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엄마 덕분에 엄마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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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7 년 7 월 [통권 제5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972회 / 댓글0건본문
이달 초에 옛 친구들을 만났다. ㄱ은 만난 지 1년 남짓 되었고, ㄴ은 3년, ㄷ은 거의 10년 만이다. ㄷ이 외국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이렇게 모이기는 모처럼 만이다. 2년 전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연락을 못했기에 친구들의 핀잔으로 대화가 시작되었고 나는 그들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고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여자들의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가장 오랜만인 ㄷ에게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그녀는 결혼하고부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 시어머니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사상이 하나 있었으니, 이른바 남존여비 사상이다. 덕분에 그녀는 남편도 ‘모시고’ 살았단다. 시어머니 사상의 세례를 듬뿍 받은 남편은 외국으로 이민을 가서도 한 점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런저런 문제로 많이 다투면서도 아이들 때문에 참고 살다가 아이들이 졸업하고 취직하자 남편과 헤어졌다. 지금은 귀국하여 늙은 엄마한테 의지하고 있단다.
ㄱ과 ㄴ은 30년 넘게 한 직장에 다니는 전문직으로, 멀리서 보면 우아한 백조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떠 있기 위해 발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다. 그들은 친정엄마 없었으면 30년 직장 생활은 꿈도 못 꿨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둘 다 엄마와 한 동네에 산다. 애들도 봐주고 반찬도 해주어서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며 ㄱ이 결론짓듯 말했다.
“내가 이만큼 사는 것도 다 엄마 덕분이야.”
내가 말했다.
“내가 이거밖에 못 사는 것도 다 엄마 때문이야.”
누구 말이 더 맞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둘 다 맞는 말이다. 최순실을 엄마로 둔 정유라도 작년 언제쯤까지는 엄마 덕분에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호화를 누렸고, 이제는 엄마 때문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검찰에 불려 다니는 몸이 되었으니 말이다.
며칠 뒤에 또 다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열불이 나서 집에 앉아있을 수가 없다고 같이 산책이나 하자는 거였다. 만나자마자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딸 때문이란다. 대학생인 딸은 고등학교 때까지 이렇다 할 취미나 목표가 없었고 입시가 코앞인데도 전공을 결정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친구가 취직 잘 되는 과를 권했고 딸은 엄마 말을 듣고 진학했다. 문제는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학 들어와서야 확인한 것이다. 2학년이 되도록 적응하려고 노력했으나 잘 되지 않자 엄마 탓을 하는 바람에 모녀간에 가끔 전쟁을 치른단다. 그날도 서로를 탓하며 옥신각신 하던 중에, 딸이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엄마가 내 인생 망쳐놨어!” 하면서 울더란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친구가 “뭐? 니가 몇 살인데 인생을 망쳐, 이 ㄴ아!”(『고경』의 품격을 고려하여, 이어지는 친구의 발언은 생략한다.) 하고는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이 딸도 고비를 넘기고 제 갈 길을 찾아 자리 잡고 살다보면 “내가 이만큼 사는 것도 다 엄마 덕분이야.”라고 말할 날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모녀관계는 ‘덕분에’와 ‘때문에’ 사이 어디쯤엔가 있다. 다겁생에 빚지고 빚갚는 수고로운 관계이다. 나는 윤회나 전생 이야기를 들으면 아직도 긴가민가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전생의 나를 이생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데 다음 생에 개가 되든 벌레가 되든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다. 그래도 다음 생에 엄마를 만나 다시 빚지고 빚갚는 일을 반복한다고 상상하면 벌써부터 징글징글하다. 삼생을 두고 생각할 것 없이 이번 생만 해도 엄마가 딸에게 미치는 영향은 심대하다.
사람은 대부분 유아기에 성격이 결정된다고 하는데, 아이 성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환경은 역시 엄마이다. 한 예로, 아이는 기저귀를 갈아주는 엄마의 표정을 보며 느낌을 각인하고 반응한다. 매번 찡그리며 코를 막는 엄마였다면 아이는 뭔가 잘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지고 눈치 보는 사람으로 성장하기 쉽단다. 싸자마자 갈아주면 결벽증이 되고 뭉개도록 놔두면 분별없는 사람이 된다는 설도 있다. 빼다 박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엄마가 똥을 어떻게 치워줬느냐에 따라 성격이 정해지고, 성격은 인생을 좌지우지한다. 우는 거 말고는 별다른 발언권이 없는 나이에 어찌 항거해볼 수도 없이 엄마에 의해서 많은 것이 결정되는 것이다.
괴로운 인생은 누구 탓인가. 불교에 따르면 갓 태어난 아기도 백지처럼 순결하지는 않다. 이미 번뇌에 오염된 채로 어마어마한 전생의 업을 짊어지고 나온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현생에 겪는 이 모든 불편함에 대해 부모 탓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지한 중생의 처지에서 볼 때,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나는 엄마에게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부모은중경』에서 따왔다는 그 노래를 부를 때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가도, 이내 ‘그러게, 뭐 하러 애는 낳아놓느냐고. 이 고해 바다에….’ 이런 생각만 들었다.
며칠 전 『멀고도 가까운』(레베카 솔닛, 김현우 옮김, 반비, 2016)이라는 책을 읽다가, 저자가 치매 걸린 엄마 때문에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내는 대목에서 엄마 생각이 났다. 미국 이야긴데 어쩜 그렇게 여기랑 다를 바가 없을까.
아들도 있는데 돌봄은 딸 몫인 것도 같고, 치매 증상도 거의 같다. 집 안에서 자기 방을 찾지 못하고, 동네에서 길을 잃는데도 밖으로 뛰쳐나가려고만 했다. 의심이 많아져서 돈 7천원 어디다 숨겼냐며 간병인을 쫒아낸 적도 있고, 공격성이 발현되어 동네 분에게 전화해서 욕을 한 적도 있다. 사건사고가 연발되던 시절을 지나는 동안 엄마는 점점 쇠약해져 갔다. 힘이 빠지자 소위 ‘이쁜 치매’가 되었고, 정신연령이 한 자리 수로 내려가면서 사고치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래도 가끔 사고를 쳤을 때 주의를 준다는 것이 목소리가 커지면, 엄마는 왜 혼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야단맞는 것만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말갛게 쳐다보곤 했다. 그 얼굴이 떠오르면, 사라진 영상을 붙잡고 지금도 미어진다.
말년에는 주로 내가 빚을 갚는 쪽이었지만, 생각해보면 나도 엄마한테 진 빚이 크다. 그런 중에 고마운 점을 꼽으라면 결혼하라고 볶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엄마 친구들이 딸 시집 안 보낼 거냐고 걱정을 하면, 당신 자녀들이 결혼을 선택했듯이 얘는 결혼 안 하는 걸 선택했으니까 똑같이 축하해 달라고 했다. 한 분은 진짜로 구두 티켓을 주면서 축하해 주었다. 이런 엄마 덕분에 속 썩이는 남편도 없고 애 태우는 자식도 없으니 ‘천상천하 유아독신’이라고나 할까. 다음에 친구들을 만나면 ‘무자식 상팔자 턱’이라도 한 방 쏘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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