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성철 종정예하의 부처님오신날 한글법어 탄생 비화祕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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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4 년 6 월 [통권 제134호] / / 작성일24-06-05 13:16 / 조회2,153회 / 댓글0건본문
※ 6월호 목탁소리는 불기 2568년 5월 5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봉은사 법왕루에서 열린 제40회 백고좌대법회에서 하신 법문을 요약해 소개합니다.
백련암 오르는 돌계단 중간쯤에 비스듬히 서 있는 목련이 다른 곳은 이미 졌지만 이제야 하얀 꽃봉오리를 활짝 피웠습니다. ‘나무에 핀 연꽃’이라는 예명처럼 새하얗고 청초한 모습으로 백련암까지 걸어 올라오느라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식히며 다리 쉼을 하는 신도님들에게 “아이쿠, 먼 길 오시느라 애쓰셨습니다.”라고 대신 인사를 해주는 듯하여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산 아래 마을이나 도시에서는 다른 해보다 봄이 온 지도 모르게 훌쩍 지나가 버렸다며 아쉬워하며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운운하지만 나뭇잎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지고 가야산 솔바람은 여전히 청량함을 내뿜고 있는 계절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추대
1981년 1월 10일 아침의 일입니다. 아침 8시 30분쯤에 큰스님의 평생지기平生知己인 자운慈雲 큰스님께서 전화로 급히 성철 큰스님을 찾으셨습니다.
소납의 경험으로는 자운 큰스님께서는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직접 백련암으로 산길을 걸어오셨지 전화로 이야기를 하신 적은 없었던 기억이라 ‘종단에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직접 전화를 하셨을까?’ 걱정하며, 큰스님께 “자운 큰스님께서 급한 전화라고 하십니다.”라고 알려드렸습니다. 큰스님께서도 다소 긴장을 하시며 전화를 받으러 시자실로 나오셨습니다.
“뭐 가만히만 있으라고? 종단이 어려우니 안 한단 말은 하지 말라고? 그런 법이 어디 있노? 한마디 상의도 안 하고…?” 하시며 뒤의 음성은 잦아들었습니다.
백련암에서 아침에 전화 통화가 있고 난 후 12시 뉴스에 “성철 대종사께서 조계종 6대 종정에 추대되셨다.”라는 뉴스를 듣게 되었습니다. 1월 20일, 음력 12월 보름 서울 종정 취임식에는 가지 않으시고 결제 산중 대중법문을 마치시고 산중 어른 스님들과 소임자 스님들과의 모임을 가지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종정 안 한다는 말만 하지 말라고 해서 종정이 되긴 했으나 앞으로 산중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대중 스님들은 그리 아시고 정진에만 열심이기 바란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조계종 종정을 상징하는 주장자와 불자는 1월 21일 총무원장 성수스님께서 백련암으로 들고 오셔서 봉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언하신 대로 1993년 11월 4일 열반에 드실 때까지 끝끝내 산승山僧이기를 고집하시며 해인사와 백련암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일찍이 그 박학다식하심과 출가 후 16년 동안 벽곡(생식) 생활과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1940년 동안거 즈음에 오도송을 읊으신 후 장좌불와 10년, 1955년 5월부터 동구불출 성전암 10년 같은 철저한 수행승의 모습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셨거니와 그 독보적인 사상과 선풍禪風으로 불교계에 새로운 지평을 여신 성철 종정예하는 1967년 7월에 해인총림 방장으로 추대되신 후 줄곧 가야산 해인총림을 지켜오는 동안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으셨습니다.
공부하는 학인學人스님들의 방을 수시로 드나들며 소지품 검사를 하며 학인 대중 스님들을 잔뜩 긴장시키던 그 불같고 서릿발 같은 엄격한 가르침 덕분에 얻으신 별명입니다. 선원 스님들에게도 법랍을 가리지 않고 정진 중에 졸음에 빠질라치면 “밥값 내놔라!!” 하는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와 함께 등줄기에 죽비가 날아오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상하고 유머도 풍부하여 짐짓 장난스런 면모도 드러내시곤 하셨다 합니다.
조계종 종정이 되신 후 『선문정로』(81년 12월 15일)와 『본지풍광』(82년 12월 17일)을 출판하시고는 “부처님께 밥값 하였다.”라고 흔연해 하셨습니다.
부처님오신날 한글법어 탄생에 얽힌 이야기
성철 큰스님께서는 1981년 1월에 대한불교조계종 제6대 종정에 추대되시고 ‘첫 번째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소납은 큰스님께 “총무원에서 종정예하께서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법어를 내려주셔야 한다고 여러 번 전화가 왔습니다.”라고 보고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종정이 되어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하더니, 종정 고깔 씌워 놓고 할 일이 있기는 있나 보네.” 하시면서 심드렁한 반응이셨습니다. 소납도 마음속으로는 ‘총무원에서 부처님오신날 축하 법어를 요청해 올 터인데 어떻게 말씀드려야 좋을지…’ 하면서 걱정 아닌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던 시기였습니다.
총무원의 독촉 전화가 잦아지면서 소납은 ‘큰스님께서 산중에서 대중 스님들에게 법문하듯이 하는 부처님오신날 법어가 아니라 종정으로서 온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법어를 내리셔야 하는데 정말 큰일이네.’ 하는 조바심으로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종정예하로서 부처님오신날 법어는 꼭 쓰셔야 하는 일입니다. 총무원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래? 종정 고깔 쓴 값은 해야 된단 말이지. 그러면 한번 써 보지!”
다음 날 아침 종정예하께서 부르신다고 하여 달려갔습니다.
“이게 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법어다.”
그러시면서 내미시는 종이 한 장을 보니 옛 그대로 한문 투성이였습니다. 혼자 걱정해 오던 일이 눈앞에 벌어졌지만 이번에는 꼭 한 말씀 드려야겠다고 결심하고 용기를 냈습니다.
“종정예하 큰스님! 이제 종정예하께서는 옛날처럼 산중의 한 분 큰스님이 아니십니다. 해인사 방장 큰스님이 아닌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예하 큰 어른 스님으로서 불자들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부처님을 대신해서 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전 국민들 앞에 나서시는 공인이 되셨으니 한문 투의 말씀으로는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이걸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한글로 법어를 내려주셔야만 합니다.”
평소처럼 ‘곰새끼’라고 벼락을 치시리라 생각하고 또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까 하고 초긴장 속에 덜덜 떨고 있는데, 종정예하께서는 한참 말씀이 없으시고 침묵만 흘러갔습니다. 쏘아보는 화등잔 같은 눈길이 따갑다 싶은 순간을 이기려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라면 내가 다시 한번 써 보지!”
종정예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소납은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다행이다’ 싶은 마음에 등줄기에 땀이 후즐근하게 흘러내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종정예하께서 찾는다고 하여 가서 엎드리니 “이만하면 됐나? 니가 한번 봐라.” 하시며 메모지를 건네주셨습니다. 어제 원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여전히 반은 한글 반은 한문 투의 문장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수정이 된다면 내친김에 다시 한번 간청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보다 훨씬 낫습니다만 한문을 빼고 한글체로 완전히 바꾸어 주십시오!”
“그놈 참 사람 힘들게 하네, 이놈아! 이렇게까지 고쳐쓰는 데 밤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나, 이놈아! 평생 써 온 한문을 버리고 한글로 글을 쓰려니 문장이 영 허전하다 말이다, 이놈아! 음……, 그래, 다시 생각해 보지.”
종정예하께서는 고함을 치시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돌아서시는데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소납은 무수히 삼배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세 번째로 받아든 법어는 <생명의 참모습>이라는 주제의 법어였습니다. 상좌에게 졸려서 서툰 한글로 처음 쓰시는 한글 법어였습니다. 당신의 한문 문장에서 보이는 유려한 표현은 느껴지지 않아 아쉽긴 했지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 50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종정예하께서 당신의 고집을 버리고 한글로 부처님오신날 법어를 내리셨다는 의미만으로도 무궁무진한 공덕을 이루셨다는 생각에 저는 감지덕지할 뿐이었습니다.
제6대 종정에 추대되신 다음 해인 1982년 새해를 맞이하여 내리신 신년법어도 당연히 한글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부처님오신날 법어가 바로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이 애송愛誦하는 <자기를 바로 봅시다>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전부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는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모두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최인호 작가에게 충격을 준 성철 큰스님 한글법어의 한 문장
1991년 초겨울의 어느 날, 최인호 작가가 해인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마침 소납은 해인사 총무국장을, 무관스님은 교무국장 소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최 작가가 해인사를 찾아온 내용인즉슨 “지금 중앙일보에 경허스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길 없는 길>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 글 쓰는 것이 어찌나 힘이 드는지 글이 한 줄도 쓰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자료를 찾다 보니 ‘경허스님께서 1899년에 해인사에 퇴설선원을 개원하며 방함록을 만드셨는데, 그 서문을 경허선사께서 직접 쓰셨고, 그 방함록이 해인사문화유산으로 모셔져 있다.’라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경허선사의 친필도 친견하고 그 당시의 대중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선방에 자취를 남긴 스님들의 이름이라도 살펴보면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스님들께서 저를 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관스님께서 잠시 나갔다 들어오시더니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조금만 기다려 보시라고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30여 분이 지나서 담당자가 최 작가가 말한 방함록을 들고 왔는데, 정말로 경허스님의 친필 서문이 있는 방함록이었습니다.
최 작가는 무척 반가워하며 한 시간 가량 열람한 후 저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했습니다. 차담을 나누며 소납이 최 작가에게 물었습니다.
“사회에서 별들의 고향, 잃어버린 왕국, 지금은 길 없는 길 등 베스트셀러 소설을 쓰시는데 어느 대학 국문학과를 나오셨습니까?”
“아! 스님, 아닙니다. 저는 국문학과를 나온 것이 아니라 영문학과를 나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어느 대학을 나오셨는지요?”
“예, 저는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나왔습니다.”
“그러면 학번이 어떻게 되십니까?”
“예? 학번은 64학번입니다만 스님께서는 어떻게 학번이라는 단어를 아시고 제 학번을 물으시나요?”
“하하! 제가 연세대학교 정외과 63학번이라서 묻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호구조사를 하듯 말문이 트여 이 이야기 저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1982년 4월 어느 날, 최 작가는 심상한 일이 생겨 마음을 달랠 겸 가족들과 남도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대흥사 어귀의 신문 가판대에서 우연히 어느 신문을 꺼내 보는데 마침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게재된 <자기를 바로 봅시다> 법어를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글의 마지막 문단에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라는 구절을 보고 불교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형님! 우리 가톨릭에서는 모두가 하느님의 종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철 큰스님 법어를 따르면 중생 모두가 주인이지 않습니까?”
며칠 후 여행에서 돌아온 최 작가는 성철스님이 마치 아버지처럼 느껴져 여성지에 있던 성철스님 사진을 스크랩해서 글 쓰는 책상 앞에 5년 동안 붙여 두고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최 작가는 “저는 세상을 살면서 저보다 형뻘이면 형님, 동생뻘이면 아우로 호명을 통일해서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원택스님을 형님이라고 부를 터이니 대답이나 잘 하십시오.”라고 해서 박장대소를 하며 헤어졌던 기억입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형님! 시간이 있으면 예수님 전기를 한 번 꼭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철 종정스님에 대해서도 한 800매 정도는 쓰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동생이 먼저 하늘나라로 가서 아쉽고 아쉽습니다.
봉은사와의 인연, 영암 큰스님 다비식 준비
소납은 성철 종정예하의 시자로서 어느 산중의 큰스님이 열반에 드시면 종정예하의 추모사를 모시고 조문 사절로 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초겨울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날씨가 좀 쌀쌀했습니다. 어느 산중 큰스님의 다비식에 참석했습니다. 큰스님의 다비식이 진행되는 동안 소납은 ‘어떻게 하면 법구에 결례를 끼치지도 않고 대중들이 무료하게 기다리지도 않게 하면서 큰스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법답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민이 깊어가던 소납에게 결정적 힌트를 제공하는 다비식이 있었습니다. 1981년부터 봉은사 주지로 주석하고 계신 밀운스님께서 주도하신 영암 큰스님의 다비식이었습니다. 영암 큰스님은 1975년 봉은사의 주지를 맡아 오늘날의 봉은사가 있도록 큰 헌신을 하신 스님이십니다. 영암 큰스님께선 해인사 주지도 하셨고 원로위원도 하셨고 해서 해인사의 주지 임명 건 등의 일이 있으면 소납은 성철 방장스님의 시자로 올라와 전후를 보고드리곤 하였습니다.
1987년 6월 3일, 봉은사 회주로 주석하고 계셨던 영암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다는 소식을 듣고 해인사의 도감인 종성스님과 함께 봉은사로 문상을 왔습니다. 조문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다비 준비로 한창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종성스님! 영암 회주 큰스님 다비 준비가 굉장합니다. 내일이 출상일이라 하니 봉선사 다비장에 먼저 가 봅시다. 거기에 가면 재주꾼이신 밀운 주지스님에게 뭔가 배울 것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종성스님도 쉽게 “그렇게 하자.”라고 하여 봉선사 다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보니 그동안 여러 다비장에서 느꼈던 모든 문제점들이 말끔하게 정리된 다비장이 소납을 기다리고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봉선사는 예로부터 야산 지역이어서 해인사에서 사용하는 통나무를 쓸 수 없어서 나무가 아닌 짚으로 다비하는 곳으로 유명하였습니다. 다비장에 가 보니 화장장의 화구처럼 법구가 들어갈 만큼의 직사각형 헛집을 미리 지어 놓고 그 주위에 화장목 대신 ‘새끼 두 타래에 숯 한 포’ 하는 식으로 숯과 새끼 타래를 들녘의 볏가리처럼 차곡차곡 둥글게 쌓아 놓아 언제든지 거화를 할 수 있게 해 두었습니다. 그동안 다비식에서 거화擧火까지 2시간 여 동안 참여 대중들이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던 그 단점을 밀운스님께서 깨끗이 해결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여기 오길 참 잘했습니다. 산중 다비장 문제는 다 해결되었습니다.”라고 종성스님께 기쁜 듯이 말씀드리니, 스님께서도 “모든 걱정이 다 해결되었습니다.”라고 화답해 주셨습니다.
1993년 11월 4일 퇴옹당 성철 종정께서 열반에 드시고 7일장을 마치고 잘 꾸며진 연화대에서 그렇게 많은 군중들이 하루 종일 밀고 밀려가도 행사가 그렇게 장엄할 수 없고 다녀간 모든 분들이 어느 한 분의 죽음이 아니라 극락왕생하시는 한 도인을 성스럽게 환송하는 엄숙한 자리였음에 모두들 감격하였던 행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밀운 주지스님께서 영암 큰스님의 다비식을 통해 우리 후배들에게 보여주신 큰 선물로 소납은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봉은사에 오니 예전의 일들이 새삼 어제 일처럼 느껴집니다.
상좌의 고언을 받아주신 은혜
다시 성철 종정예하의 ‘부처님오신날’ 한글 법어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성철 종정예하의 한글법어는 재가불자는 물론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그 반응이 정말 뜨거웠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불교의 정수가 담긴 내용을 한문 투가 아닌 한글로 쓰셔서 누구나 친근하게 다가가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특히 <자기를 바로 봅시다>는 종교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깊이 돌아보도록 했습니다.
소납은 큰스님께서 조계종을 대표하는 공인으로서 불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에게 부처님을 대신하여 한 말씀 하시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선 쉬운 한글체로 법어를 내리셔야 남북의 8천만 동포들이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간언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동안 ‘곰새끼’라고 나무라기만 하시던 상좌의 고언을 받아들여 2~3일 퇴고 끝에 한글법어를 내려주신 성철 종정예하의 시대의 변화에 순발력 있게 대처하시는 모습은 존경스럽고 존경스러우며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몸에 전율이 흐릅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나는 종정이 되었어도 해인사 산중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도 평생 지켜 주셨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특히 서울에 계시는 신도님들께서 “아무리 그렇지만 어떠한 종정 스님도 서울에 오셔서 우리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시고 법문도 자주 하셨습니다. 성철 종정께서는 너무 하십니다.”는 원성이 높아 갔습니다. 저도 조바심이 나서 종정예하께 신도님들이나 스님들의 뜻을 전해 드리면 묵묵하시다가 “이놈아! 니도 한편이가? 서울 올라가서 대중 앞에서 떠드는 것보다 해인사 산중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더 힘든 일인지 니도 모르나 보네.” 하시며 낙담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열반에 드신 후 해인사 주변에서 일어난 방광 현상이며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다비식과 사리 친견법회는 저에게 아직도 큰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느새 산야는 푸른 물결로 출렁이고 슬슬 훈풍이 불어오더니 차분히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저 멀리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어둠 사이로 오색 연등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올해엔 어떤 법문이 불자는 물론 국민들의 심금을 울릴지 기대가 되면서도 ‘곰새끼’ 상좌의 말을 경청해서 과감히 한문을 버리고 한글로 법어를 내려주셨던 나의 은사인 성철 큰스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를 드리며 다시 한번 “자기를 바로 보라.”고 하신 큰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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