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 이야기]
꿈 없는 멋진 잠 같은 멸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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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 2018 년 11 월 [통권 제6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226회 / 댓글0건본문
불교에는 멸진정滅盡定이라는 매우 어려운 낱말이 있다. 낱말 뜻도 어렵지만, 낱말이 가리키는 사태의 체험은 더더욱 어렵다. ‘멸진’은 번뇌가 소멸되어 사라짐을 말하니, 열반 곧 죽음을 가리킨다. ‘멸진정’은 마음[心]과 마음작용들[心所]이 소멸되어 사라진,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은 상태의 선정을 말한다. 물론 멸진정은 죽음도 아니고 잠도 아니다. 그럼에도 잠과도 유사하고 죽음과도 유사하다. 죽음이 잠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는 청소년을 오도했다는 죄목과 신에게 불경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후 재판관들 앞에서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고 한다:
“죽는다는 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죽는 사람이 완전히 소멸되어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거나, 어떤 변화가 일어나 영혼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만약 죽음이 감각을 상실하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꿈 없는 잠이라면, 죽음은 참으로 멋진 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고난 밤을 골라, 그 밤을 자기 일생의 나머지 모든 밤낮과 비교해본다고 칩시다. 그 사람에게 일생에서 이 하룻밤보다 더 멋지고 즐거운 밤을 몇 번이나 보내 보았는지 말해보라고 한다면, 평범한 사람만이 아니라 위대한 왕마저도 다른 날과 비교해서 아주 편하게 보낸 밤이 몇 번이나 되는지는 금세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이 이런 것이 라면, 저는 감히 죽음은 상[賞]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내세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편안한 하룻밤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주1)
죽음은 두 가지 중에 하나일 텐데, 그 중 하나는 영원한 안식을 얻는 일이고, 이것은 꺼려하거나 피할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른 세계로 이동해 가는 일인데, 이것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한편, 죽음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가는 것이고, 죽은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재판관 여러분, 그 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 이곳에서 내가 해 온 바와 마찬가지로, 저승에서도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사람들을 관찰하여 그들 가운데 누가 지혜롭고, 사실은 지혜롭지 않으면서 지혜로운 체하는지를 밝혀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주2)
죽음이 내세로 이동해 가는 것이라면, 내세에서 금세에서와 같이 사람들과 문답하고 토론하면서 지혜를 겨룰 수 있으니, 이 또한 꺼려하거나 피할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담담하고 의연하게 독배를 마실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살아서 얻는 안식으로서 죽음과 같고 잠과 같은 안식도 추구한다. 그런 안식이 곧 멸진정이다. 선정을 “죽음 같은 상태”라고 말했다고 해서 불쾌해 할 일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죽음은 “꿈 없는 잠”이나 “참으로 멋진 잠”일 수 있으니 말이다. 살아서 얻는 ‘꿈 없는 멋진 잠’ 같은 상태가 멸진정이라면, 이것은 희망할만한 것이지 않겠는가?
희망할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 멸진정이기도 하다. 왜냐면 많은 노력을 들이는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단계를 4선8정四禪八定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8해탈八解脫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8해탈에 대한 설명이 이해하기에 다소 덜 어렵기 때문에 이를 택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가 잠에 들지 못하는 이유는 번민이 있고 번민이 머릿속에서 소설 쓰기(자초지종에 대한 인과적 분석이나 가설적 해석)를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번민에서 벗어나 소설쓰기를 중단하고 잠에 들 수가 있을까? 한 예로 헤어졌으나 잊지 못하는 여인이 있어 그 여인과 자신에 대한 소설쓰기로 잠에 들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이 권유하여 잠에 들도록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1. 잊지 못하고 있는 과거의 여인을 부정한 여자로 생각하라.
2. 길거리에 보이는 현재의 여인들도 부정한 여자로 생각하라.
3.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청정한 모습이 모든 사람의 본래 모습이라 생각하라.
4. 사람과 사물이 모두 사라지고 단지 무한하게 텅 빈 허공을 생각하라.
5. 텅 빈 허공을 따라 마음도 무한하게 텅 비었음을 알아차려라.
6. 마음이 무한히 텅 비었음을 알아차린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단지 텅 빔을 유지하라.
7. 텅 빔의 유지가 생각함도 아니고 생각하지 않음도 아님을 이따금씩 알아차려라.
8. 이제는 이따금씩 알아차림도 없이 텅 빔 속으로 완전히 들어서라
제1해탈
내유색상 관외색 해탈 內有色想觀外色解脫
마음 안에 색상(色想, 대상을 탐하는 생각)이 있어, 이를 버리기 위해 부정不淨한 푸르죽죽한 피고름 등의 외적인 대상을 관찰하여 색상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이는 부정관不淨觀으로 색탐을 제거하는 것이다.
제2해탈
내무색상 관외색 해탈 內無色想觀外色解脫
마음 안에 색상이 없지만, 이 상태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부정한 외적인 대상을 관찰하여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이것 역시 부정관으로 색탐을 제거하는 것이다.
제3해탈
정해탈 신작증 구족주 淨解脫身作證具足住
청정淸淨한 대상을 관찰하여 탐심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몸으로 증득하여 갖추고서 원만하게 머문다. 이것은 청정관에 의해 색탐을 제거하는 것이다. 정해탈은 색계의 끝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비록 대상의 모습을 취할지라도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탁월하다고 한다.
이것은 8해탈의 의미를 필자가 임의로 먼저 풀이해 본 것이기도 하다. 저 8가지 중에서 처음의 3가지는 색계色界에서의 4선四禪, 곧 4정려(靜慮, 고요히 사려함)와 관련된 것들이다. 4정려에서 나타나는 3해탈을 어려운 말을 사용해 도표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해탈’은 ‘버려서 등지거나’[棄背] ‘싫어하여 등지는’[厭背]것을 말하는데, 제1해탈과 제2 해탈은 부정관으로 색탐의 마음을 버리는 것이고, 제3해탈은 부정관의 마음을 버리고 청정관을 유지하는 것이다. 제1해탈은 4선四禪 중의 제1정려에, 제2해탈은 제2정려에, 제3해탈은 제4정려에 해당한다. 제3정려에 해당하는 해탈은 없는데, 그 이유는 제3정려에서는 색탐이 존재하지 않아서 단지 자기 처지[離喜妙樂地]의 미묘한 즐거움[妙樂]에 의해 어지럽혀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4해탈
공무변처 해탈 空無邊處解脫
대상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허공이 무한함을 주시하는 선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제5해탈
식무변처 해탈 識無邊處解脫
허공이 무한함을 주시하는 선정을 버리고 마음이 무한함을 주시하는 선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제6해탈
무소유처 해탈 無所有處解脫
마음이 무한함을 주시하는 선정을 버리고 존재하는 것이 없음을 주시하는 선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제7해탈
비상비비상처 해탈 非想非非想處解脫
존재하는 것이 없음을 주시하는 선정을 버리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상태의 선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제4해탈부터 제7해탈까지는 무색계에서의 4정定에 관련된 것인데, 다음과 같다:
이 네 가지 해탈에 관련된 4정이란 제1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제2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제3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제4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말한다. 이러한 4해탈은 각기 자기 아래 처지[下地]의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마지막의 제8해탈은 대상을 갖는 마음과 마음작용(심·심소)을 버리는 것인데, 다음과 같다:
제8해탈
멸수상정해탈 신작증 구족주 滅受想定解脫身作證具足住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를 몸으로 증득하여 갖추고서 원만하게 머무는 것이다. 이것은 무색계의 끝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상수멸想受滅 해탈로도 불리며, 마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몸의 힘으로 선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제8해탈을 이루는 곳이 바로 멸진정이다. 세친은 멸진정에 들어서는 것과 나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受와 상想을 싫어하여 등지고서 이것을 일으켰기 때문에, 혹은 소연을 갖는 법(有所緣, 즉 심·심소)을 모두 싫어하여 등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멸진정은 해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 나중에 멸진정으로부터 나올 때에는 간혹 유정지有頂地[유정의 최고 정상의 처지, 곧 비상비비상처에서 청정한 선정[淨定]]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간혹 무소유처에서 무루 선정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와 같이 멸진정에 들어가는 마음은 오로지 유루이지만, 유루와 무루의 마음[을 통해 멸진정]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주3)
표현만으로 보면, 수受와 상想을 싫어하여 혹은 대상을 갖는 심·심소를 싫어하여 멸진정에 들어가므로 들어가는 마음은 유루의 마음이고, 유루 선정이나 무루 선정의 마음을 일으켜 멸진정에서 나오므로 나오는 마음은 유루와 무루에 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 표현이 가리켜 보이려는 사태는 알기가 어렵다. 필자는 다만 비유를 통해 그 사태를 짐작해 볼 뿐이다. 밤이 되어 정진을 그치려고 잠에 드는데, 잠에서 깨어날 때의 마음은 오늘도 정진하겠다는 생각의 유루심이거나 오늘 할 일을 다만 무심하게 떠올리는 무루심이라는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주)
(주1) J.F. 비얼레인·현준만 옮김, 『세계의 유사신화』, 세종서적, 2000년, p.306.
(주2) 위의 책, pp.306∼307.
(주3) 『阿毘達磨倶舍論』, T1558_.29.0151b18-b25: 厭背受想而起此故. 或總厭背有所縁故. 此滅盡定得解脱名. […] 從滅定出或起有頂淨定心或即能起無所有處無漏心. 如是入心唯是有漏. 通從有漏無漏心出. 세친, 『아비달마구사론』(전4권), 권오민 역주, 동국대학교 부설 동국역경원, 2002, pp.1329∼1330.
병령사 석굴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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