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일본 불교건축사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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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3 년 9 월 [통권 제125호] / / 작성일23-09-04 20:06 / 조회2,352회 / 댓글0건본문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32 | 이토 츄타
이토 츄타伊東忠太(1867~1954)는 메이지 시대 후반부터 활동한 일본의 건축가, 건축사가이다. 도쿄외국어학교, 제1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공학박사, 도쿄제국대학 명예교수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인물이기도 하다.
사진 1. 만년의 이토 츄타.
하지만 이런 단순한 약력만으로는 이토 츄타의 활동업적과 후대의 미친 영향력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일본 최초로 고건축을 보존해야 할 문화재로 선정한 인물, 미술사와 건축사의 학술적 용어 규정을 한 인물, 그 유명한 「호류지 건축론」을 발표한 인물, 운강석굴을 처음 발견한 인물, 헤이안신궁平安神宮(1895)과 메이지신궁明治神宮(1920)을 조영한 인물 등 이토 츄타를 대변하는 수많은 표현이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을 소개하기에는 지면 관계상 무리가 있고 이번호에서는 이토를 상징하는 「호류지 건축론」과 운강석굴 발견 과정을 소개하겠다.
호류지 건축론
이토 츄타는 대학원에 진학한 다음해에 「호류지 건축론」(1893) 초고를 발표했다. 이토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다. 이 논문은 향후 오랫동안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사상에 영향을 끼친 글이기도 하다. 호류지 건축론의 핵심은 엔타시스 양식의 기원설이다. 이토는 호류지法隆寺 중문의 기둥 가운데가 볼록한 것(배흘림기둥)은 그리스 건축의 엔타시스 양식과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호류지 중문 기둥은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한 문명이 동서 문화교류를 통해 일본에까지 전해진 증거라는 것이다.
더해서 호류지와 에트루스칸(Etruscan) 신전의 구도와 비례를 비교해 두 건물의 유사성을 찾아내려 했다. 호류지의 기단을 신전과 같은 높이로 전제하고, 지붕의 기울기가 유사하다고 했다. 이토는 1892년 대학 졸업작품으로 고딕성당을 제출하는 등 당시 유럽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중세부흥주의(Gothic Revivalism)에 대해 연구를 지속했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과 그리스와의 연관성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구체적인 증명이나 설명 없이 서양문명의 연결선상에 호류지가 있고, 서양문화와 비교해 일본문화가 뒤떨어지지 않고 동등하다는 호류지관法隆寺観을 제시했다. 이토의 호류지관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일본이 지리적으로 서양과 동떨어져 있지만, 일본문화의 근원은 서양문명의 근원인 그리스에서 왔다. 따라서 일본은 미개한 아시아 국가들과는 다르고 선진문명국인 서양과 발맞추기 위해서는 지리적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시각이 기저에 깔려 있다. 이토의 시각은, 물론 모든 미술사와 예술사가 그 기저에 내셔널리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일본의 학계와 일본인이 아시아와 서양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근간이 되었다.
이토의 「호류지 건축론」은 그가 세계건축여행을 떠나기 전에 초고(1893)를 포함해 3번에 걸쳐 발표되었다(1896, 1898). 「호류지 건축론」에서 그는 호류지 건축을 ‘일본건축의 기원’, ‘동양미술의 정수’로 평가하면서 건축 역시 미술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해서 세간에 건축의 아름다움을 이해시키는 것이 집필 목적이라고 밝혔다. 즉, 그는 일본건축의 아름다움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호류지를 사용했다. 특히 호류지 불탑과 다른 불탑을 비교하면서 호류지 불탑을 “형식과 변화가 풍부하고 수법이 지극히 웅건하다.”라고 기술해 호류지를 일본미술의 정수에 위치시켰다.
흥미로운 점은 츄타가 세계건축여행에서 귀국한 후에는 호류지의 엔타시스 양식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시기 그는 여행에서 기록하고 채집한 자료들을 모아 『시나 건축 장식』(1941-45, 전5권)을 간행하거나 ‘건축진화론’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발표했다. 츄타가 이러한 스탠스를 취한 까닭은 인도나 서아시아에서 엔타시스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연유가 크다. 더해서 일본 내에서 호류지 재건론의 논쟁이 일면서 고건축에 대한 학문적 풍토가 실증주의로 바뀌었고, 따라서 엔타시스 루트가 무용지물이 된 것 역시 한몫을 했다.
운강석굴 발견
1901년 7월, 이토는 일본인 처음으로 중국 자금성의 실측조사를 실시했다(34세). 자금성 조사에 대한 결과물은 츄타의 『도청일기渡淸日記』 (1898), 『자금성실측장紫禁城實測帳』(1901)으로 출간되었다. 자금성 조사로부터 6개월이 지난 1902년 3월, 이토는 본격적인 조사를 위해 세계건축물 견학을 떠났다. 1902년부터 1905까지 3년 3개월간 지속된 이 여행의 첫 번째 목적은 도쿄 제국대학의 교수 승격이었다. 당시 제국대학에서는 유럽과 미국 연수를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교수 승격의 의무사항이었다.
이토는 아시아를 견학한 후 서구를 통과해서 귀국한다는 조건으로 문부성과 제국대학의 허락을 받았다.
세계건축물 견학은 중국, 버마, 인도, 스리랑카, 터키, 이집트, 시리아, 그리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아메리카의 순으로 이루어졌다. 견학 일정은 중국에서 15개월, 인도 등지에서 9개월, 터키 이집트 등에서 10개월, 유럽과 미국에서 5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토는 견학 일정을 지역별로 균등하게 체류기간을 배분하지 않고, 본인의 관심 여부에 따라 유동적으로 진행했다.
사진 4. 운강석굴 전경. 사진: 위키피디아.
이 여정에서 최고의 성과는 운강석굴 발견일 것이다. 1902년 6월 16일, 이토 일행은 대동大同에 도착하여 이틀 후 지현知縣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운강석굴을 발견했다(1902년 6월 18일경). 그는 운강석굴을 발견한 후 조사노트에, “운강석굴의 불상, 장식, 문양 등이 호류지와 같으며 토리파 불상과 부합하다.”고 기술했다. 더해서 ‘호류지 불상의 고향을 찾았다’고 기술해 호류지 불상의 연결점으로서 운강석굴을 거론했다.
“불상의 모습, 장식 수법, 문양 등은… 실로 우리 호류지식과 똑같다. 토리불사鳥仏師의 작품과 부합하다. 벽화와 같은 형태이고 금당의 건축기법과도 부합한다. 실로 의외 중의 의외이다. 나는 호류지의 고향을 알게 되어 너무 기쁜 나머지 점심을 먹는 시간도 아까워 오후 5시가 넘을 때까지 단번에 조사했다.”
-이토 츄타, 「필드노트」 중에서-
“운강석굴의 건축적 성질은 돈황과 비교하면 중국적 취미가 더해서 지붕, 기둥, 장식문양 등이 호류지와 부절符節을 맞춘 부분이 적지 않다. 희랍계와 비교해 보면 코린트식 및 이오니아식 기둥머리[柱頭]가 있고, 기둥은 거칠지만 엔타시스적 느낌이 있다. 간다라 양식으로 인정할 만한 제형미梯形楣, 중인도 전래로 볼 수 있는 두공이 있다. 기원은 명료하지 않지만, 서역계의 꽃문양이 있다. 돈황의 천개는 호류지식 천개에도 적용되었다.”
-이토 츄타, 『일본불교건축의 원류』(193-) 중에서
이토는 운강석굴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을 개별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다른 지역과의 비교 대상으로서 바라봤다. 운강석굴은 돈황과 중국 고유의 수법이 더해진 것이고, 의장은 서아시아식이라는 것이다. 용문석굴이 정련된 형태라면 운강은 조말하다. 하지만 용문에는 없는 코린트식과 이오니아식 기둥이 있음을 언급했다. 이토가 운강석굴을 설명하면서 굳이 코린트식과 이오니아식을 언급한 연유는 운강석굴이 호류지의 종착점이 아닌 경유지임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이토가 그의 필드 노트에 호류지 불상의 고향을 찾았다고 한 것은 원류를 찾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발점으로서 운강석굴이 아닌 서역[간다라]에서 시작해 운강석굴을 거쳐 호류지에 이르는 엔타시스의 루트를 찾았다는 의미이다.
세계건축여행 후, 이토는 ‘건축진화론’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했다. 그의 학설에 의하면, 건축의 재료는 육체와 의장[정신]으로 이루어졌는데 의장은 국격이나 역사성, 내셔널리티를 의미한다. 건축을 예술화하는 것이 양식이고 그 양식을 형성시키는 것이 국민의 기호[嗜好, 내셔널 테스트]라는 시각이다. 이러한 관점 안에서 이토는 호류지를 예술건축의 최정상에 위치시켰다. 그의 시각은 일본이 서구에 속하지 못하는 계통과 지리적 한계가 있지만, 이를 뛰어넘는 역사적 우수성이 건축에서 드러난다는 자신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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