소되고, 사원도 선교양종 체제로 개편됐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망자를 추모하는 역활은 배척되지 않아 출가자의 사회활동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 성리학자들은 불교를 비판하는데 열을 올렸다.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심문천답』, 『심기리편』, 『불씨잡변』 등을 저술해 불교를 이론적으로 비판했고,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도로 불교의 인과응보설, 화복禍福, 인과, 윤회, 승려들이 출가하여 임금과 어버이를 저버린다는 반인륜적인 문제 등을 비판하고, 유교의 우월성과 현세적 가치를 수호하려 했다.
변혁기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화 스님(己和, 1376-1433)이나 보우 스님(普雨, 1509-1565) 등이 유교를 비판하며 유교와 불교가 서로 통한다는 원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불교계가 보인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성리학이 주도적인 사상으로 정착되자 불교계는 불교를 비판하는 성리학에 대해 방어적이면서도 타협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불교계의 이런 흐름은 곧바로 차 문화를 지탱하는 기반이 약화되는 커다란 변화와 연결된다. 고려시대 차 문화를 주도했던 왕실의 몰락과 불교계의 사회, 경제, 정치적 역량의 약화는 조선시대 차 문화를 발전시킬 토양의 위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 차 문화가 난만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의 경제적 후원과 차의 애호, 여기다 풍요로운 사원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차를 생산해 이를 수행과 결합했던 출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 문화의 격을 높일 수 있었다. 승려들과 교유했던 관료 문인들이 차 문화의 고아한 품격을 풍요롭게 만든 인문적 소양을 단단하게 뒷받침해 준 것 역시 고려시대 차 문화가 발전된 연유의 하나이다. 사회·정치적 안정으로 경제적인 풍요를 누린 시기에 차 문화는 발달했고 큰 꽃을 피웠는데, 이는 한·중·일 삼국의 차 문화사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건국으로 차 문화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구성 여건이 약화 되고, 특히 차 문화가 불교문화를 대표한다고 생각한 지배층의 인식이 조선시대 차 문화를 위축시킨 큰 장애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왕실의 상징적인 조치는 태종 때에 시행되었다. 바로 조선 왕실의 의례에서 올리던 요전(澆奠, 무덤 앞에 차려 놓은 제물상祭物床)에 다탕茶湯을 술과 단술로 바꾼 조치로, 태종 16년(1416)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된다. 당시의 정황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태종」 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2.삼봉 정도전의 <불씨잡변>
“선왕先王·선후先后의 기신재제忌晨齋祭에 술과 감주甘酒를 쓰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주서周書』에 제사에만 이 술을 쓰라고 하였으니, 예전부터 제사에 술을 쓰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본조(本朝)의 선왕ㆍ선후의 기신재에 모두 요전澆奠이 있는데, 홀로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신의 왕후神懿王后 요전에만 술을 쓰고, 그 나머지 요전에는 모두 다탕茶湯을 쓰니, 대단히 예禮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태조 요전의 예例에 의하여 기신마다 모두 술과 감주甘酒를 쓰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命先王先后忌晨齋祭, 用酒醴, 禮曹啓《周書》曰: ‘祀玆酒.’ 自古祭祀無不用酒. 本朝先王·先后忌晨齋, 皆有澆奠, 獨於太祖康獻大王·神懿王后澆奠用酒. 其餘澆奠皆用茶湯, 殊未合禮. 乞依太祖澆奠例, 每忌晨, 皆用酒醴. 從之]”
윗글은 차에 대해 태종이 내린 조칙의 내용으로, 예조의 건의로 선왕. 선후의 기신재 제사에서 차를 술과 단술로 바꾼 연유이다. 그런데 예조에서 차를 술과 단술로 바꾸어야 한다는 명분은 바로 『주서周書』에 제사에 술만 쓰라고 했다는 것을 근거로, 선왕과 선후의 기신제에 술을 올리는 용례를 따라 모든 기신제에서는 술과 단술을 올려야 한다는 비답을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15세기 초 왕실의 제사에서는 차가 사라졌다. 이 조치는 단순한 조치에 불과하지만, 이는 조선 시대 차 문화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이 조처가 내려진 지 14년이 지난 후, 왕실의 차 문화는 특별한 왕실 의례나 중국 사신을 접견하는 의례 이외에는 차의 흔적이 사라졌고 음다飮茶도 사라지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이는 세종 12년(1430)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12년 경술 12월, 세종이 경연을 하던 중, 차를 전매 법을 강의하는 데 이르러 말했다. ‘중국은 차를 좋아하면서도 엄하게 (국가에서) 금지하는가? 우리나라에는 궁중에도 차를 사용하지 않으니 (차를) 좋아하는 것이 각기 다름도 이와 같다.’ 시강관 김빈이 답변했다. ‘중국인은 모두 기름진 고기를 먹습니다. 그러므로 차를 마셔 기름기를 내려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손님을 접대할 때 반드시 차를 먼저 내고 뒤에 술을 냅니다.’[十二年庚戌十二月, 御經筵講至搉茶法曰: ‘中國何好茶, 而嚴其禁乎? 我國闕內亦不用茶, 好尙各異亦如是也.’ 侍講官金鑌曰: ‘中國之人, 皆食膏肉, 故飮茶令下氣, 且當對客必先茶後酒.’]”
사진3. <조선왕조실록> 태종조
윗글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 조의 기사 내용인데, 당시 세종은 시강관 김빈에게 중국의 차 전배 법[搉茶法]에 관해 물으며 “우리나라에는 궁중에도 차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태종 때에 내린 조치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고려 말기의 음다 습속은 조선 전기에도 이어졌다. 이는 기화己和의 「산중미山中味」에 일단이 보인다.
산 깊고 계곡도 깊어 찾는 이 없으니山深谷密無人到
종일토록 적막하여 세상 인연 끊겼도다. 盡日寥寥絶世緣.
낮이면 일없이 산봉우리에서 피어나는 구름을 보고 晝則閑看雲出岫
밤에는 텅 빈 하늘에 뜬 달을 보는데, 夜來空見月當天.
화로엔 향기로운 차 연기 가득하고 爐間馥郁茶煙氣
당 위엔 차 향기 가득 퍼지네. 堂上氤氳玉篆煙.
시끄러운 인간 세상 꿈꾸지 않아도 不夢人間喧擾事
좌선으로 보내는 세월, 선열만 만끽할 따름! 但將禪悅坐經年.
윗글은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에 수록된 다시茶詩다. 기화는 그의 휘諱이다. 그의 『현정론顯正論』에서 인을 주장하는 유교에서 살생을 금하지 않는 것에 의심을 가졌는데, 불교의 자비 사상에서 크게 깨달음이 있어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회암사에서 무학 대사의 가르침을 받았고, 지공·나옹·무학 같은 삼대 화상의 법을 이었다. 그런데 그가 산이 깊고 골짜기가 깊은 산사에서 구름과 달을 벗 삼아 수행하던 곳은 어딜까? 그가 1420년경 오대산 월정사에 머물렀다고 하니 차를 마시며 선열에 들었던 장소로는 최적의 수행처일 것이다. 오대산 월정사야말로 골이 깊고 산이 깊은 사찰임에랴. 향기로운 차 향기가 화로와 당상으로 퍼졌으니 이는 선미를 만끽한 수행자의 차 생활을 잘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차의 향기는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당상까지 퍼진 맑은 차 향기는 주변을 정화하는 기운을 지녔을 터다. 더구나 구름과 달, 속기마저 떨어진 승방은 선미의 극치를 실증하는 공간이다. 이런 곳에서 함허 득통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도 불교의 곧은 법통을 지켜냈으리라.
단차를 만드는 모습. 조선 전기에도 이런 차를 마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조선 전기 문인에게 차의 진정한 가치를 전했던 선가의 유풍은 유지됐는데, 하연(河演, 1376-1453)의 「지리산 스님이 새 차를 보내다[智異山僧送新茶]」에 그런 내용이 담겼다.
진주의 기후, 섣달 전에 봄이 오니 晉池風味臘前春
지리산 아래 초목들도 새싹이 텄겠지. 智異山邊草樹新.
정미한 차는 끓이면 더욱 좋아 金屑玉糜煎更好
맑고 묘한 색향에 더욱 진기한 맛이라. 色淸香絶味尤珍.
하연은 조선 전기 대표적인 문장가로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그에게 차를 보낸 스님이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지리산에서 수행하는 출가자였을 것이다. 지리산은 명차가 나는 곳, 화엄사, 쌍계사, 연곡사, 천은사 등 주요한 사찰이 산재해 있던 명산이다. 그가 받은 차는 아마도 화엄사나 쌍계사 일원에서 나는 찻잎으로 만든 차요, 더구나 선춘(先春, 이른 봄)에 돋은 황아黃芽로 만들었을 터이니 차색은 맑디맑고, 차 향기마저 그윽하여 맛을 논할 필요가 없는 명차였다. 고려는 망해도 조선 전기까지 명차를 생산할 기반이 사찰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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