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조와 조론]
1. 『조론』은 어떤 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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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조병활) / 2018 년 6 월 [통권 제6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203회 /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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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진(後秦. 384∼417)시대를 살았던 승조(僧肇. 384∼414)가 저술한 『조론(肇論)』은 「종본의(宗本義)」·「물불천론(物不遷論)」·「부진공론(不眞空論)」·「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 동진의 은사(隱士) 유유민이 쓴 「질문 편지」, 승조의 「답변 편지」 등으로 구성된 책이다. 승조(僧肇)의 이름 가운데 「조(肇)」자를 따 책 이름을 『조론(肇論)』이라 했다. 승조가 지은 논문 묶음이라는 의미다.
인도불교 중관파의 개조 용수(150∼250)와 서역 쿠처(庫車. 구자국) 출신 명승(名僧)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의 반야중관사상을 계승한 승조는 『조론』으로 중국불교 삼론종(三論宗) 개창에 사상적 길을 제공했고, 인도와 중국사상의 교류 및 범어(梵語)와 중국어의 독창적 해석에 새로운 모범을 보였다. 『조론』은 중국사상발전사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실재론적인 노장철학의 무(無)·유(有)개념으로 형이상학적 논의를 진행하던 위진현학(魏晉玄學)의 물줄기를 성공(性空)에 기반한 공(空)·유(有)사상을 탐구하는 수당불학(隋唐佛學)으로 돌리는 인도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기까지 활동했던 운서주굉(1535∼1615)·자백진가(1543∼1603)·감산덕청(1546∼1623)·우익지욱(1599∼1655) 등 사대고승 가운데 한 명인 우익지욱(藕益智旭)은 각종 경전과 논서들을 열람하고 지은 『열장지진(閱藏知津)』에서 “중국에서 찬술된 저서 가운데 승조·남악혜사·천태대사의 것이 유일하게 순일하고 순일하다. 진실로 인도의 마명·용수·무착·세친 보살 등의 저술에 비해도 부끄럽지 않다. 그래서 특별히 대승종론에 포함시켰다. 나머지 여러 스님들의 저작들은 순일한 맛은 있으나 흠이 있기에 단지 잡장에 넣었다.”며, 승조를 인도의 마명·용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기록했다.
중국의 정사(正史) 이십사사(二十四史) 가운데 불교와 도교에 관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는 『위서(魏書)』권114 지제(誌第)20 『석노지(釋老誌)』에서도 구마라집과 승조를 높이 평가했다.
“그 때 후진 왕 요흥은 구마라집을 존경했다. 장안 초당사에 교리를 연구하는 사문 8백여 명을 소집해 경문을 새로이 번역시켰다. 구마라집은 총명하고 또한 깊은 사상이 있었다. 인도와 중국 등 여러 말에 능통했다. 당시 사문 도융·승략·도항·도표·승조·담영 등은 구마라집과 서로 상의하고 탁마하면서 부처님 가르침의 깊은 뜻을 밝혔다. 10여 부 경전과 논서의 문장과 구절을 가다듬었으며, 말의 뜻을 드러내 통하게 했다. 지금도 여전히 불교도들이 익히는 경전가 논서가 이것들이다. 도융 등은 모두 학식이 대단히 넓고 깊었다. 그 가운데서도 승조는 특히 뛰어났다. 구마라집이 글을 쓰고 경전을 번역할 때, 항상 승조가 붓을 잡고 기록했으며, 여러 단어와 문장의 뜻을 확정했다. 유마경을 주석한 『주유마경』 등 (승조의) 저술이 수십 여 종에 이른다. 저술들에 절묘한 의미가 담겼기에, 불법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이 전부 승조를 스승으로 존경했다.”
역사서가 출가자에게 이처럼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중국불교사에서 승조가 차지하는 위치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서안 초당사에 있는 구마라집의 사리탑
모든 사람들이 스승으로 존경했다는 승조에게 반야중관사상을 정확히 가르쳐 준 구마라집은 401년 음력12월 후진의 수도 장안(현재의 서안)에 도착, 국가적인 후원과 오늘날 과학자들의 협동 연구 작업을 방불케 하는 고도로 조직화 된 팀 등을 두 축으로 삼아, 체계적인 경전 번역에 착수했다. 장안에 도착하기 전 머물렀던 감숙성 고장(姑藏)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무위현(武威縣)엔 불법을 전파할 여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었다. <고승전> <구마라집전>에 보이는 “구마라집이 양주에 체류한 지 여러 해, 여광(呂光)과 아들 여찬(呂纂)이 불법(佛法)을 홍포하지 않았다. 불교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갖고도 가르침을 펴고 교화할 수 없었다.”는 기록에서 정황을 알 수 있다.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탁월한 학승인 그가 고장에 머무른 데는 사정이 있었다.
서기 382년 전진(前秦)의 부견(苻坚. 338∼357∼385)왕은 장군 여광(呂光)을 서역에 파견했다. 이미 사해(四海)에 이름이 쟁쟁한 명승(名僧) 구마라집을 구자(龜玆)국에서 장안으로 모셔오기 위해서였다. 서역 여러 나라의 조공을 받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구마라집을 데려오자는 계획은 도안(道安. 312∼385)의 건의에 따른 조치였다. 『고승전』「도안전」에 “도안은 구마라집이 서역에 있다는 소식을 먼저 들었다. 경론을 함께 강의하고 그 뜻을 토론하고 싶었다. 매번 부견 왕에게 구마라집을 모셔올 것을 권했다.”는 기록에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도안이 건의하기 전에 부견은 이미 구마라집을 만날 생각이 있었다. 『고승전』「구마라집전」에 보이는 “전진 건원 13년(377) 정축년 정월에 태사가 아뢰었다. ‘정축년 정월의 별자리와 상응하는 외국의 어느 곳에 별이 나타났습니다. 필시 덕이 높은 지혜로운 분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보좌하게 될 것입니다.’ 부견왕이 말했다. ‘짐이 들으니 서역에 구마라집이, 양양에 도안이라는 사문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들이 아니겠는가?’ 즉시 사신을 파견해 그들을 찾게 했다.”는 구절이 이를 증명한다. 전진(前秦)의 10만 대군이 양양을 공략하고 68세의 도안을 장안으로 데려간 것이 379년, 부견은 377년에 이미 구마라집과 도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도안의 건의가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초치(招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383년 음력8월 안휘성 비수(淝水) 부근에서 벌어진 동진과의 전투에서 부견의 90만 대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비수대전이 끝난 후 2년만인 385년 음력8월 부하였던 강족(羌族) 요장(姚苌)이 부견을 살해하고 그의 나라마저 위협했다. 결국 저족(氐族) 부홍(苻洪. 285∼350∼350)이 350년 장안에 건립한 전진은 394년 역사에서 사라진 반면, 부견의 신하였던 선비족(鮮卑族) 모용수(慕容垂)는 지금의 하북성 정현(定縣)에서 후연(後燕. 384∼407)을, 요장은 장안에서 후진(後秦. 384∼417)을 각각 세웠다.
서역을 떠나 장안으로 향하던 여광(338∼386∼399)은 감숙성 양주(凉州)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서 자립해 후량(後凉. 386∼403)을 세우고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광은 본래 구자국에 머물고 싶어 했다. 송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1084년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권제106 진기(晉紀)28에 관련 기록이 전한다.
"구자국이 풍족하고 안락하기에 여광은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생각이었다. 천축 사문 구마라집이 여광에게 말했다. ‘여기는 흉조와 망조가 든 땅입니다. 오랫동안 머물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장군은 동쪽으로 회군하다보면 중간에 유복한 땅을 만날 것인데, 거기에 머무르면 됩니다.’ 이에 여광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큰 잔치를 열고 머무를 것인지 회군할 것인지를 토론하게 했다. 모든 이들이 돌아가고 싶어 했다. 2만 마리의 낙타에 서역의 보배들을 싣고 1만여 마리의 준마를 몰아 동쪽을 향해 회군했다.”
구마라집이 조국을 “흉조와 망조가 깃든 땅”이라고 말한 이유는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에 오래 머무는 것이 싫은 것 외에도, 장안에 들어가 불교를 포교하고픈 생각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고승전』「구마라집전」에 눈에 띄는 기록이 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가 인도로 돌아가면서 그에게 말했다. ‘대승의 심오한 가르침을 마땅히 진단(중국)에 크게 알려야 한다. 동토에 그 가르침을 전하는 것은 오직 너의 힘에 달렸다. 다만 너 자신에겐 그것이 이익이 없다. 어떻게 할 것이냐?’ 구마라집이 대답했다. ‘대승보살의 가르침은 자신의 몸을 버려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가르침을 널리 전파 해 몽매한 습속을 씻어 없애고 깨닫게 할 수 있다면, 모름지기 저의 몸이 난로와 가마솥에 들어가 태워지고 삼기는 고통을 당해도 원한이 없을 것 입니다.’ 이에 구마라집은 구자국의 신사에 머물렀다.”
그런데 구마라집이 장안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여광이 죽은 후 서자(庶子) 여찬(呂纂. ?∼399∼401)이 형제 여소(呂紹)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계승했어도 열리지 않았다. 후진의 2대 왕 요흥(姚興. 366∼394∼416)이 여찬을 격퇴하기까지 무려 18년 동안, 구마라집은 양주에서 중국의 말과 문자를 배우며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승조는 『조론』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인도 출신의 사문 구마라집은 어려서 대승의 여러 경전들을 연구했고, 반야학의 깊은 뜻을 파헤쳤다.
언어문자의 표면적 의미를 홀로 넘어서고, 보고 듣는 수준을 뛰어넘는 현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인도 여러 나라의 그릇된 학설들을 평정했을 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진실한 반야지혜의 바람을 불어오게 했다. 진리의 불을 다른 지방에 옮기고자 노력하다 양주에서 빛을 감추고 있었는데, 이는 진리를 전파할 때는 당연히 시절인연에 부응해야 하고, 시절인연의 도래에는 반드시 연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홍시3년(401) 음력12월 후진이 구마라집의 입국을 준비하고 군사를 일으켜 그를 장안에 모셔왔는데, 이는 하늘의 뜻이자, 운명이 그러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선 준비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구마라집이 후진(後秦)에 들어오기 전인 384년 장(張)씨 성을 가진 장안의 한 빈한한 집에 아이가 태어났다. 승조다. 생계를 위해 승조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 글을 써주는 일을 했다. 책을 베껴 써 주는 일을 하다 여러 경서들을 두루 읽었다. 그는 노자와 장자 관련 서적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일찍이 『노자』를 읽은 뒤 “(내용이) 좋기는 좋으나, 정신이 머무르고 세속의 번뇌를 털어내는 방법이 되기에는 오히려 부족함이 있다.”고 탄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삼국시대(220∼280) 손권이 세운 오나라에서 활동한 지겸이 번역한 『유마경』을 읽고는 머리로 그 책을 받들며 기뻐했다.
그리곤 “비로소 귀의할 곳을 찾았다.”며 출가했다. 타고난 총명으로 대승의 여러 경전과 율장·논장을 두루 섭렵했고, 20세쯤엔 이미 관중지방(지금의 섬서성) 일대에 이름을 드날렸다. 명성이 높아지자 시기심 많고 논쟁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양식까지 짊어지고 찾아와 도전했다. 그러나 승조의 예리한 논변에 상대방이 격퇴되는 것이 정해진 결론이었고, 승조의 명성을 올려주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었다. 후일 구마라집이 고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스스로 찾아가 그를 스승으로 모셨고, 구마라집 또한 승조를 지극히 아꼈다. 그러다 401년 스승을 따라 다시 고향 장안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장안에 온 구마라집은 401년부터 405년까지 후진왕 요흥의 별장격인 궁사(宮寺. 소요원)에 머물렀다. 406년부터 413년까지는 초당사(草堂寺. 大石寺·大寺라고도 함)에 주석했다. 장안에 도착한 구마라집을 요흥은 어떻게 대우했을까?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14 진기(晉紀) 36에 당시 상황을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후진왕 요흥은 구마라집을 국사로 삼아, 마치 신을 섬기듯이 존경했다. 친히 여러 대신들 및 스님들과 함께 구마라집의 경전 강의를 들었다. 또한 서역에서 들어온 경전과 논서 삼백여 권을 번역하도록 구마라집에게 말했다. 대량의 탑과 절을 지었으며, 그 곳에서 수행하는 출가자의 수가 항상 천 명 이상을 웃돌았다. 조정의 대소신료들도 모두 불교를 믿었다. 이로 인해 모든 지방에 불교를 믿는 분위기가 퍼졌으며, 열에 아홉은 불교를 믿었다.”
물론 요흥이 구마라집을 지극히 모신 것은 사실이지만 해서는 안 될 일도 했다. 억지로 결혼시킨 것이다. 『고승전』「구마라집전」에 기록이 전한다.
“요흥이 항상 구마라집에게 말했다. ‘대사의 총명함과 뛰어난 깨달음은 세상에 둘도 없다. 대사가 타계한 후 가르침을 이을 법의 종자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핍박해 마침내 기녀 열 명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 때부터 구마라집은 사찰에 머물지 않았다. 모든 것을 풍족하게 공급 받으며 별도로 관사를 짓고 살았다. 강의할 때마다 구마라집은 ‘냄새나는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다. 단지 연꽃만 취하고 냄새나는 진흙은 잡지마라.’며 비유를 들어 먼저 말했다.”
여광이 구자국을 점령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고승전』「구마라집전」에 있는 구절이다.
“여광은 구마라집을 사로잡은 뒤 그의 지혜가 얼마쯤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나이가 어린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고 희롱했다. 강제로 구자국의 왕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했다. 구마라집이 제안을 받지 않고, 심히 괴로움을 드러내며 간절한 말로 거절했다. 여광이 말했다. ‘도사의 지조는 너의 죽은 아버지 보다 나을 것이 없지 않느냐? 왜 한사코 거절하느냐?’ 이에 독한 술을 먹여 여자와 함께 밀실에 가둬버렸다. 핍박당하기를 이런 정도에 이르러 마침내 절개를 훼손당하고 말았다.”
인용한 두 기록을, 십육국시대의 중국인들이 불교를 믿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상에 태어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전래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실증적인 예(例)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구마라집과 승조가 역경에 종사할 그 시기의 장안 일대엔 전쟁이나 큰 소란이 없었다는 점이다. 413년 구마라집이 타계하고 414년 승조가 스승을 뒤따르고, 416년 후진 왕 요흥이 죽은 뒤 장안과 그 부근은 다시금 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리벤탈이 1948년 영역한 <조론> (복사본)
한편, 당시 구마라집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몰려든 문도는 3천여 명, 그들 가운데 입실한 사람은 오직 8명 정도였다. 나이 많은 사람 중에서는 도융(道融. 372∼445)과 승예(僧叡), 젊은 사람 사이에서는 도생(道生. ?∼434)과 승조가 으뜸이었다. 이들을 구마라집 문하의 사대제자[四聖]로 부르기도 한다. 구마라집은 이들과 함께 401년부터 413년까지 양과 질에 있어서 그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방대한 역경(譯經) 작업을 진행했다. 당연히, 구마라집의 역경에 승조도 참여했다. 『고승전』「승조전」에 “요흥은 승조와 승예에게 소요원에 들어가 구마라집을 도와 경론을 자세히 가다듬도록 시켰다.”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역경사업을 통해 반야중관을 비롯한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들이 중국인들에게 명료하게 소개됐다. 흉노(凶奴)·갈(羯)·선비(鮮卑)·저(氐)·강(羌) 등 다섯 민족이 번갈아 십육국(혹은 십구국)을 세웠다는 십육국(십구국)시대(304∼439)에 주로 활약했던 육가칠종(六家七宗. 반야사상에 대한 이해 방식이 서로 달랐던 일곱 개의 학파)에 소속된 학승·학자들이 대체적으로 ‘도교의 무(無)와 비슷한 그 무엇’으로 개념·내용을 오해했던 공(空)사상은 이때서야 비로소 ‘그 얽힘’을 풀고 나올 수 있을 정도였다. 구마라집의 역경사업은 나아가 불교의 핵심적인 몇 가지 교의(敎義)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제공해 중국불교의 전성기인 수당불학 형성에 지적 토대를 마련해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때인 405년 구마라집이 『대품반야경(마하반야바라밀경)』과 『대지도론』 번역을 마무리했다. 역경에 참여했던 승조는 ‘마음으로 체득한 반야사상에 대한 견해’와 ‘스승으로부터 배운 학식(學識)’을 바탕으로 유명한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을 지어 구마라집에게 읽어보기를 요청했다. 글을 본 구마라집이 승조에게 “불교경전에 대한 이해와 해설은 내가 그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만,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내가 자네 보다 못하다.”며 높이 칭찬했다.
또한 “공사상을 제일 잘 이해한 사람은 바로 승조 그다.”고 구마라집이 말 한 데서도, 반야중관사상에 대한 승조의 이해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승조의 동학 축도생이 407년 「반야무지론」을 여산의 혜원(慧遠. 334∼416)과 은사(隱士) 유유민(劉遺民. ?∼410) 등에게 전달했다. 이를 읽은 유유민은 “스님 가운데 뜻밖에도 평숙(平叔)이 있을 줄이야!”라며 감탄했고, 혜원은 찻잔을 올려놓은 탁자를 어루만지며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라며 찬탄을 연발했다.
스승이 칭찬했던 「반야무지론」에 이어, 410년엔 「부진공론(不眞空論)」과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잇따라 발표했다. 413년 스승 구마라집이 타계한 그 해 승조는 마지막 작품으로 보이는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지었다. 글들을 통해 승조는 인도의 중관사상을 중국에 정확하게 알리고 소개했다. 동시에 공사상을 잘못 이해한 기존 학설들의 단점을 지적해 동시대인과 후대인들에게 불교사상 이해의 큰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구마라집의 열반을 애도한 글 「구마라집법사뢰(鳩摩羅什法師誄)」도 현존한다.
따라서 당연히, 『조론』이 후대 중국불교·사상계에 끼친 영향 역시 지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위진남북조·당나라·송나라·원나라·명나라 등 매 시기 마다 『조론』을 주석한 책들이 나온 데서 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불교학과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될 필독서가 『조론』이며, 고대와 중세 중국사상을 정확히 해독하기 위해서는 『조론』 독해(讀解)가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조론』을 어떻게 읽어야할까?
첫째, 『조론(肇論)』을 통해 초기 중국불교 사상의 궤적과 형성 궤적 등을 천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홍명집(弘明集)』·『고승전(高僧傳)』·『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세설신어(世說新語)』 등 초기 중국불교와 관련된 문헌들을 광범위하고 종합적으로 검토해 당시 불교의 모습과 불교사상의 형성과정을 체계적으로 천착해야 한다.
동시에, 하안(何晏. 190∼249)·왕필(王弼. 226∼249)의 귀무론(貴無論) 현학, 완적(阮籍. 210∼263)·혜강(223∼262)의 자연론(自然論) 현학, 배위(267∼300)의 숭유론(崇有論) 현학, 상수(向秀. 227∼272)·곽상(郭象. 252∼312)의 독화론(獨化論) 현학 등의 여러 현학사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조론』에 계승되고, 『조론』이 이들 사상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전한 말 후한 초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중국전통 사상에 ‘부회(附會)’되고 노장철학으로 ‘격의(格義)’돼 해석되던 시기, 육가칠종(六家七宗)의 출현 등 여러 과정을 거쳐 적응·발전 되는 데, 『조론』이 이들 과정을 어떻게 소화해 중국불교의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는지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둘째, 승조의 또 따른 저술인 『주유마경(註維摩經)』과 승조의 친작(親作) 여부에 논란이 있는 『보장론(寶藏論)』 등을 『조론』과 함께 입체적으로 검토해 반야중관사상에 대한 승조의 견해와 특징, 노장철학과의 연관성, 그의 언어관 등을 조명해야 한다. 특히 「물불천론」·「부진공론」·「반야무지론」·「열반무명론」 등의 본문에 대한 정밀한 사상적·역사적·언어학적 분석을 통해, 승조가 이해한 반야중관사상의 핵심과 특징을 정학하게 파악해야 한다. 이를 통해 위진남북조 이전 시기 중국인들이 인도사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등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승조는 노장철학의 언어를 사용했다. 때문에, 승조의 사상이 노장철학의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중관사상을 설명하고자 그 언어를 차용한 것인지 등에 대해서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승조의 언어관 및 불교의 언어관 등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사상에 대한 승조만의 해석적 특징과 관점, 스승 구마라집과 동학(同學) 축도생(竺道生. ?∼434) 사상과의 차이점 등을 조명해야 함도 당연하다.
셋째, 『조론』과 관련된 각종 주석서 분석을 통해 이 책이 후대 중국불교에 끼친 영향, 후대 중국불교가 『조론』을 어떻게 보았는지, 나아가 주석가들이 그렇게 파악한 이유가 무엇인지 등을 검토해야 한다.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조론』 주석서는 『조론중오집해령모초(肇論中吳集解令模抄)』에 따르면 20여 종이다. 명나라 때 출판된 것도 적지 않다.
이 가운데 남조 진(陳. 557∼589)의 혜달(慧達)이 지은 『조론소(肇論疏)』 3권, 당나라 원강(元康)이 627∼649년 시기에 지은 『조론소(肇論疏)』 3권, 송나라 준식(遵式. 964∼1032)이 저술한 『주조론소(注肇論疏)』 6권, 송나라 정원(淨源. 1011∼1088)이 저작한 『조론중오집해(肇論中吳集解)』 3권, 송나라 정원(淨源. 1011∼1088)이 저작한 『조론중오집해령모초(肇論中吳集解令模钞)』 2권, 송나라 몽암(夢庵)이 지은 『몽암화상절석조론(夢庵和尙節釋肇論)』 2권, 원나라 문재(文才. 1241∼1302)가 저술한 『조론신소(肇論新疏)』 3권, 원나라 문재가 저술한 『조론신소유인(肇論新疏游刃)』 3권, 명나라 감산덕청(憨山德清. 1546∼1623)이 지은 『조론약주(肇論略注)』 6권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을 세밀하게 분석해 『조론』이 후세 중국불교와 사상에 끼친 영향을 천착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6)의 『종경록(宗鏡錄)』·『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만송행수(萬松行秀. 1166∼1246)의 『종용록(從容錄)』·『분양무덕선사어록(汾陽無德禪師語錄)』·『허당화상어록(虛堂和尙語錄)』등에 인용된 『조론』 문장들 분석해 선종 등에 끼친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특히, 명나라 말기 중국 오대산 사자굴 사문 진징(鎭澄)이 「물불천정량론(物不遷正量論)」을 지어 『조론』을 비판하면서 소위 ‘물불천론 논쟁’이 시작됐다. 10여 년 간 지속된 이 논쟁에 진계(眞界)·운서주굉 등 당시의 쟁쟁한 고승들이 참여했다. 이들의 글과 쟁점을 분석해 명나라 말기 중국불교의 특색과 『조론』의 영향력을 조명할 필요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처럼 중요한 저작인 『조론』에 대해 적지 않은 연구논문과 연구서들이 이미 출간돼 있다. 1900년대 이래 한국 유럽 중국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이 『조론』을 연구해 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중국의 탕용통(湯用彤. 1893∼1964)이 지은 『한위양진남북조불교사』(商務印書館. 1938), 오스트리아의 리벤탈(Walter Liebenthal)이 저술한 『조론(THE BOOK OF CHAO)』(PEKING:THE CATHOLIC UNIVERSITY OF PEKING. 1948), 일본의 츠까모토 젠류(塚本善隆. 1898∼1976) 등이 지은 『조론연구(肇論硏究)』(京都:法藏館. 1955), 네덜란드의 에릭 쥐르허(E.ZÜRCHER. 1928∼2008)가 지은 『중국을 정복한 불교(Buddhist Conquest of China)』(Leiden. 1959), 영국의 리차드 로빈슨(Richard H.Robinson)이 저술한 『인도와 중국의 초기중관파(Early Mādhyamika in India and China)』(Wisconsin. 1967), 타이완의 류꾸이제(劉貴傑)가 지은 『승조사상연구(僧肇思想硏究)』(臺北:文史哲出版社. 1985), 홍콩의 리룬성(李潤生)이 저술한 『승조(僧肇)』(臺北:東大出版公司. 1989), 타이완의 투엔치우(塗艶秋)가 지은 『승조사상탐구(僧肇思想探究)』(臺北:東初出版社. 1995), 한국의 김주경이 1998년 제출한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학위논문 『승조의 연구』 등이 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중국의 쉬캉성(許抗生)이 지은 『승조평전(僧肇評傳)』(남경:남경대학출판사. 1998), 중국의 차오슈밍(曹樹明)이 저술한 『승조사상의 의미와 그 역사적 변천(肇論思想意旨及其歷史演變)』(북경:중국사회과학출판사. 2009), 한국의 송찬우가 번역한 『조론』(서울:경서원. 2009), 중국의 탕시우렌(唐秀連)이 저작한 『승조의 불학이해와 격의불교(僧肇的佛學理解與格義佛敎)』(북경:종교문화출판사. 2010), 중국의 장춘뽀(張春波)가 주석한 『조론교석(肇論校釋)』(북경:중화서국. 2010) 등도 주목할 만한 연구서들이다.
이들의 연구 성과를 면밀히 검토해 장점을 잇고 단점을 비판적으로 지양(止揚)해야 한다. 다시 말해, 여러 다양한 주석서와 연구서들을 대조·분석해 『조론』을 사상적·역사적·언어학적인 관점에서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조명해, 초기 중국불교의 특색과 후기 중국불교에 끼친 『조론』의 영향 등을 다면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여러 측면에서 다각적으로 『조론』을 연구·분석하면 뒤따르는 효과도 상당하다.
첫째, 초기 중국불교도들이 인도불교사상을 어떻게 이해했고, 어떤 방식으로 통해 받아들여 중국인 자신들의 사상으로 변형시켜 갔는지를 입체적으로 밝힐 수 있다. 이는 하나의 외래사상과 문화가 다른 문화권·언어권에 소개됐을 때, 그 문화권·언어권에 적응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귀중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초기 중국불교사상의 형성과 그 궤적에 대한 연구는 중국사상의 다른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 중국불교가 후일 유교·도교와 습합되는 과정, 명대 이후 소위 “유학적 불교”로 변용되는 과정의 천착에 이 방법은 유효할 수 있다.
셋째, 각 시대별로 나타난 『조론』주석서에 대한 연구를 통해 매 시기 중국인들이 불교를 어떻게 이해했고, 중국사상사에서 불교의 위치를 어디쯤 설정했는지를 문헌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조론』과 주석서 및 관련된 사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중국사상의 역동적인 형성과정, 맑시즘을 받아들인 1900년 이후 중국사상의 형성과정, 나아가 ‘자본주의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오늘날의 중국사상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하나의 연구방법론·모델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조론』 연구는 초기 중국불교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중국사상을 역동적이고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할 것으로 판단된다.
종합하면, 『조론』 연구·독해에서 가장 중요하고 긴요한 문제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조론』이 과연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았는가 이다. 한국·중국·일본의 많은 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여기에 동의한다. 둘째는 『조론』이 과연 불교 중국화의 출발점이 되는 저작인지가 그 것이다. 중국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주장을 편다.
과연 그들의 주장은 정확한 분석에 기반한 것 인가? 『조론』을 읽어가며 차분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삼국시대(220∼280) 이래 십육국시대(304∼439)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상황, 사상적 변천, 불교사적 변화 등을 차례로 천착해야 한다. 하나의 사상은 하늘에서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지지 않는다. 앞선 시대와 동시대의 정치적·사상적·문화적 함의 속에서 태어나 성장·발전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조론』이 우리나라 불교와도 연관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삼국유사』권4 「의해」편 「이혜동진(二惠同塵)」조에 『조론』이 등장한다. “(혜공)이 일찍이 『조론』을 보고 ‘이것은 내가 옛날에 지은 것이다.’고 말했다. 혜공이 승조의 후신임을 이로써 알 수 있다.”는 구절이 그 것. 『조론』이 인용된 또 다른 문헌은 『금강삼매경론』 권하 '총지품 제8'. 원효는 '부진공론'의 마지막 부분을 여기에 인용해 놓았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 역시 『조론』을 언급했다. 의천은 30세 때인 1084년 정월 각종 불교서적을 구하고, 화엄종·천태종 교학연찬 등을 위해 송나라에 들어갔다 1086년 5월 귀국한 적이 있다. 당시 의천은 송나라 화엄학의 중흥조로 평가받는 항주의 정원(淨源. 1011∼1088)에게 화엄교학에 관해 묻기도 했다. 정원이 바로 송대의 『조론』주석서로 유명한 『조론중오집해(肇論中吳集解)』(3권. 1058년 編集)·『조론집해령모초(肇論集解令模钞)』(2권. 1061년述)·『조론중오집해과(肇論中吳集解科)』(1권) 등을 찬술한 그 사람이다.
귀국한 의천은 정원과 여러 번 글을 교환했는데, 이 글들이 『대각국사문집』과 『대각국사외집』에 지금도 남아 있다. 주목할 것은 『대각국사문집』 제20권에 실려 있는 「해 좌주를 전송하며(送海座主)」라는 시에 붙은 주석. 여기에 “강산이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음이 서로 계합하면 바로 이웃처럼 된다.”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유유민이 보낸 편지에 승조가 답하면서 쓴 글. 원문은 “강산수면(江山雖緬), 이계즉린(理契卽隣).”이지만, 『대각국사문집』 제20권에는 “조론운(肇論云): ‘(강산수요)江山雖繞, (도계즉린)道契卽隣’.”으로 돼있다. 게다가 의천이 1090년 편찬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3권. 1,010부 4,857권 수록) 권제3에 정원이 편찬한 세 권의 『조론』주석서 이름이 나란히 기재돼 있다.
『삼국유사』,『금강삼매경론』, 『대각국사문집』, 신편제종교장총록』 등에 『조론』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는 점에서 신라시대 이래 해동의 불교인들도 이 책을 적지 않게 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론』을 제대로 정확하게 읽어야 할 필요성과 중요성이 더욱 커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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