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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禪, 禪과 시]
호랑이의 앞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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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3 년 12 월 [통권 제128호]  /     /  작성일23-12-04 14:51  /   조회2,66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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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에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으로 갑니다. 백두대간 단풍이 수목원 입구까지 성큼 내려와 있습니다. 산 전체가 붉게 물든 단풍도 좋지만 이처럼 한두 그루 단풍도 정취가 있습니다. 아무리 긴 여행도 실상은 아름다운 장면 몇 개를 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목원은 관람객이 많아서 유일한 교통수단인 트램을 타려면 30분 정도 대기해야 합니다. 

 

사진 1. 백두대간의 단풍.

 

입구에 있는 방문자 센터가 해발 452m, 누구나 가보고 싶어 하는 호랑이 숲은 해발 500m입니다. 트램을 타고 10분 정도 올라가면 단풍정원에 도착합니다. 우리는 단풍정원에서 전망대 숲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백두대간의 웅혼한 풍광이 아름답습니다. 야생화 언덕으로 올라가노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야생의 생명력이 깨어납니다.

 

호랑이의 앞다리

 

곳곳에 이름판을 세워 놓아 나무와 야생화 이름을 알아볼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벌개미취 군락지도 지나고 높은 하늘 위로 떠다니는 새털구름도 보았습니다. 이 비탈에는 들국화(쑥부쟁이, 구절초, 산국)가 만발했습니다. 쑥부쟁이는 자주색 꽃, 구절초는 흰 꽃, 산국은 노란색 꽃이 핍니다. 산국 향기가 너무 좋아서 잠시 발걸음을 멈춥니다.

 

야생화 언덕을 올라와서 암석원과 자작나무숲을 지나 호랑이 숲으로 들어갑니다. 호랑이 숲에는 모두 6마리의 시베리아 호랑이가 있습니다. 백두산 호랑이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 호랑이 숲 전체 면적은 약 11,000평 정도에 불과해 호랑이는 갑갑할 것입니다. 동물 복지적 접근을 한다고는 하지만 5.5m 높이의 철망 안에 갇혀 있습니다.

 

사진 2. 야생의 생명력이 깨어나는 언덕길.

 

많은 사람이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을 호랑이는 물론 알고 있겠죠? 호랑이도 사람들 때문에 상당히 긴장하겠지만 사람들 또한 긴장하고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난다면 혼비백산하겠지만, 안전장치를 사이에 두고 호랑이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면 그 당당하고 아름다운 자세에 감탄합니다. 

 

호랑이 울음소리에는 우리 귀에는 잘 들리지 않은 초저음이 섞여 있습니다. 초저음은 포식자를 알리는 신호입니다. 초저음은 내부 장기와 뼈를 진동시키고 손상시키며, 메스꺼움·멀미·두려움을 일으킵니다.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오금이 얼어붙는다는 옛날 사냥꾼의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사진 3. 호랑이의 앞다리에는 줄무늬가 없네.

 

호랑이가 쭉쭉 내미는 앞발이 얼마나 크고 위력적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주황색에 검은색 줄무늬가 달린 호랑이 털은 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람들 대부분은 호랑이 앞다리에는 줄무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본다고 해도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의 사정이란 그런 것입니다. 호랑이 앞다리에 줄무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듯이, 세상의 진실을 바로 알아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쇠 나무[鐵樹]에 꽃피는 도리

 

산 아래로 흐르는 물은 별다른 뜻이 없고

골짜기로 흘러드는 구름도 아무 마음이 없네

우리가 구름이나 물처럼 살 수 있다면

천지에 봄기운이 가득해 쇠 나무에 꽃이 피리라(주1)

 

이 시를 쓴 차암수정此菴守淨은 당대 제일의 승려인 묘희 선사 즉 대혜종고(1089~1163)의 제자란 것만 알려져 있을 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람은 전혀 모른 채 한 편의 작품을 읽어야 합니다. 그것은 답답하기도 하지만 기쁘기도 합니다.

 

사진 4. 산속에서 구름이나 물처럼 살고 싶어라.

 

물은 별다른 뜻 없이 흐르고, 구름은 무심하게 흘러갈 뿐입니다. 이건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철수鐵樹’, 즉 ‘쇠’ 나무에 꽃이 피리라’라는 구절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입니다. 쇠 나무에 어떻게 꽃이 피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철수鐵樹’를 무쇠 나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바이두百度를 찾아보니 ‘철수’는 ‘소철’입니다. 소철은 열대 지방 식물이라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꽃을 피우기 어려운 나무입니다. 소철에 꽃이 피는 일이 아주 드물 듯이, 깨닫는 일이 어렵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철꽃이 피리라’라는 구절을 불가능의 알레고리로 해석하기 때문에 ‘쇠 나무에 꽃이 피리라’라는 식으로 은유로 이해하는 것과 해석상의 차이는 별로 없는 듯합니다.

 

어떻든 쇠 나무나 소철에 꽃이 피는 경계는 모든 것을 뛰어넘은 절대의 세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 절대의 풍경 앞에 우리는 압도당하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선禪의 세계입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산다는 것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삶이고, 자기에 대한 걱정 없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경지입니다. 바로 거기가 선의 세계이고 쇠 나무나 소철이 꽃을 피우는 세계라고 차암수정은 노래하는 것입니다.

 

은유의 시 외에 순수한 인상 세계를 그려내면서 심층 세계를 보여주는 시도 있습니다. 심층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지만 그렇다고 실재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왕유王維(699~761)는 『구당서』 열전에 전기가 실려 있어 잘 알려진 시인입니다. 그는 날마다 십여 명의 스님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담소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습니다.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다만 찻잔과 약탕기, 그리고 경전을 놓는 책상과 새끼줄로 엮은 의자뿐이었습니다.(주2)

왕유의 「신이오辛夷塢」입니다. ‘신이’란 자목련을 말합니다.

 

가지 끝 부용화(자목련꽃)

산속에서 붉은 꽃망울 터뜨렸네.

고요한 계곡에는 인적조차 없는데

꽃만 저 혼자 피었다 지네.(주3)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어서 읽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이오」가 노래하는 세계는 순수 인상의 표층 세계입니다. 물론 이 세계가 전부는 아닙니다. 이 시에는 심원한 심층 세계가 있습니다.

 

사진 5. 인적 없는 산속에서 꽃만 저 혼자 피었다 지네.

 

이 시에는 자목련만 있고 인간, 즉 ‘나’가 없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저 혼자 피었다 지는 자목련은 인간의 접근 방식 너머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이 시의 밝은 개방성은 ‘나’가 없는 무아無我에서 솟아납니다.

 

왕유의 시는 저 혼자 피었다 지는 자목련이라는 표층을 통해서 고요함과 무상無常이라는 심층 세계를 보여줄 뿐 아니라 자신과 세상을 모두 잊은 무아의 경계를 보여줍니다. 만 가지 생각이 다 가라앉은 고요한 심층 세계를 자목련을 통하여 노래한 것입니다.


인생은 여행

 

호랑이 숲에서 산수국 숲길을 따라 내려옵니다. 어린 갈참나무도 만났습니다. 참나무는 천 년은 살 수 있는 아주 귀중한 나무입니다. 갈참나무 한 그루에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습니다. 고산 습원 지대를 지나서 어두운 숲길을 걸어갑니다. 어두운 숲길을 걸어가노라면 단테의 『신곡』 첫 구절이 생각납니다.

왕유가 선불교의 영향으로 그윽하고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면, 단테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깊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선조의 문화적 유산 위에서 생각하고 노래합니다.

 

인생길 반 고비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고

캄캄한 숲속에서 헤매고 있었네.

 

아, 이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며 완강했던지

얼마나 말하기 힘든 일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새로 솟는다.(주4)

 

중세의 사람들은 인생은 여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행 가운데서도 하느님과 천국을 향한 순례로 생각했습니다. 이 시는 단테가 35세가 되던 해로부터 시작됩니다. ‘인생길 반 고비’란 사람의 자연 수명을 70세로 본 성경의 기록을 받아들인 것입니다.(주5)

 

35세가 되던 해(1300)에 단테는 피렌체를 다스리는 여섯 명의 최고위원인 프리오레로 선출되었습니다. 득의양양하던 그때 단테는 쾌락에 얽혀들고 온갖 음모에 휘말려 순수한 세계를 잊고 죄와 죽음의 캄캄한 숲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거기에서부터 단테는 하느님과 천국을 향한 순례를 시작합니다. 

 

첫 6행은 읽는 사람에게 지옥의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인간적 구성과 시적 상징이 운율 속에서 빛납니다. 우리는 그 운율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단테가 되어 방황하고, 괴로워하고, 매달리고, 배우고, 마침내 빛에 다가갑니다. 비록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제정신을 차리고 부끄러움으로 겸허해진다면, 죄 역시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진 6. 끝없이 이어지는 백두대간.

 

백두대간의 산맥은 끝없이 이어지고 하늘은 한없이 높습니다. 억새와 갈대가 바람에 휘날립니다. 여행 가방을 챙기는 순간은 언제나 여행에서 가슴 떨리는 첫 순간입니다. 도시에서 멀어져 백두대간 기슭에 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한없이 기뻤습니다. 붉게 물드는 단풍을 보면 일순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갑니다.

돌아보면 수많은 날이 흘러갔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억지로 되는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절로 새싹 나고, 단풍 들고, 낙엽 지고 그리고 그 위로 세월이 흘러갔을 뿐입니다.

 

<각주>

1) 釋守净, 『偈二十七首』 : 流水下山非有意 片雲歸洞本無心 人生若得如雲水 鐵樹花開遍界春.

2) 『舊唐書』, 列傳 王維傳 : 在京師日飯十數名僧 以元談爲樂齋中無所有 唯茶鐺葯臼經案繩床而已.

3) 『全唐詩』 卷128 : (王維, 辛夷塢) 木末芙蓉花 山中發紅萼 澗戶寂無人 紛紛開且落.

4) 단테, 『神曲』, 지옥편 제1곡.

5) 『시편』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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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1976년 시). 전 대구시인협회 회장. 대구대학교 사범대 겸임교수, 전 영신중학교 교장.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저서로 『보물찾기』(시와시학사, 2000), 『납작바위』(시와반시사, 2012), 『글쓰기 노트』(집현전, 2018) 등이 있다.
jtsu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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